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독립운동가로 광복 후에는 소설가로 활동한 중국 옌벤의 조선족 작가이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조선의용대 분대장 출신으로 유명하다.
고향은 함경남도 원산시.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1929년 원산총파업을 지켜보면서 사회 및 독립운동 의식에 눈을 떳다고 한다. 이후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30년대초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약산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담[2]하였고 중국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38년 한커우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에 가담해 무장독립투쟁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41년, 허베이성 일대에서 일어난 태항산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이때, 일본군에서 지휘한 인물은 홍사익이었다). 다리에 총상
을 입고 일본군에 붙잡힌 뒤, 포로 신분으로 일본으로 압송되어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게 된다. 거기서 전향서를 쓰면 다리 치료를 해 주겠다는 일본의 제안을 끝내 뿌리쳐 3년 6개월 동안 피고름을 흘리는 고통을 견디다 결국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이후 김학철은 평생동안 목발짚고 다녔다 한다)
1945년 8월,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광복을 맞아 출옥해 귀국하였다. 이어 서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박헌영이 집회연설에서 “위대한 소련군과 미군에 의해 우리나라가 해방됐다”고 강조하면서 한국의 무장투쟁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것에 분개해 다음과 같이 박헌영에 반박했다 한다.
“우리 조선의용군은 일본이 투항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무장투쟁을 견지했습니다.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 숱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또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는 누구처럼 팔짱을 끼고 앉아서 남이 해방을 시켜줄 때만을 기다리지는 않았습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 후 남한 당국의 좌파 탄압 때문에 1946년에 월북, 《로동신문》 기자로 일하다가 다시 김일성과 김일성 정권에 깊은 환멸과 혐오감을 느끼고 1950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중국에서 문학가로서 작가 생활을 보내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런데 중국에서도 너무도 굴곡진 삶을 살았다….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가리켜 그는 "인민이 굶어 죽는데 웬 우상숭배냐"고 비판했다가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반동분자'로 숙청, 10년간 옥고를 치렀고, 24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주요 작품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20세기의 신화》《해란강아 말하라》,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과 2001년 서울 방문 때 출간한 수필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이 있다.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기자와 나눴던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