경양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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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만수위가 된 경양방죽의 풍경. 이때 이미 3분의 2가 매립된 상황임에도 이런 풍경을 보여주었을 정도니... # # 흑백사진

"장차 광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서 경관이 수려한 풍치지구로 보전되어야 한다. - 1935년, 경양방죽 매립반대투위의 반대 이유."

1 소개

1960년대까지 광주광역시에 위치했던 저수지.

2 역사

1440년 조선 세종 22년에 광주목사로 부임한 김방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3년의 공사기간을 들여 완성한 저수지였다. 그 규모는 4만 6천여평, 수심은 10m에 달했고 규모로 볼때 호남지역 최대의 인공호수였다.

경양방죽 안에는 두개의 작은 섬이 있었고 호수의 주변으로는 수백년된 팽나무, 왕버드나무, 귀목나무 고목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1940년대~50년대까지만 해도 여름에는 더위를 피할수있는 시원한곳으로, 겨울에는 얼어붙은 경양방죽위에서 썰매스케이트를 타는 광주시민들의 사랑받는 명소였다.

이런 경양방죽이 수난을 당하기 시작한것은 1940년이었다. 당시 전라남도 도지사였던 야지마는 일본건국기념 사업을 벌인다면서 계림초등학교 뒤에 있던 경호대라는 산을 헐어버렸고 일본인들의 거주구역을 만든다는 이유로 경양방죽의 3분의 2를 매립하려 했다. 광주부민들은 이에 반대해 저명한 인사였던 최흥종 목사를 대표로 조선총독부에 매립을 반대하는 청원을 했지만 총독부는 이를 묵살하고 결국 매립은 강행되고 말았다. 매립에 필요한 토사는 헐어버린 경호대의 토사를 이용했다고 한다.

8.15 광복 이후 광주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1]. 이런 가운데 제대로 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1950년대에 경양방죽은 늘어난 광주 인구로 인해 쓰레기 불법투기가 난무해 저수지 기능을 상실하고 수질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경양방죽 자세한 이야기

3 결국 사라지다

이런 가운데 1966년, 당시 광주시는 저수지 기능을 상실하고 수질이 악화되었다는 이유로 남은 경양방죽마저 매립을 결정했다. 태봉산을 헐어 그 토사로 경양방죽을 매립했는데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숨어있었다. 광주시는 시내의 중심도로인 금남로를 당시로선 파격적인 8차선으로 확장하려고 했는데 정부는 광주같은 작은 도시에 왕복 8차선 도로가 가당키나 하나라면서 예산을 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돈이 필요해진 광주시는 태봉산을 헐어 그 자리에 계림동 시가지를 조성하고 태봉산을 헐어서 나온 토사의 일부를 팔고 계림동 신시가지를 분양해 그 돈으로 금남로 확장공사를 했다(...) 1968년의 일이다.

3.1 현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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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는 오늘날의 광주고등학교와 계림초등학교를 잇는 선에서 광주역 방향으로 남서쪽으로 부채꼴로 펼쳐진 모양이었다고 한다.

경양방죽이 메워진 자리에는 시청을 지었는데 나중에 시청은 상무지구로 이전해 건물은 비어진 상태가 되었다가 철거되어 지금의 홈플러스 계림점이 되었고, 호수는 사라졌지만 경양방죽 둑방길[2]이 생겨서 광주시민들의 산책 코스로 새롭게 탄생되었다.

상당히 아쉬운 명소로 오늘날까지 남아있었다면 시내 중심부에 거대한 호수가 있는 도시로 널리 유명해졌을 테지만... 하지만 이제와서 복구하는것도 무리라서 결국 추억의 명소로만 남게 될것 같다.

4 여담

  • 계림동에 있었던 학교법인 유은학원에 속한 학교들의 교가에 경양호가 등장한다. 사실 4개 학교 모두 가사가 똑같고 중간에 광주동성, 광주여상, 동성여중으로 바꿔부른다
  1. 불과 5년 사이 8만(1944년)에서 14만(1949년) 가까이 증가하여 남한 5대 도시가 되었다.
  2. 일명 '개미길' 이라고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