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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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後主

뒤를 이은 군주라는 뜻으로 정식 묘호를 받지 못한 군주들이 받는 시호이다.
촉한유선, 북제의 고위, 후량소종, 남진진숙보, 전촉의 왕연, 남한의 유창 등이 있다.

2 後周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907 ~ 1279오대십국(五代十國)카라 키탄/대거란, 대요(大契丹, 大遼)
당항(黨項)
송(宋)
,대리국(大理國),
북송(北宋)백고대하/서하(西夏)
남송(南宋)안춘 구룬/대금(大金)
1270 ~ 1368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1368 ~ 1644대명(大明)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5대(五代)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후주(後周)
중국의 역사
오대십국시대/
후한오대십국시대북송
 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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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五代)의 마지막 왕조로 951년 후한을 무너뜨리고 곽위(郭威)가 개봉(開封)에 세운 국가이다. 국호는 주(周)이지만 과거의 주무왕이 세운 주와 구별하기 위해 후주라고 부른다.

곽위는 황제가 되었지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954년 죽을 때 처남인 시영(柴榮)을 양자로 세워 제위를 잇게 하니 이가 후주 세종(世宗, 954~959)이다. 세종은 북한(北漢)과 싸워 승리를 거둔 뒤 내정에 충실을 기하고 군대를 정비해 천하통일의 야심을 품고 남당(南唐), 북한을 압박하고 요나라를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959년 겨우 39살에 병사한 뒤 그의 어린 아들이 제위를 잇자, 군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장군 조광윤(趙匡胤)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이로서 통일왕조의 초석을 닦은 후주도 겨우 9년만에 멸망하고, 조씨에 의한 이 개창되었다.

여담이지만 이 오대 최후의 왕조인 후주의 황족인 시씨는 조광윤의 쿠데타 때에 선양했기 때문에 사실상의 대귀족으로서 존중받았다.[1] 그래서 남송 최후의 전투인 애산 전투때 시씨 일족은 남송의 최후의 군대와 함께 항전하다가 멸망당한다. 소설『수호지』에 나오는 소선풍 시진(柴進)도, 이런 역사적 사유 때문에 아마 후주 세종의 후예로 그려진 듯 하다.

고려와도 관계가 있다. 이 나라 출신 쌍기(雙冀)는 956년 광종 시대의 고려로 들어와 귀화하고, 한림학사와 문형에 올랐다. 그는 958년 과거 제도를 창설하고 첫 지공거가 되었다. 이 과거 제도는 세습이 아닌 실력으로 사람을 선발하는 제도로서 그동안 군림하였던 호족 세력을 누르고 광종의 왕권강화에 일조하였다. 대표적인 중국계 한국인인 셈인데, 후손은 드물다.

대수묘호시호성명연호재위기간능호
-신조(信祖)예화황제(睿和皇帝)곽영(郭璟)--온릉(溫陵)
-희조(僖祖)명헌황제(明憲皇帝)곽심(郭諶)--제릉(齊陵)
-의조(義祖)익순황제(翼順皇帝)곽온(郭蘊)--절릉(節陵)
-경조(慶祖)장숙황제(章肅皇帝)곽간(郭簡)--흠릉(欽陵)
1대태조(太祖)신성공숙문무효황제(聖神恭肅文武孝皇帝)곽위(郭威)광순(廣順) 951 ~ 953
현덕(顯德) 954
951 ~ 954숭릉(嵩陵)
2대세종(世宗)예무효문황제(睿武孝文皇帝)시영(柴榮)
곽영(郭榮)
현덕(顯德) 954 ~ 959954 ~ 959경릉(慶陵)
3대-공황제(恭皇帝)시종훈(柴宗訓)
곽종훈(郭宗訓)
현덕(顯德) 959 ~ 960959 ~ 960순릉(順陵)
  1. 물론 이 부분은 조광윤 개인이 숙청과 보복의 릴레이를 끊으려고 결정을 내린 것도 크다. 실제로 그는 부하들도 숙청하지 않고 술자리를 연 뒤 정중하게 '부탁' 하여 병권을 넘겨받는 형태로 군권을 모으는 등 최대한 온건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