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형

동명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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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1 金在衡

1890년 1월 8일~1966년 5월 30일.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독립유공자 공훈록

1.2 金在亨

?~1920년 10월.
중국 길림성에서 독립단원으로 활동하다 간도 참변 때 피살되었으며,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독립유공자 공훈록

2 대한민국의 PD

金在衡. 1936년 6월 5일~2011년 4월 10일

1936년에 충북 음성에서 태어나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에 CBS 1기로 성우 생활을 시작해 성우 활동을 하다가 1957년에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연극부 활동을 하면서 유치진, 장한기 교수와 선배인 유현목에게 가르침을 받고 연극인이 되려고 했지만 1961년에 자신의 학교 동문이자 당시 KBS 국장인 윤길구 씨의 권유로 아버지가 공부 차 영국에서 사 온 TV에 관련된 책을 읽고 공부해 KBS 입사 시험에 합격하여 PD로 전향한 뒤 최초의 TV 사극 <국토만리>의 제작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제작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962년에는 어린이 드라마 <영이의 일기>를 제작했다.

이후 1964년에는 동양방송으로 이직해 편성국 제작 과장이 되어 1980년 폐국 때까지 <별당아씨>, <달동네>, <인목대비>, <민며느리>, <상노>, <서울이여 안녕> 등을,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KBS로 이직이 된 뒤에 예능국 부국장, 드라마 제작국 제작위원을 거쳐 1996년 정년퇴임 시까지 <이화>, <왕도>, <왕조의 세월>, <대춘향전>, <꽃반지>, <전설의 고향> 일부 에피소드, <한명회> 등을, 퇴직 뒤에는 용의 눈물, 여인천하#s-1 등의 월탄 박종화 선생의 걸작들을 드라마화해 연출하였다. 현역 시절 그의 까무잡잡한 얼굴색으로 인해 '깜국장'이란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96년 8월부터 98년 5월까지 <용의 눈물> 촬영 당시 조연급 탤런트들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이유 탓인지 99년 8월 19일 배임수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결국 KBS 1TV 태조 왕건 연출에서 손을 떼야 했으며[1] 99년 11월 26일 서울지검으로부터 징역 2년, 추징금 1612만원이 구형되었고 이후 타방송사로 처음 옮겨 연출한 SBS <여인천하>로 재기에 성공했다.

하지만, 2003년 왕의 여자의 실패 이후 하락세를 걸어 2006년 삼청교육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감독을 맡는다고 화제를 모았으나 결국 제작 취소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리고 2007년 마지막 드라마 왕과 나를 연출했는데 이 드라마도 이병훈이 맡은 이산에게 밀렸고, 결국 지병인 췌장암으로 인해 드라마 제작에서 손을 떼고 대신 교수로써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주력하다 2011년에 위 천공 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장남은 영화감독 겸 제작자인 김창만, 차남은 CF 감독인 김두만이 있다.

3 대한민국의 교수

金在亨. 상법학자. 조선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4 대한민국의 대법관

金哉衡(개명전 : 金載亨). 민법학자. 전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재형(1965) 문서 참조.
  1. 원래 2000년 1월 1일 첫 회가 나갈 예정이었으나 김재형 PD 문제 탓인지 같은 해 4월 1일로 첫 방송일이 변경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