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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고, 무고한 백성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있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살아간다. …이것이 조국의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길이고, 이것이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면 보잘 것 없는 생명 바치기에 아까움이 없노라."
1975년 4월 11일 서울대학교 농과생 김상진이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항거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장을 쓰고 할복자살한 사건. 이후 벌어진 명동민주구국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1975년 4월 11일 서울대 농대생 300명이 모여 성토대회를 가졌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속된 구속학생을 석방하라는 모임이었다. 이 중 3번째 연사로 등장한 김상진은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뒤 할복하였다. 그는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면서 죽어가는 중에도 친구들에게 애국가를 불러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튿날 아침 끝내 숨을 거두었다.
'김상진 할복자살사건'을 계기로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더욱 거세게 일어나자, 박정희는 5월 13일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이나 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사건발생 약 1달 후인 5월 22일에는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가운데 1천여 명이 '김상진열사 추도식'을 거행한 후, 긴급조치 9호의 철폐를 외치는 대규모 시위를 감행했다. 이 시위로 인해 한심석 서울대학교 총장이 사임하고 박현식 치안본부장, 서울남부경찰서장이 경질되었으며, 29명의 학생이 구속되었다.
민주회복국민회의에서는 4월 22일 오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김상진의 추도식을 가졌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상진 추도식에 참석하려 하였으나, 그날 아침 경찰관들이 사저에 모여들어 윤보선의 바깥 출입을 막았다.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불법적으로 연금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