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양

高麗樣

1 개요

원 간섭기 당시 원나라에서 유행하였던 고려의 풍습. 몽골풍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단어라고 볼 수 있다.

2 내용

대몽항쟁이 끝난 이후 다루가치, 정동행성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하여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서는 인적, 물적인 교류가 성행하였다. 자연스럽게 양국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문화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고려의 문화가 원나라에 퍼져나간 경로는 다양하지만 가장 주요한 경로는 바로 공녀(貢女), 즉, 원나라 왕실과 귀족들이 후궁·궁녀·시첩·시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고려에게 요구한 여인들을 통해서였다. 단순히 소수의 상류층만이 아니라 원나라의 일반 사병들도 고려 처녀들을 결혼대상으로 선호하였고, 이러한 요구를 맞추기 위해 당시 고려가 결혼도감·과부처녀추고도감 등의 기구를 통하여 원나라에 보낸 수많은 여성들이 원나라 왕실 및 대중 사이에 고려의 풍습을 전파하게 된 것. 당시 원나라 지배층의 살림은 고려 여자들의 취향으로 꾸며졌으며, 그러한 고려풍을 본받는 것이 한때 유행되었다.

여러 풍습 중에서도 각종 복식과 아청(鴉靑)[1]등의 기물이 크게 각광을 받았는데[2] 이를 총칭하여 고려양이라 하였다. 몽골풍이 아직도 한국어 일부 단어에 그 흔적이 남아있듯이, 고려양 역시도 오늘날까지 남아서 지금도 몽골에서는 고려만두·고려병()·고려아청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원피스 모양의 전통 중국식 한푸와 다른, 풍성한 치마와 저고리 조합의 투피스 한복 스타일이 원~명대 중국 여인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이 역시 고려양이었다. 고려양은 원나라 때의 유행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 명나라 시대에도 한동안 유지되었으며 본격적으로 금지된 것은 명나라 건국 후 100여년이 지난 홍치제 시기였다.
  1. 鴉靑. 검은색을 띤 푸른빛.
  2. 아무래도 문화적으로는 고려가 원나라보다 앞섰던 탓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