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사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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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의 홍사익.


1946년의 홍사익.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홍사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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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思翊

생몰일 1889년 3월 4일 ~ 1946년 9월 26일

일제강점기 당시의 인물


1 간략한 소개

일제강점기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일본육군대학 출신으로 일본군 육군 중장에 올랐으며, 일본 제국 패망 후 전범재판소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2 생애

2.1 출신

구한말, 1890년 3월에 경기도 안성에 있는 자작농 홍이유의 차남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20살 이상 차이가 나는 형 홍사용 손에 컸다. 본래 집안은 문관을 다수 배출한 양반 출신으로 그 가풍은 남아있었으나 이 시점에는 많이 쇠락한 상태였다.
어릴 때는 서당을 다니면서 한학을 열심히 배워 후일에도 사서삼경을 다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형 역시 홍사익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2.2 군인의 길

군인이 되려는 뜻을 품고 상경하여 1904년에 대한제국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는데 3년 뒤에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일어났으나 정원은 25명으로 대폭 줄었어도 무관학교는 유지되었다. 홍사익은 무관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나 곧이어 1909년에 대한제국 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장교 양성 사무가 일본군에 위탁되고, 같이 재학중이던 다른 생도들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때 유학한 인원은 홍사익을 포함한 2학년 15명, 1학년 29명으로 총 44명이었다.
그리고 육군 중앙유년학교(中央幼年學敎; 일본의 육군사관학교 예과 과정에 해당) 3학년에 편입하여 계속 교육을 받는다(같이 도일한 1학년들은 2학년에 편입). 한국학생반이 착용한 복장 및 교육 과정은 일본인 생도들과 같았으며, 일본인 생도들이 붉은색 표장을 달고 있는데 반해 분홍색 표장을 달고 있는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2.3 일본군으로서

대한제국이 1910년 8월 29일부로 막을 내리게 되면서 유학중이던 생도 전원은 일본군으로 편입된다. 분홍색 표장은 붉은색으로 바뀌고, 한국학생반은 해체되어 일본인 생도들과 섞여서 교육받게 되었다. 동기생 중 일부는 이때 퇴교한다.

1912년 5월에 유년학교를 졸업했고, 당시 일본군 규정에 따라 6개월간 사병으로 복무한 뒤 12월에 사관학교(본과 과정에 해당)에 입학한다. 이후 1914년 5월에 졸업, 견습사관으로 6개월간 복무한 뒤 12월에 정식으로 소위로 임관한다. 졸업 당시의 성적은 전체 중 22등, 유학생 13명 중에는 수석이었다. 유학생 중 차석인 이응준은 전체 성적 26등 혹은 32등.

2.4 초급장교 시절

당시 일본은 1차 세계대전에 막 참전한 상태였고 동기생들 중 지청천칭다오 공략에, 이응준과 염창섭은 시베리아 출병에 나가는 등 일부 전선에 나갔으나 홍사익은 줄곧 도쿄에서 근무한다. 그것도 자타공인 최고 엘리트 부대라 할 수 있는 1사단 1연대였다. 홍사익은 사병 근무 6개월부터 줄곧 1연대에만 있었다.

1919년 6월에는 요직인 육군성 인사국으로 전보된다. 그리고 1920년 12월에는 육군대학에 합격한다. 완전히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 것이다.


2.5 육군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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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16일자 매일신보에 실린 홍사익. 매일신보 3면지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 일본육군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는 기사 내용이다. 홍사익이 일본군 내에서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짐작케 해주는 부분.

일제 36년간 육군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단 4명뿐이었다. 이중에 평민은 홍사익 뿐이다.

  • 영친왕 : 고종의 7번째 아들이자 순종을 이은 마지막 황태자. 일제 당시 호칭은 이왕세자(1910~1926)->이왕(1926~1945). 중장까지 진급했다. 광복 후 일본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죽었다.
  • 이건 : 고종의 셋째 아들 의친왕의 서장자. 중좌로 종전을 맞았다. 광복 후 일본으로 귀화한다.
  • 이우 : 의친왕의 둘째 아들로, 6살 때 5촌 당숙이자 운현궁의 주인으로 자식이 없었던 영선군 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이준용이 가지고 있던 공(公) 작위를 물려받았다. 광복 직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사망했고 당시 계급은 중좌였다.
  • 홍사익

홍사익은 육대 35기로, 당시 경쟁률은 약 10대 1이었으며 합격자는 72명이었다. 육대 동기 중에 영친왕이 있었기 때문에, 영친왕의 어학우로서 합격이 가능했다는 시각도 있다. 허나 수백 명씩 합격시키는 육사라면 혹 모를까, 육대는 실력이 분명히 떨어지는 자를 어학우라는 이유만으로 합격시켜줄 만큼 녹록한 곳은 아니다. 조선인을 합격시켜도 되느냐에 대한 논란은 있었다고 하나, 결국 통과되었다.

이후 조선인 육대 입학자는 없었으나, 입학시험에 응시한 사람은 최소한 1명 있다. 김정렬 장군이 1944년에 육대에 응시하였으나, 전쟁 말기라 워낙 혼란스러워서 합격 발표고 뭐고 없이 그냥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김정렬 본인의 증언.


2.6 육군대학 졸업 이후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원대인 1연대로 복귀했다가 동 연대 예하 중대장(대위), 참모본부 내국전사관, 1사단 3연대 3대대장(소좌), 육군보병학교 교관, 만주국 군정부 고문관(여기서 복무중 중좌 진급), 관동군 참모부(조선인 관계 사무를 보았다), 다시 육군보병학교 교관(여기서 복무중 대좌 진급), 흥아원 조사관 등을 전전한다. 이중 대대장 재임 시절, 상관이었던 연대장 두 사람이 나가타 데츠잔야마시타 도모유키였다.

1941년 3월에는 드디어 육군 소장으로 진급해 중국 허베이 성에 주둔한 보병 제108여단 여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중국 화북일대의 중국 팔로군 제18전방총사령부(제18전총)를 상대로 여러 번 전투를 치렀다. 여기서 중국 팔로군 제18전총에는 윤세주(김원봉의 오랜 고향 친구) 등이 이끄는 조선민족혁명당 산하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1941년 12월, 윤세주가 이끄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조선의용 대장 김원봉은 충칭으로 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합류했다. 그에 따라 화북으로 옮긴 조선의용대 다수는 제2인자 자리에 있던 윤세주의 지휘를 받음, 후에 조선의용으로 개칭)는 팔로군과 함께 허베이성(湖北 省) 태항산맥의 '호가장 전투'와 인근의 '형태 전투'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했는데, 여기서 홍사익이 지휘를 했다. 이 전투로 조선의용대 대원인 손일봉, 최철호, 박철동, 왕현순 등 4명이 전사하고 김세광 대장과 김학철 대원이 총상을 입고 일본군 포로가 되었다(김학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는데, 여기서 그는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지못미...(김학철은 체포후 일본교도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전향서를 쓰면 다리를 절단해준다고 했으나 다리가 썩어가고 있음에도 끝내 거부함 교도소 의사가 교체된후 인도적차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줌) 그리고 김학철은 일본 나카사키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된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를 이끌던 윤세주는 1942년 태항산 전투에서 홍사익이 지휘하는 일본군과 전투하다 전사하고 만다. 이 전투는 일본군 토벌대의 지휘관과 무장독립부대의 지휘관 모두가 조선인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큰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942년에는 여단장에서 다시 만주에 특별히 설치한 기갑전술연구 겸 교육부대인 공주령학교 부교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2.6.1 푸대접?

일본 육군에서는 천황에게 수여받은 연대기를 갖는 연대장을 육군 보직의 꽃이라고 여겼고, 연대장이 아니라도 대좌라면 사단 참모장이나 군사령부 참모, 각급 행정부서의 과장이나 고급과원 등의 자리를 차지하는 게 보통이었으나 홍사익은 그런 보직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일본군에서 여단은 임시편제되는 부대로, 연대장-사단장으로 이어지는 직속상관 라인에도 들지 않는다.

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아무리 육대 출신이라고 해도 결국 조선인이라 차별대우를 받은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례로 제32군 사령관이던 우시지마 미츠루의 경우처럼 육군대학 졸업 후 중학교 교련장교 등 장기간 한직에 해당하는 보직을 받은 사람도 연대장을 거친 예가 있다.
만약 홍사익을 높게 평가한 통제파 보스 나가타 테츠잔이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홍사익이 좀더 빨리 출세길이 열렸을 수도 있었다. 우시지마도 육군고관이자 고향선배인 사람 후광으로 교육부대에서 육군대신 부관으로 전출, 2.26사건 수습을 위해 제1보병연대장이 되었다.

사실 만주군에 고문관으로 가는 것이나 조사관으로 가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중요한 보직일 수 있어도 전투지휘관으로서 출세를 원하는 장교들에게 인기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홍사익이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보직을 주로 맡았고 애초에 차별할 의도였다면 육군대학도 입학시키지 않았을 거라는 주장도 있으니 참조할 것. 또한 그는 교육총감부 라인이지 군정이나 실전부대를 다루는 육군성이나 참모본부 라인이 아니었다.


2.6.2 유일한 조선인 장군?

홍사익은 중장까지 올라갔는데, 왕족 아닌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군에서 장성이 된 경우는 홍사익을 제외하고 총 일곱 명(이병무, 조동윤, 어담 중장, 이희두, 조성근, 왕유식, 김응선 소장)이 더 있긴 하다. 그러나 이들은 전원 대한제국군에서 참령 이상 계급에 있었던 고위 간부였고 대한제국이 망하면서 일본군에 편입된 후 동급 일본군 장교로 예우받으면서 계속 진급하여 장군이 되었을 뿐이다. 이들은 "조선군인"이라는 특별 코스로 분류되었으며, 이들을 제외할 경우 한국인으로서 일본군에서 정식 코스를 다 밟아서 장군이 된 사람은 왕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홍사익이 유일한 것이 맞다.


2.7 필리핀

공주령 학교 부교장으로서 기갑전술교리를 연구하다가 1944년 3월에 필리핀의 포로수용소장으로, 그리고 10월에는 필리핀 전선의 14방면군 병참감 겸 포로수용소 총괄 관리책임자로 발령되었다. 중장으로도 승진.

이 승진 및 전출에 대해서는 형식상으로는 영전이지만 거의 그에게 책임전가하기 위한 좌천이나 다름없는 보직이었다는 게 고전적인 시각인데, 여기에는 다른 설이 존재한다. 홍사익 장군을 필리핀으로 부른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이 3연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홍사익 장군은 그 밑에서 대대장으로 있었으며, 그 때부터 야마시타는 홍사익의 능력을 인정하고 사이도 매우 좋았다고 한다. 진짜 능력에 따라 발탁한 스카우트였을 수 있다는 이야기.

또한 당시 일본군의 포로관리 및 지원 분야에 군인, 군속을 불문하고 조선인이 많이 복무하고 있었고 인도네시아 지역 포로수용소에서 이들이 사보타주 내지는 반일 봉기를 벌인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인망이 있는 조선인(홍사익)을 그 관리자의 위치에 올리고자 했다는 주장도 있다. 아직 일본 군부가 패전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1944년의 시점[1]에서 미리 책임전가의 대상부터 선정한다는 논리는 약간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

사실 1944년의 필리핀을 본다면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병참감으로 임명하는 게 대단히 신뢰해서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야마시타의 전술은 루손에서 최대한 농성하면서 본토나 오키나와로의 진격을 늦추고자 하는 것이고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맥아더의 군대에 저항해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농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병참감의 업무는 막중한 셈.

그 외에, 홍사익이 만주 지역[2]의 한국인 군 장병 및 민간인의 경애감을 너무 많이 얻고 있어서 혹시나 그를 핵심으로 하여 발생할지 모를 불온한 사태를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남쪽으로 보낸 거라는 주장도 있다.


2.8 패전과 전범재판

원체 여건이 열악한 루손 산지에서 극심한 식량 부족 상황에서 일본군과 포로에다 일본 민간인들을 위한 식량까지 마련해야 하는 위치를 맡아 고생하던 중 일본이 패전했으며, 필리핀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포로 학대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형 판결을 받고도 태연하게 돌아와 "갑종합격이다!"라고 외쳐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이는 일본어로 "갑종합격"과 "교수합격"이라는 단어의 발음이 같은 데서 나온 일종의 언어유희인 셈인데, 자기 목숨을 가지고 저런 걸 할 수 있다니 어지간히도 대담한 모양.

살아남은 부관이 후에 회고한 바에 의하면 전쟁 종결 직후 아직 미군의 포로가 되기 전, 홍사익 장군은 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가면 중학교 수학 선생이 되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만약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전쟁이 터진 후에 는 아마 특별초빙이라도 되어 현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와 같은 사례로, 일본육사 출신으로 대좌까지 진급했다가 한국군에 재입대하여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김석원 장군이 있다. 특이할 점은 김석원 장군은 몸에 밴 일본군 버릇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해방 후 일본군 복무를 부끄러워하며 스스로의 회고록에서도 반성을 표했다는 점이다. 당시 정규 군사훈련을 받은 만주군, 일본군 출신들 중에서 김석원 장군이 제일 고참이었으니, 만약 육대까지 나온 홍사익 장군이 군문에 복귀했다면 각 진영에서 서로 영입하려고 난리가 났을 것이다.

전범재판을 받고 있을 때는 국내에서 맥아더에게 탄원서를 올려 구명을 요청한 사람들도 일본 육사 동기생들을 중심으로 있었다 한다.[3] 대표적으로 홍사익 장군의 부인과 아들 부부가 군정장관이던 하지 장군을 찾아가기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실 일본군의 포로관리가 막장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연합군 포로가 사망했고, 이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그 자리에 있었으니 전범으로 처벌받는 건 필연적이었다.

관련 링크 - [전봉관의 인생백경], [이규태 에세이]

수많은 일본군 출신들이 국군으로 흡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 이하의 대한민국 정부는 웬일인지 홍사익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많다. 반면에 국군 창군과정의 기틀확립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홍사익 중장의 구명에 힘을 쏟았다는 설도 존재한다.([이재전장군 溫故知新]) 그러나 이쪽에는 증언이 없다. 링크된 글이 사실상 유일.


3 왜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나?

홍사익은 일본군을 떠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다. 하지만 끝내 일본에 충성을 바치는 일본군인으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홍사익은 대영제국의 예를 들어 '조선인이 일본을 위해 충실히 봉사한다면, (대영제국에서 아일랜드인처럼)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을 것.' 이라 생각한다고 자기 아들 홍국선에게도 말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식민지 인의 복잡한 정체성과 선택이 드러난다. 한반도 내에서의 독립운동은 3.1운동으로 정점을 찍은 후 점차 약화되기 시작해 1930년대 이후 숨쉬는거 말곤 전부 일본 허가를 받아야 했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독립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사라진다. 결국 언젠가는 자치령 정도로 시작해서 아주 느긋하게 독립하는 것이 한계라는 게 그나마 독립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의식이었고, 그나마도 꿈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타협주의자들도 나오게 된다.

그러다 보니 구 일본군에 지원입대하는 조선인, 특히 장교로 지원하는 인원 중에는 가만히 있다 나중에 강제로 끌려온 병 출신들보다도 민족의식이나 사명감을 더 갖춘 케이스가 생긴다. 대표적인 예가 이종찬이나 채병덕, 김정렬. 우리가 열심히 해서 조선인들의 위치를 끌어올려 독립에 기여하고 언젠가 조선이 독립되면 국가의 근간을 유지하겠다게 그들의 생각이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은 스스로 독립 할 순 없고(실제로도 그랬고) 일본이 시켜줘야 하는 거니까 지금은 일본과 운명공동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의식이 있기에 소극적 반민족행위자가 되어 일본을 위해 열심히 싸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조선인 일본군만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병사들에서도 보여지는 현상이다.

홍사익은 대한제국 시절부터 군에 몸담아 아예 한국이란 나라가 없을때 태어났던 젊은 장교들과 세대 차이가 있으나 인식 자체는 비슷하게 가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3.1 동기들과의 약속

홍사익과 같은 육군무관학교 출신 유학생들은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무너지자 혼란에 빠졌다. 비록 대한제국 군대해산으로 대한제국군이 대부분 사라지기는 했으나, 군 조직의 근간은 남아있었고 언젠가 재건되리라는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나라가 사라짐으로써 그 희망 자체가 무너졌고, 분격한 생도 상당수는 전원 일본 육사를 자퇴하고 귀국하자고 나서기도 했다.
이때 유학생들은 토론 끝에 기왕 들어온 육사이니 중위가 될 때까지만 복무하고, 바로 예편하기로 약속한다. 동기생들 중 조철호 중위는 이 약속을 지켜 1918년에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곧바로 예편, 조선 오산 학교에서 교원으로 일하다가 3.1운동에 참가하도록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헌병대에 구속되기도 했다. 하지만 홍사익은 군복무를 계속한다.


3.2 3.1운동

3.1운동으로 일본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동포들의 움직임을 보고, 아직 일본군에 남아 있던 김광서(1년 선배), 이청천(동기), 이종혁(1년 후배) 등이 잇달아 탈영하여 독립군에 합류한다. 하지만 홍사익은 여전히 일본군에 남아 있었는데, 훗날 홍사익 본인이 육사 후배인 이형석[4]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것이 걸려서 군인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다. 동료들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이 걸렸는지, 대신 조선인 출신 장교들의 친목모임을 통해 일본군을 탈영한 동료 조선인 장교들이 두고 간 가족들의 생활을 돌보아 주었다는 이야기는 있다. 홍사익은 수년간 이 모임에서 간사(총무)를 맡았다.

일본군 내 조선인의 입지가 악화된다고 해서 탈영하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모양인데, 이는 후술할 태평양전쟁 시기에 한 말이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경에 일본군에 속한 조선인은 황족인 영친왕 이은을 제외하면 대한제국 말기에 유학한 사관생도 출신 장교 30여 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지가 악화되고 자시고 할 규모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 시기 일본군에서는 조국을 위해 행동하는 조선인 장교들을 일종의 지사로 보는 분위기가 있어서 몇몇 장교들이 탈영했다고 나머지 잔류파인 조선인 장교들을 탄압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동기인 이청천이 탈영했지만 홍사익이나 이응준은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이응준은 일본군을 그만두고 독립투쟁에 나선 장인인 이갑에게 자기 권총을 보내주었다가 들켰는데도 상부에서 무마시켜 아무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본 측 일부에서는 지사를 존중하는 메이지 시대의 유풍이 남아 있어서 조선인 장교들에게도 관대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만약 일본인 장교가 반일조직에 권총을 유출시켰다가 적발되었다면 절대 무사히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3.3 태평양전쟁

남방으로 발령받을 당시에 경성부에 들렀을 때 아들 홍국선에게 밝힌 바에 따르면 몇 차례나 옛 친구인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연락이 있었고, 동경에 들렀을 때 매일신보 동경지사에 있던 김을한 기자도 그에게 광복군에 가담하기를 권유했지만 자신의 이탈로 인한 후폭풍이 일본군에 남아있는 조선인(군인 및 노무자)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거부하였다고 한다. 홍사익과 비슷하게 일본군 고관이었던 영친왕 역시 자신이 광복군에 합류하면 조선에 있는 전 동포가 그 보복의 대상이 되리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4 트리비아

4.1 창씨개명 거부

홍사익은 왕족이 아니면서 일본군에서 장성까지 오른 유일한 조선인인데 창씨개명조차 하지 않았다. 더불어 홍사익은 창씨개명을 안 했을 뿐 아니라 조선이라는 자신의 출신을 애써 숨기지도 않았다. 먼저 유명한 이야기로 새 부대로 보직을 옮기게 되면 전 장병을 앞에 놓고 부임인사를 할 때 "나는 조선인 홍사익이다. 천황폐하의 명으로 이 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불만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5]. 게다가 휘하 장병들 중 일본인과 조선인을 막론하고 패전 시까지 그가 조선말을 하는 것을 들은 사람이 없으며, 패전 후에야 비로소 몇 마디 조선말을 했을 정도로 일본어를 상용(常用, 사용의 오타가 아니다)했으나 일본어 억양은 한국식이어서 듣기만 하면 저 사람이 한국인이구나 하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홍 중장 본인도 "난 원래 조선인이니까"라면서 발음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에서는 유카타를 입었으며 자신의 이름을 “홍사익”이 아니라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고 시요꾸"로 칭했다. [6] 그런데 또 만주에 있을 때는 만주군에 속한 조선인 장교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인근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 복무하는 조선인 부사관들이 설날 인사를 오면 한복을 입고 맞이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행동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힘든 부분 중 하나.

홍사익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 당국이 “창씨는 강요가 아니다”라는 홍보를 위해 내버려 두었다는 시각이 강하다.


4.2 일본군 내에서의 평가

유능한데다 아랫사람들을 챙기기도 잘 했으므로 일본군 시절 상하에서의 평은 좋은 편이었다. 다만 식민지 출신이면서 워낙 유능하다보니 초급장교 시절 비슷한 계급을 가진 이들에게는 주변에서 질시를 좀 받기도 했던 듯.
여기에다 출신부터가 일반 사병들에게는 대단한 존재라고 해도 좋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창씨도 하지 않은 조선인이 초급장교도 아닌 장군이 된다는 것이 일본인 하급장교나 사병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래는 당시의 예화이다.

신참 : 병참감이 새로 왔습니다.
고참 : 그래, 어떤 인물이야?
신참 : 그게, 조선인이랍니다.
고참 : 말도 안 되는 소리. 조선인이 병참감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신참 : 아닙니다. 분명히 조선인이랍니다. 이름이 '고 시요쿠'라고 하던데요.
고참 : 허, 그렇다면 아마도 이씨 왕가의 일족인 황족이겠지. 황실의 외가 쪽 사람일 거야.
신참 : 아닙니다. 양주라든가, 조선의 시골 출신 평민이랍니다.
고참 : 허, 그렇다면 그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로군. 아니 정말로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어.


4.3 탈영병 잡으러 갔더니 장군이 나왔네

만주에 있던 홍사익이 필리핀으로 발령을 받고 가면서 잠깐 경성 돈암동에 있는 집에 들렀을 때, 학병으로 끌려온 친척 심모씨(1943년부터 시작된 징병령으로 징집된 사람이었다는 말도 있다)가 탈영하여 홍국선을 찾아와 숨어 있었다. 경성에 지인이 없는 자였고 훈련소에서 보낸 편지 수신자가 모조리 홍국선이어서 일본군 당국에서도 홍국선이 숨겨주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홍국선으로서는 자기 집에 숨기면 들킬 게 빤하니 다른 이웃집에 숨겨두었다. 마침 홍사익이 집에 와서 홍국선과 한잔 하고 있을 때 헌병 소위 한 사람이 찾아와서 탈영병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피웠고, 무슨 일이냐며 홍사익이 현관으로 나왔다. 소위는 군복을 입고 나온 홍사익의 계급장을 보고 기겁을 하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아들 홍국선이 전후에 남긴 증언이다.


4.4 가족의 뒷이야기

홍사익이 젊어서, 아니 어려서 결혼한 첫 번째 아내 조숙원은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한 탓인지 중풍을 앓다가 1943년에 죽었다. 결혼 당시 나이가 홍사익은 14세, 조숙원은 16세였으니 전형적인 조혼.

본처와의 사이에 낳은 장남 홍국선(1919년생)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근무했는데, 이승만의 직접 명령으로 사직해야 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별다른 압박이 없었는지, 1962년 8월 13일자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군대에 들어가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고 이 시점에는 한국광업공사 이사로 재직중이었다고 한다. 이후 1984년에 경기도 안성에서 사망했다.

본처 사망 이후 재혼한 두 번째 아내 이청영(1908년생)은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일본에서 살다가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친일파의 가족이라는 주변의 압박으로 아무 일자리도 구할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떠나려고 했는데 여비가 없어 생각다 못해 일본 수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인의 편지를 받고 당시 일본 수상이던 요시다 시게루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비서를 불러 "100만 엔을 송금해 주라."고 했으며, 그 돈으로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홍국선의 근황을 적은 위의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청영이 낳은 차남 홍달선은 1962년에 서울대 상대에 장학생으로 들어갔다고 하며, 뒤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청영은 아들과 함께 LA에서 살다가 1978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일본어 및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이청영, 홍국선의 인적사항에 대해서만 이름은 적지 않고 기술하고 조숙원, 홍달선에 대한 부분은 적지 않으면서 홍사익의 아내와 아들이 “압박 때문에 전후에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자료부족 및 혼동에 의한 결과로 보인다.
  1. 아직 자기네가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 가엾은 것들
  2. 남방에 가기 직전에는 야마시타와 함께 만주에 있었다.
  3. 미군정기 신문사 자료들 면밀히 보면 '홍사익 중장 구명하자!' 이런 기사 제목이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1946년 2월~4월 사이가 눈에 띄게 많다.
  4. 육사 44기로, 홍사익보다 육사 16년 후배이다. 병으로 1년 휴학하여 45기인 이우와 함께 졸업했다.
  5. 출처 확인이 필요하다.
  6. 당시의 담배인 "호우요꾸" 때문에 혼동을 일으킨 것인지 부하들 중에는 "고 시호우"라고 부르는 경우가 뜻밖에 많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