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주의 역대 황제 | |||||
후한 상음공 유빈 | ← | 초대 태조 곽위 | → | 2대 세종 시영 |
郭威
(904 ~ 954)
후주의 제1대 황제. 곽간의 아들.
형주 요산 사람으로 당나라의 절도사인 유인공이 순주를 공격하면서 곽간이 전사하자 고아가 되었으며, 노주 사람인 상씨에게 의지했다. 곽위가 18세 때 이계도가 군사를 모집해 이에 응해 용맹으로 그의 총애를 받았으며, 저자에서 힘으로 사람들을 괴롭힌 백정을 죽인 일로 관리에게 체포되었지만 이계도가 몰래 풀어주면서 그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계도를 따라서 후량에 귀부했다가 후진이 후량을 멸망시키면서 이계도를 주살하자 후당에 투항해 글자를 알고 셈을 할 수 있어 군리를 지냈으며, 곤외춘추를 읽는 것을 즐겨 병법을 알아 시위군리가 되었다. 유지원 휘하에서 시위친군도우후가 되어 그의 총애를 받아 그가 가는 곳마다 따랐으며, 유지원이 태원에서 거병해 후한을 건국하자 추밀부사가 되었다.
948년에 유지원이 죽기 전에 사홍조와 함께 유승우를 부탁받으며, 유승우가 즉위해 추밀사가 되었다. 3월에 이수정, 조사관, 왕경숭 등이 반란을 일으켜 동중서문하평장사가 더해졌으며, 곽위는 군중에서 사졸들과 같은 차림을 하면서 위에서 하사한 것을 장수들이나 사졸들에게 나눠주어 그들이 기뻐했다. 곽위는 영채 3개를 세우면서 이수정이 군량이 바닥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해서 승리했으며, 이수정이 자살하고 조사관, 왕경숭 등의 항복을 받았다.
곽위는 검교태사 겸 시중이 되었지만 자신의 공을 다른 관리에게 양보했으며, 겨울에 요나라가 공격하자 위주로 군사를 움직여 물러나게 하며, 자신의 명성을 시기한 유승우가 자신을 죽이려 하자 950년 3월에 거병하면서 가족들은 모두 주살당했다. 유승우를 죽이고 유빈을 일시적으로 황제로 세웠다가 12월에 요나라에 북벌을 했으며, 유빈을 죽이고 감국이 되었다가 951년에 황제에 즉위해 후주를 건국하면서 연호를 고쳤다.
여름 4월에 부인 동씨를 덕비로 세우고 5월에는 선조들을 황제로 추존했으며, 951년 5월에는 동으로 정벌해 조주에서 유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면서 연주를 함락하자 연주에서도 사면을 했다. 고조부, 증조부, 부친 등의 신주를 영접해 태묘에 모아서 제사를 지냈으며, 954년에 남쪽 교외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대사면을 행하고 연호를 고쳤다. 신하들이 성명문무인덕황제(聖明文武仁德皇帝)라는 존호를 올렸으며, 업을 폐지하고 곽위는 자덕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