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의 역대 황제 | |||||
9대 헌종 성화제 주견심 | ← | 10대 효종 홍치제 주우당 | → | 11대 무종 정덕제 주후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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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 효종(孝宗) | |
시호 | 달천명도순성중정성문신무지인대덕경황제 (達天明道純誠中正聖文神武至仁大德敬皇帝) | |
연호 | 홍치(弘治) | |
성 | 주(朱) | |
휘 | 우당(祐樘) | |
생몰기간 | 1470년 ~ 1505년 6월 8일(36세) | |
재위기간 | 1487년 9월 22일 ~ 1505년 6월 8일(17년 259일) |
역대제왕묘 배향자 |
1 개요
홍치제와 그 전 황제들의 어진과 그 이후의 어진을 비교하면 같은 황족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실제로 이전까지는 영락제, 선덕제, 정통제, 성화제는 물론 성격은 유약하다는 홍희제도 거대한 체구에 풍성한 관우 수염이 돋보이는 황제들이었지만, 홍치제 이후에는 황제들의 얼굴이 급 쪼그라들어 마른체형에 수염도 풍성하지 못하다. 그나마 만력제가 풍채는 비슷하지만 수염이 빈약한편이고..
태아 때부터 부친 성화제의 후궁인 만귀비에 의해 낙태약으로 독살될 뻔했으나 무사히 태어났다. 그러나 만귀비의 끊이지 않는 핍박 때문에 어머니가 결국 만귀비에게 독살당하고 민가에서 몰래 양육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고난이 많은 소년기를 보냈다.
주우당이 태어나자 만귀비는 갓 태어난 주우당을 죽이라고 환관에게 시켰는데 환관은 그런 아기인 주우당을 보면서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모든걸 각오하고 아기를 궐밖으로 빼돌려서 자신의 지인이 사는 집에 숨겨 기르게했다. 당연히 만귀비에게는 죽여서 소각시켰다고 거짓보고를 했다. 이후 성화제가 후사가 없어서 걱정을 하자 이 환관이 자신이 빼돌린 황자가 있다고 보고를 했고 이에 주우당은 성화제의 명에 따라 입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태자가 된 후 황제 수업에 충실했으며 1487년 성화제가 죽자 명나라의 10대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 신하들이 만귀비의 전횡을 징계해야 한다고 상소했으나 홍치제는 이를 그냥 없던 일로 했다. 사실 아버지 성화제 때에도 만귀비를 징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만귀비를 너무 아꼈던 성화제 역시 이를 그냥 넘겨버렸다. 효성으로 이름난 홍치제였기에 아버지의 결정을 따른 것이라곤 해도 자기를 핍박했던, 그것도 목숨까지 위협했던 여인에 대해 그냥 넘겼던 것을 보면 대인배. 만귀비는 1487년에 61세로 사망했다.
즉위 후 업적은 제법 볼만한데, 성화제 때까지 혼란에 빠졌던 국정을 수습하고(홍치제의 즉위 초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최부의 표해록을 보면 홍치제는 지방의 관리들을 죄다 감찰해서 문제가 있는 경우 모두 사임시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홍치제는 이들 관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관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너네 다시는 관직생활 할 생각 마라'는 의미였다고 한다.)명나라의 법인 대명률을 재정비하여 문형조례를 반포했고 외정적으로는 건주여진과 타타르족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명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런 주목할 만한 치적으로 인해 그의 치세를 '홍치 중흥(弘治中興)'이라 부르며 혼란에 빠졌던 명나라가 다시 부흥한 시기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제법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리기 마련이었던 여러 중국 황제들 속에서 정실 황후에게만 충실한 황제라는 점. 정말 금욕주의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색을 밝히지 않아서 정실 황후인 효강경황후 장씨에게만 충실했으며 후궁을 두지 않았다. 황후와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고 하며 한 번은 성화제의 국장 기간 동안에 신하들이 후궁감을 몇 명 뽑아놓았다는 말을 듣자 "삼년상도 안 끝났는데 어찌 후궁을 들이겠느냐?"며 이를 물렸다는 일화도 있다. 우왕ㅋ굳ㅋ.
이렇듯 업적과 인간성 딱히 흠잡을 만한 곳이 없는 군주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인지 오래 살지는 못했다. 1505년 감기를 앓다가 어의가 가져온 약을 마시고 코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결국 병상에서 재상들에게 태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재위기간은 18년이었지만 향년 36세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들이 바로 정덕제였다는 점. 그야말로 호부견자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어쨌든 홍치제 본인은 군주로서 모범을 보였고 그의 치세 동안 경제적 호황과 잠잠한 변방이 함께 해서 명나라의 태평기를 이끈 중흥의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 뒤의 암울한 명나라의 황실사를 생각하면 진정한 임금 구실 제대로 한 마지막 명나라 임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군주. 한족 왕조의 마지막 명군이기도 하고. 숭정제는 아깝긴 하지만..
여담으로 그의 치세 초기에 원나라 말부터 명나라 초를 휩쓴 고려양의 복식을 금지시켜서 이전의 한족의 한푸로 돌어가게 된다. 원명 시기의 한류, 고려양
그리고 이후에도 홍치제와 같은 명군(名君)들이 잇달아 명나라를 훌륭히 다스렸으면 대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2 기타
홍치제의 시기는 조선 성종 말년과 연산군 전반에 걸친다. 또한 이때 태풍에 휘말려 표류했던 최부라는 인물이 일기문 형식으로 적은 표해록이 남아있어 이시기 중국의 사회상이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 혹은 제10대 황제. 이는 6대 정통제가 명의 8번째 황제 천순제로 복위된 적이 있기 때문인데, 천순제 시절을 따로 한 대수로 치면(그러니까 정통제를 6, 8대 황제로 친다면) 10대 황제가 된다. 물론 그냥 순번으로는 9번째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