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라

중국의 역사
中國史
기원전 1600 ~ 기원전 206기원전 206 ~ 907년
907년 ~ 1644년1616년 ~ 현재
중국의 역사 907년 ~ 1644년
907 ~ 1279오대십국(五代十國)카라 키탄/대거란, 대요(大契丹, 大遼)
당항(黨項)
송(宋)
,대리국(大理國),
북송(北宋)백고대하/서하(西夏)
남송(南宋)안춘 구룬/대금(大金)
1270 ~ 1368다이 온 예케 몽골 울루스/대원(大元)
1368 ~ 1644대명(大明)
,남명(南明), ,대순(大順), ,대서(大西), ,명정(明鄭),
몽골의 역사
고대중세근현대
중세 몽골의 역사
요나라
카마그 몽골케레이트메르키트타타르나이만
몽골 제국
킵차크
칸국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원나라
이흐 칸국티무르 제국북원
오이라트
준가르청나라
청나라 시대
만주의 역사
고대중세근세근현대
당(통일왕조)발해
요나라발해부흥운동여진
금나라
몽골 제국
원나라

(Liao Dynasty)


실질적 직할 지배영역만 표시된 요나라 영토.

공식명칭대요(大遼) / 대거란(大契丹)
위치현재의 몽골초원, 내몽고 자치구, 만주 일대
수도상경임황부
정치체제군주정
국가원수황제(皇帝)
언어거란어, 중세 중국어
종족거란족, 한족, 발해인, 여진족 등
종교불교
존속기간916년 ~ 1125년
성립 이전거란

1 개요

중국의 북방민족인 거란의 왕조 중 하나.

사실 '요'라는 국호는 2대 황제 태종 때 처음 썼는데, 정작 거란인들은 '요'라는 중국식 국호를 쓰다 말다를 반복했다. 요를 국호로 사용할 때에도 거란인들 스스로는 카라 키탄(Kara Khitan), 즉 '대거란'이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했다. 흔히 카라 키탄은 요의 후계국인 서요의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요가 카라 키탄이라 칭한 것은 대거란이라는 본래의 국호를 계속 사용한 셈. 카라 키탄이라는 말을 한자로 흑거란(黑契丹)이라고도 쓰는데, 이는 '카라'가 튀르크어로 검다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거란(大契丹)'이 본래 의미이다.

다시 말해 거란이라는 이름은 민족 이름도 가리키지만 이들이 세운 나라의 정식 국호이기도 하다.

200여년동안 지속되며 독자적인 문자도 만들고, 막강한 군사력으로 동시대의 한족 왕조였던 을 번번히 관광태웠다. 개조는 야율아보기. 황성은 야율(耶律). 거란어는 사라진 언어라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다. 거란어로 '엘뤼'라고 발음된다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건 현대 중국어 발음 예뤼(Yélǜ)가 와전된 것이다. 거란 문자를 통해 재구한 음가에 따르면 '이라우우드(i.ra.u.ud)'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5대10국의 혼란기 중에 후진의 석경당이 찬탈 과정에서 도움을 요청한 것을 계기로 북방 영토인 연운 16주(燕雲十六州. 베이징 ~ 타이위안 인근의 중국 동북부 지방)를 획득하였다. 이후 혼란기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송이 태종대에 이 지역을 되찾고자 전쟁을 걸었으나 소태후가 이끄는 요군에게 관광당했다. 요는 진정 당나라 군대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약해빠진 송나라를 어퍼컷 내리컷으로 마구 박살내고 끊임없이 송을 뜯어먹었다. 워낙 괴롭힘이 심했는지 수호지 등엔 원래 없던 요나라를 밟는 부분까지 추가되었다.

특징적으로는 통치제도를 분리했다는 것. 거란인과 한족을 분리해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다스렸다. 본디 자신들이 살던 유목민족의 땅은 옛날처럼 다스렸고, 연운 16주 등의 새로 확보한 영토는 군현제를 채용하여 다스렸다. 독자적 문자를 만드는 등의 행위는 이런 과정에서 송의 문물을 너무 받아들여 자신들이 한화(漢化)할까봐 경계했기 때문. 1국가 2체제 경영에 성공한 나라. 그리고 청나라는 1국가 5체제. 청이 요나라를 참고했다는 얘기도 있다 카더라 이중 통치정책의 흔적은 의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송사 요열전에 따르면 황제와 한인 관료들은 중국식 복장을 착용하였지만 황후와 거란인 관료들은 거란식 복장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실제 요나라 시대 벽화들을 보면 고려북송 관복과 비슷한 단령사모를 입은 요나라 관리들과 변발을 하고 호복을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같은 그림에 함께 그려져 있다.[1]

잘 나가던 나라였지만 7대째 흥종때부터 삐딱선을 타더니 결국 9대, 천조제여진족과 그간 얻어터진 걸 갚고자 몰래 결탁한 송의 협공을 받고 나라가 망해버렸다.

...그 다음 송나라여진족에게 추가로 관광탔다. 요나라와의 전투에서 북송군의 허접한 전투력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에 금나라도 송나라를 만만한 상대로 인식해서이다.

  • 원래 요는 송은 적당히 상대하면서 공물과 약간의 영토를 받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 대신 힘을 아껴서 바이칼 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북방민족들을 통제했다. 이 때문에 의외로 요는 중앙아시아 쪽에서 상당히 유명하며, 요가 멸망한 후 서쪽으로 멀리 달아나서 세운 서요도 상당히 이름을 떨쳤다.

몇몇 국가들이 중국을 가리키는 명칭 중 키탄 혹은 키타이(영어로 하면 캐세이(Cathay)[2])가 있는데, 이는 바로 거란족들이 스스로를 부른 명칭인 키탄에서 온 것이다. 참고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에서도 중국을 키타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러시아인들도 중국키타이[3]라 부르는 것을 보면 요의 역사적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에겐 고려 초기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애초에 이들이 생긴 게 발해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거라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초기 북진정책으로 북방을 공략하며 동북아시아의 세력구도를 엿보던 고려와는 내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잘 해보자고 보낸 요의 낙타선물을 고려 태조 왕건이 모두 다리에 묶어놓아 굶겨 죽이고 사신은 귀양보내버린 일화가 유명하며, 요성종 대에는 3번의 큰 전쟁을 치르게 되어 한 번은 서희의 말빨에 휘둘려 엄한 땅만 삥 뜯기고, 한 번은 수도 개경도 털고, 또 한 번은 강감찬에게 탈탈 털리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여요전쟁 항목 참조. 고려와 요나라의 교역 관계는 항목 참조

이 전쟁 후 요는 고려는 물론, 송까지 더 이상 공략할 여력과 의욕을 상실하여 약 120여 년 간은 고려-요-송의 3강 구도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며 무역과 문화를 활발히 나누게 된다.

요와 서요의 멸망 후 유민들은 몽골의 전위부대로 활용되면서 몽골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그래서 몽골과 중국은 현재 이 민족의 역사적 귀속 여부를 놓고 다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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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시대에 그려진 벽화들이 유명한데 당시 의복, 생활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2 요나라와 불교

요나라 쇠퇴의 원인으로는 권신의 전횡으로 인한 국정의 혼란이 거론되지만 또 다른 원인으로 불교에 심취한 요나라 황실이 지나치게 많은 액수를 절에 시주했고. 불교 관련 잦은 토목공사가 끊이지 않아 재정 악화가 가속화 된 점도 꼽힌다. 요나라 황실은 중,후반기로 들어갈수록 불심이 아주 깊어졌는데 절에 어마어마한 금액의 시주는 기본이었고 대규모 불상과 절을 건설하느라 국가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지게 되었다. 요나라 황실의 국찰이었던 산시성의 화엄사는 금나라때 다시 중건하였긴 했지만 그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며 고려도 대장경을 만들때 요나라 불경을 참조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요나라 불교 관련 유물, 유적들을 보면 그 스케일과 화려함에 거란을 단순히 야만족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쇼킹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근데 과연 거란족이 만들었을까는 의문이다. 요서에 의하면 싸우고 태우고 빼앗는게 주특기였던 북방민족인 거란족이 불교 경전 건축물을 만들때 대거의 한족 장인들을 채용했기때문.만약 그렇다고 해도 이것에 진심으로 심취하고 신앙했다는 증거이니 단순한 야만족이란 인상과는 대비되는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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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궁사 목탑. 현존 최고 목탑이다.
마우스 휠 내리니까 점점 커지는데요
나만 그리느낀게 아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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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시대 관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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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 다통 화엄사의 요나라 시대 불상들[4]

요가 이렇게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던 이유는 처음에는 불교를 믿던 한족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거란은 원래 샤머니즘을 숭상하던 민족이었던 만큼 처음부터 불교에 심취한 민족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요나라 황실, 귀족을 비롯한 거란족들까지 진심으로 불교를 승상하기 시작했다. 성종 시기에 이르러서는 불교 문화가 중원의 한족 문화에 맞서 거란의 문화적 우수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이 됐다.

특히 흥종도종은 신실한 불교 신자였고[5] 불교는 초창기부터 국교로 공인되었으며 황실의 보호를 받고 불교 신앙이 장려되었다. 유명 사찰의 승려들(대사들)은 황제와 시를 주고 받으면서 사적으로 절친하게 지냈으며 거대한 사찰과 불상 건립, 대장경 간행은 물론이고 말기에 가면 승려들이 관직 진출이 두드러지는등 정교 일체화 현상까지 일어났다.

요사에는 도종하루에 3000명이 출가(...)했으며 36만명의 승려들에게 공양을 올렸다고 적혀 있다. 동시대 다른 나라에서는 유학이 교육을 담당하였지만 요에서는 사찰이 서민들의 교육까지 담당하게 되었고 사찰이 관리의 등용문이 되기도 했다. 덕분에 불교 국가가 된 요나라는 화려한 불교 문화 유산들을 남길 수 있었지만 동시에 거란 고유의 샤머니즘 신앙은 크게 쇠퇴하였으며 상무 정신이 약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요나라 황실에서는 불교를 장려하면 승려들이 빈민층을 구휼하는데 힘쓰는 등 좋은 일을 하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했는데 정작 그 시대 요나라에 다녀왔던 송나라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상당수 사찰들이 고리대업으로 돈을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후대에는 비구, 비구니로 출가하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수계(受戒)를 내리는 것을 제한했을 정도.

요나라의 불교는 친척인 몽골티베트 불교가 아닌 대승불교였다. 요나라 시대의 유명한 승려로는 선연(鮮演)대사가 있다. 화엄 사상을 토대로 선종과 교종의 통합을 주장하였다.

3 역대 황제 목록

  • 추존 황제는 목록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대수묘호시호휘(거란식/중국식)연호재위기간
1대태조(太祖)대성대명신열천황제
(大聖大明神烈天皇帝)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야율억(耶律億)
신책(神冊, 916~922),
천찬(天贊, 922~926),
천현(天顯, 926)
916~926
2대태종(太宗)효무혜문황제
(孝武惠文皇帝)
야율요골(耶律堯骨)/
야율덕광(耶律德光)
천현(天顯, 927~938),
회동(天顯, 927~938),
대동(大同, 947)
926~947
3대세종(世宗)효화장헌황제
(孝和莊憲皇帝)
야율올욕(耶律兀欲)/
야율원(耶律阮)
천록(天祿, 947~951)947~951
임시-익무황제(翼武皇帝)야율찰할(耶律察割)-951
4대목종(穆宗)효안경정황제
(孝安敬正皇帝)
야율술률(耶律述律)/
야율경(耶律璟)
응력(應曆, 951~969)951~969
5대경종(景宗)효성강정황제
(孝成康靖皇帝)
야율명의(耶律明扆)/
야율현(耶律賢)
보녕(保寧, 969~979),
건형(乾亨, 979~982)
969~982
6대성종(聖宗)문무대효선황제
(文武大孝宣皇帝)
야율문수노(耶律文殊奴)/
야율융서(耶律隆緖)
건형(乾亨, 982),
통화(統和, 983~1012),
개태(開泰, 1012~1021),
태평(太平, 1021~1031)
982~1031
7대흥종(興宗)신성효장황제
(神聖孝章皇帝)
야율지골(耶律只骨)/
야율종진(耶律宗眞)
경복(景福, 1031~1032),
중희(重熙, 1032~1054)
1031~1055
8대도종(道宗)인성대효문황제
(仁聖大孝文皇帝)
야율열린(耶律查剌)/
야율홍기(耶律洪基)
청녕(清寧, 1055~1064),
함옹(咸雍, 1065~1074),
태강(太康, 1075~1084),[6]
대안(大安, 1085~1094),
수창(壽昌, 1095~1101)[7]
1055~1101
9대-천조황제
(天祚皇帝)
야율아과(耶律阿果)/
야율연희(耶律延禧)
건통(乾統, 1101~1110),
천경(天慶, 1111~1120),
보대(保大, 1121~1125)
1101~1125

4 추존 황제

묘호시호성명재위기간능호비고
숙조(肅祖)소열황제(昭烈皇帝)야율누리사(耶律耨里思)--태조 추숭, 태조의 고조부
의조(懿祖)장경황제(莊敬皇帝)야율살랄덕(耶律薩剌德)--태조 추숭, 태조의 증조부
현조(玄祖)간헌황제(簡獻皇帝)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태조 추숭, 태조의 조부
덕조(德祖)선간황제(宣簡皇帝)야율적노(耶律的魯)--태조 추숭, 태조의 부친
의종(義宗)문헌흠의황제(文獻欽義皇帝)야율배(耶律倍)-현릉(顯陵)세종 추숭, 태조의 장자
-장숙황제(章肅皇帝)야율이호(耶律李胡)--목종 추숭, 태조의 3자
순종(順宗)대효순성황제(大孝順聖皇帝)야율준(耶律濬)--천조제 추숭, 천조제의 부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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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항공사 캐세이퍼시픽 항공(國泰航空有限公司, Cathay Pacific Airways Ltd.)의 그 캐세이
  3. 참고로 이 단어는 굉장히 경멸적인 의미로 쓰이니 조심하자. 특히 스킨헤드들은 키타이스키라고 하면 정말로 죽이려고 할 정도로 중국인을 싫어한다.
  4. 화엄사의 요나라 불상들은 그 조형미가 뛰어나기 때문에 중국의 비너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5. 이 때문에 여요전쟁 이후 고려와 요나라 불교계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6. 혹은 대강(大康)
  7. 혹은 수륭(壽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