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長崎

1 나가사키 현

일본의 지방 및 도도부현
홋카이도
도호쿠 지방아오모리이와테미야기아키타야마가타후쿠시마
간토 지방도쿄도치기군마사이타마지바이바라키가나가와
주부 지방니가타도야마이시카와후쿠이야마나시나가노기후시즈오카아이치
간사이 지방미에시가교토오사카효고나라와카야마
주고쿠 지방돗토리시마네오카야마히로시마야마구치
시코쿠 지방도쿠시마가가와에히메고치
규슈 지방후쿠오카사가나가사키구마모토오이타미야자키가고시마
오키나와 현
長崎県
(ながさきけん)
나가사키 현 / Nagasaki Prefecture

현기(県旗)[1]
국가일본
지방큐슈
현청소재지나가사키 시
면적4,132.32km²
인구1,376,647명[2]
상징
현화운젠철쭉(雲仙ツツジ)
현목노송나무(ヒノキ)
동백나무(ツバキ)
현조원앙(オシドリ)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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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崎県 / ながさきけん

일본 큐슈 최서부에 위치한 현. 현청소재지는 나가사키시. 면적 약 4,100km2, 인구 약 137만 명(2015년)


하멜 표류기에 의하면 옛날 발음은 '낭가사키'로 보인다. 실은 が음에 섞인 비음을 들은 것이다. 옛 일본어의 が행은 비음이 현재보다 많이 섞였었다는 듯. 지금도 비음을 섞어서 발음하는 일본인들이 꽤 있고 비탁음은 아직도 쓰인다. 특히 아나운서 등 특수 직업군은 저 비탁음 발음을 못 하면 아예 뽑아주지도 않는다.[3] 일본에서 비탁음은 일종의 '교양'의 표시. 현재 황후인 미치코 황후가 평민[4] 출신이라 저 비탁음이 안 되어 머리 굳은 일본 꼰대들에게 많이 까였었다.

때문에 비탁음을 살린 발음으로는 '낭아사키'에 가깝다. 걸리버 여행기에서도 이 도시를 'Nangasac'으로 표기했으며, 하멜 일행을 수사한 조선측에서도 이들의 발음을 한역하여 낭가삭기(郞可朔其)라고 기록했다.

이곳과 관련된 속담으로 '에도의 적을 나가사키에서 친다(江戸の敵を長崎で討つ)'가 있다. 한국의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와 비슷한 표현. 근데 나가사키가 좀 멀어야지 도쿄와 나가사키 간의 거리는 약 1,200km로 대충 한반도 길이랑 맞먹는다. 신의주에서 뺨 맞고 목포에서 눈흘긴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인 쓰시마 섬(대마도)이 나가사키 현에 속해 있다.

고전문학인 허생전에도 잠깐 등장한다. 중간에 나오는 장기도(長崎島)가 나가사키를 그대로 한자로 읽은 것. 식량난을 겪고 있어서 허생이 쌀을 팔아 은 백만냥을 벌었다고 짧게 언급된다.

2 나가사키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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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崎市
(ながさきし)
나가사키 시 / Nagasaki City

시기(市旗)
문장(紋章)
국가일본
지방큐슈
도도부현나가사키 현
면적405.81km²
인구431,232명[5]
상징
시화수국(アジサイ)
시목오구나무(ナンキンハゼ)
홈페이지

長崎市 / ながさきし

나가사키 현의 현청소재지. 후쿠오카와 더불어 입지조건덕에 과거부터 항구도시로 먹고 살아온 곳이다. 보통 후쿠오카의 보조항적인 성격이 강했다사실 그 시절에는 전국 7대도시인적도 있었지만 지금은..이게 다 원자폭탄때문이다. 항만의 발달과 더불어 미쓰비시중공업을 위시한 조선업, 방산 등이 발달하여 현대에 이르는데 그 탓에 후술되는 핵공격을 부르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당대 미군의 평가와 같이 2차대전의 일본은 모든 도시가 방산타운으로 변했긴 하지만.

남녀 성비가 85.1이다 여자 100명에 남자의 숫자가 85명이라는 소리로, 일본 전국 현청소재지 중에서 가장 여초 지역이라는 재밌는 통계가 있다(...)솔로들의 약속의 땅

한국에서도 상당히 친숙한 지역이며[6] 거기에 지형과 산, 산, 산, 산... 도시 모양마저 부산과 비슷하기 때문에 부산사람이라면 특히 친숙한 지역.

일본에서 서양문물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곳으로, KOEI의 대항해시대 시리즈에서 일본 지역에서 단골로 나오는 항구이다. 대항해시대2 때는 한문만 보고 "장기항"이라고 부른 유저가 많았다. 한글판에서는 '나카사키항'이라고 제대로 나오긴 한다.제대로 나온 게 아니잖아 中崎? 태합입지전5에서는 히라도 마을에 대항해시대4 캐릭터인 릴 알고트가 등장하기도(...) 오페라 나비부인의 무대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서양과의 교류가 잦아 근세포르투갈, 스페인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활동하였고, 덕분에 주로 탄압의 대상이였던 일본 가톨릭의 성지가 되었다. 규슈의 경우 다이묘들도 가톨릭 신자였을 정도. 나가사키는 일본에 3곳 있는 대교구 중 1곳으로[7] 평균 가톨릭 신자 비율이 1%가 안되는 일본에서 가톨릭 신자 비율이 무려 4.5%로 가장 높은 곳이다(...). 신교인 개신교도의 비율은 다른 지역과 비슷하다.[8] 물론 일본에서는 신도가 아니면 기독교의 종파를 딱히 구분해서 보지는 않는다. 부속 도서 지역의 경우도 예외. 나가사키 본토나 본토에 거의 붙어 있는 섬 일부가 아니면 역시 다른 지역과 큰 차이가 없다.

가톨릭 성지도 많아 나가사키역 근처 니시자카 언덕에 있는 일본 26성인 순교성지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초 탄압 때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총 26명이 순교한 곳. 당사자들은 예수가 죽은 골고다 언덕과 비슷하다고 하여 이곳에서 죽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카쿠레키리시탄이 드러난 계기가 된 오우라 천주당, 메이지 유신 후 지어졌지만 폭탄 투하로 피해를 입었던 우라카미 대성당 등이 있다. 이곳들은 19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문하기도 하였다. 또한 나가사키 시에서 좀 떨어진 운젠의 '운젠 지옥'이라고 불리는 유황온천 지대에서도 신자들에 대한 고문과 처형[9]이 이루어져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을 기리는 운젠 지옥 순교지 기념비가 있다.

번안큐슈 지방을 영남으로 번안하느냐, 호남으로 번안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오는데, 큐슈를 영남으로 번안한다면 거제시가 되며, 호남으로 번안하면 목포시가 된다. 대도시인 후쿠오카/부산광역시/광주광역시그다지 멀지 않은 항구도시이기 때문. 실제로 흥미로운 게, 거제의 천주교 신자들이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 쓰시마라로 종교적 망명을 하려던 경우도 있었다. 다만 키테레츠 대백과에서는 여기가 아닌 저 멀리 하코다테를 거제도로 만들었다.

해당 지역의 풍습에 대한 것이 바라카몬에서 자세히 나오는데, 성묘를 하는 시점에서 불꽃놀이를 한다던가, 묘의 글씨 색깔이 노란색이라는 것 등은 해당 지역의 특징이라고 한다.

2.1 명물

예로부터 중화가(차이나타운)이 조성되어 있던 곳. 하얀 국물로 유명한 나가사키 짬뽕이랑 번안된 중국식 요리인 싯포쿠 요리가 유명하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들고온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빵을 현지화(서양에는 없는 물엿이 비결이라고)한 카스테라의 산지로도 유명. 나가사키 카스테라는 현지에서는 2천엔을 넘기도 하는 가격을 자랑하는데 오리지널 카스테라는 대체로 1천엔대이고, 작은 것은 400엔대에 살 수 있다. 국내 제과점의 기본 카스테라가 1천~2천원이니 가격차가 크기는 하다. 나가사키 카스테라빵 바닥에 자라메(ざらめ))라는 별사탕만한 굵기의 각진 설탕을 깔아 구워내 그것이 씹혀 매우 맛있다고 한다. 오리지날 나가사키 카스테라의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중요 요소. 단 모든 나가사끼 카스테라가 자라메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고 후쿠사야의 카스테라만이 자라메를 사용한다. 이 자라메를 따로 팔기도 하니 자라메만 사는 것도 가능하다. 일본에서 후쿠사야 카스테라를 사서 한국에 가져올 경우 자라메가 녹을 수도 있다. 나가사키 카스테라 브랜드 중 유명한 곳은 분메이도(文明堂), 쇼오켄(松翁軒), 후쿠사야(福砂屋)(박쥐 모양 마크를 사용)가 있다. 이 세 곳은 전국 레벨로 유명한 곳이며, 나가사키 현지만 보면 그 외에도 10여군데 넘는 전문 브랜드들이 있다.

일본이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한 곳이기 때문에 포르투갈, 네덜란드의 교역상인들이 머무르면서 일본인들과 교역하는 지역이었던 데지마(出島)가 역사유적지로서 유명하다. 원래는 바다를 메워서 만든 인공섬이었는데, 현대에는 시가지를 확장하면서 육지에 편입되어 인공섬의 모습은 사라졌다. 또한 그 근처에는 외국인들이 모여 살던 주택가 언덕인 오란다자카(オランダ坂;직역하면 네덜란드 언덕)가 있으며 마찬가지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시가지 외곽에는 네덜란드를 주제로 한 테마파크인 하우스 텐 보스가 있다. 이곳의 치즈 박물관과 테디베어 박물관은 꽤 재미있다.

비교할 만한 도시로는 반대쪽 홋카이도하코다테가 있다. 둘 다 외국인들의 왕래가 잦은 항구도시의 위치에 있다보니 서양식의 건물과 교회 등의 종교 시설이 많이 발견된다는 공통점이 있고, 공교롭게도 두 도시 다 야경으로 유명해서 케이블카를 타고 산 위로 올라가서 야경을 감상하는 코스가 있다. 실제로 나가사키 여행 중 오란다자카를 걷는데, "지금 내가 하코다테에 와 있는건가" 하고 착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했다는 감상도 있다.

원폭 피폭지역을 중심으로 한 나가사키 원폭추모공원(평화 공원)과 박물관도 한번 가 볼 만하다. 평화를 깨트린 것들은 따로 있는 같지만 일단 넘어가자(...)

시내 교통수단으로는 노면전차(나가사키 전기궤도)가 대표적인데, 일본에서 제일 요금이 싸다. 1984년부터 거리에 상관없이 일률적으로 100엔을 받았으나, 2009년 120엔으로 인상되었다. 1호선에서 5호선으로 환승(그 반대도 마찬가지)할 때에는, 쓰키마치(築町)에서 전차 운전기사에게 말하면 무료환승권을 준다. 1일권도 있으니 전차를 여러 번 탈 때는 이용하자.

나가사키 전차는 차량이 다양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것은 인근 후쿠오카는 물론, 도쿄, 센다이 등 일본의 주요 대도시에서 노면전차를 폐선시킬 때 오갈데가 없어진 차량을 죄다 긁어모았기 때문. 심지어는 1911년(메이지 44년)산 전차( 160형 전차)도 현역으로 차적에 등록되어 있다. 이렇게 낡은 차량은 통상적인 영업운전을 하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날에만 이벤트로 영업운전에 투입된다고 한다. 곧 노면전차의 날인 6월 10일(6을 '로', 10을 영어로 '텐'으로 읽어 로텐=노면전차에서 '노'와 '전'만 음독해서 로텐), 철도의 날(1872년 신바시-요코하마간 일본 최초 철도 개통을 기념)인 10월 14일, 나가사키 노면전차 개업기념일(1915년 개업)인 11월 16일이다. 그리고 낡은 차량이 많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냉난방 시설 등 개조가 잘 되어 있어서 이용하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신형으로는 2003년에 제작, 2004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1편성씩 도입된 3000형과 2011, 2012년에 1편성씩 도입된 5000형 전차가 있으며 3000형과 5000형은 모두 저상전차이다.

2.2 원자폭탄 피폭

그러나 그건 그렇고 나가사키가 가장 유명한 이유는 바로 여기도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피폭지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흘 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폭탄이 떨어졌다. 자세한 건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참조. 하지만 묘하게 히로시마에 비해 이쪽으로는 이미지가 좀 약하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편.(...) 나가사키 원폭 투하에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 히로시마의 15Kt급 리틀 보이보다 더 강력한 22Kt급 팻 맨이 투하되었는데도, 히로시마의 사망자 추산 14만 명의 절반인 7만 정도가 사망했다. 그 이유는 나가사키 자체가 히로시마에 비해 산지가 많은 지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악천후에 의한 시계 악화로 인해 사수가 시가지가 보이는 즉시 폭탄을 투하했는데, 이게 우연히도 거의 분지에 가까운 산에 둘러싸인 곳에 떨어져, 폭발 후 열선과 후폭풍이 산을 넘지 않아 폭심지 근처로 피해가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과 달리 당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시역내 인구는 15만명 남짓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2순위 후보였던 고쿠라가 유사한 14만명대이면서 반경 10km 내에 모지, 야하타(이상 기타큐슈시로서 고쿠라와 통합), 시모노세키 등 대도시가 몰려 있어 수십만의 희생이 예정되어 있다가 모면한 셈이다.
  • 원래 나가사키는 폭탄 투하 후보 중 3순위였다. 그리고 나가사키 폭탄투하 당일, 팻맨을 실은 폭격기가 원래 목표로 한 곳은 발전소 등이 있는 후쿠오카코쿠라 시(현재의 키타큐슈 시 코쿠라키타 구, 코쿠라미나미 구). 그러나 작전 당일 큐슈 전체가 날씨가 좋지 않아 짙은 안개에 둘러싸여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초계기와 정보수집기의 삽질로 투하 지점, 그러니까 코쿠라 시의 사진을 찍는데 실패해 버리면서 폭격기는 어쩔수 없이 육안으로 확인하고 투하하는 방식으로 합의를 보고 작전 시간에 맞추어 코쿠라 시 상공으로 진입했다.
문제는 그러나 아무리 일본군이 개막장 바보집단이라도, 이미 원폭을 한 차례 맞은 상황이라 대공방어에 필사적이였던 것. 물론 일본군의 구식 전투기나 고사포 등으로 미군 폭격기를 떨굴 수는 없었다. 하지만 방해가 없이도 육안이라 힘든 판에, 어쨌든 계속해서 일본군이 추격해 오는 통에 투하 위치를 잡지 못하고 추격 회피 비행만을 1시간여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1시간여 경과. 결국 미군 측은 폭격기의 연료가 다 떨어져간다는 보고를 받고, 어쩔 수 없이 귀환하는 길목에 있던 제3후보지였던 나가사키에 그냥 떨구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게 불과 투하 1시간 전의 이야기니, 즉 이 1시간 사이에 나가사키와 코쿠라의 운명이 바뀌어 버린 셈이다.
  • 나가사키 폭격에 대해 미국일본 우익은 의외로 같은 소리를 한다. 당시 원래 폭격 목표였던 코쿠라 시의 경우 히로시마와 동일한 평야지대였기 때문에, 예정대로 코쿠라 시가 피폭당했을 경우 피해가 1차 피폭지였던 히로시마보다 훨씬 더 컸을 것이라는 점이다.
  • 피폭 당일은 당시 가톨릭 전례력으로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기리는 성모승천대축일[10]이었고, 일본 가톨릭 교회에는 이 날에 판공성사를 보는 관습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라운드 제로(원폭 투하지점)에서 불과 700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우라카미 대성당[11]에서 미사&판공성사를 준비하던 2명의 사제와 24명의 신자가 즉사했고, 8천명의 신자들도 이후 피폭에 따라 전부 사망하였다. 성당은 당연히 전소되었고 그 열화 속에서 성모상이 다른 부분은 타서 없어지고 머리 부분만 발견되었는데, 후에 재건된 성당에서 이 두상을 "원폭의 성모님"으로 모시어 전쟁의 아픔을 상기하고 있다. 일본 천주교계에서는 이때 사망한 교인들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데 대한 일종의 속죄양으로서 희생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 연합군 포로들 중 일부가 이 때 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참고로 송해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면서 이곳에서 온 일본인에게 "아, 그 핵 떨어진 곳?(...)" 란 돌직구를 날려서 사람들에게 충공깽이 뭔지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사실, 송해는 이 사건이 터질 당시 18세였다.

2.3 시장 총격 사건

히로시마도 그렇지만, 전쟁의 끔찍함을 겪은 도시다보니 전반적으로 (우리의 반전주의 인식과는 좀 다를수 있지만) 반전주의 성향이 강하다. 나가사키에서는 반전주의 성향의 후보가 시장에 당선되기도 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시장 총격 사건이 두 건이나 발생하기도 했다. 재밌는게 둘 다 자민당의 지지를 받은 보수 성향의 인물들이란 거다..

1988년 12월 7일, 공산당 소속 시의원이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 시장에게 덴노의 전쟁 책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묻자, "덴노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상식적으로 답변하였다. 문제는 당시는 쇼와 덴노가 오늘내일 하면서 사경을 헤매이고 있었던 터라, 일본은 소위 "자숙" 모드였다. 이 일로 모토시마 시장은 일본 우익들의 공적이 되어, 소속 자민당에서 제명되고, 우익 단체 차량 80여대가 몰려들어 그를 저주했다. 그러던 중 1990년 1월 18일 우익 단체 행동대원이 그를 저격하고 왼쪽 가슴에 총을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다. 그는 자신을 저격한 자를 용서한다고 말했으며, 그 다음 해의 선거에서 4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다음 선거인 1995년 선거에서 모토시마 시장은 낙선하고 이후 은퇴하고 지내다가 2014년 10월 31일 92세에 별세했다.

특이한 점은 1995년에 자민당의 지지를 받은 무소속 이토 잇초(伊藤一長) 후보가 당선되었단 거다. 잇초는 출마 전에는 '방위·외교는 국가의 관할 문제'라며 평화 문제는 언급을 자제했다. 그러나 시장에 당선되면서 핵무기 철폐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평화헌법 개정에는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했으며, 미국의 핵정책과 북한의 핵실험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07년 4월 17일, 4선에 도전하여 선거운동을 하다가 나가사키 역 부근에서 야쿠자 조직원에게 히토시 시장처럼 총격을 받았고, 다음날 과다 출혈로 숨졌다.

엄밀히 해두자면 두 사건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다. 범행 동기도 1990년 사건이 극우의 정치적 테러였다면, 2007년 사건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차량 파손 보상 및 관급공사 개입 문제에 따른 원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범인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여하간 2대에 걸쳐서 현직 시장이 연달아 총격을 받았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3 이곳을 배경으로 한 작품

4 출신인물

4.1 실존인물

4.2 가상인물

  1. Nagasaki의 N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로고화 한 것.
  2. 추계인구 2015년 5월 1일 기준
  3. 낭아사키라고 발음해보자. 비슷하다. 이 비탁음을 잘 발음하면 외국인으로 안보는 일이 생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각자 판단
  4. 말이 평민이지, 친가는 대 재벌가이며 외가는 옛 화족이다. 게다가 지성, 미모, 재능 등등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는 완벽한 규수였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5. 추계인구 2015년 5월 1일 기준
  6. 다만 이제는 부산 직항로가 끊긴 상태이다.
  7. 나머지는 도쿄, 오사카.
  8. 애초에 일본 본토에서는 어딜 가나 개신교가 환영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도 썩 좋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개신교 다수 지역인 오키나와는 다들 알다시피 일본과는 전혀 다른 문화권이라서 예외라 볼 수 없다.
  9. KBS 역사스페셜 2012년 3월 8일에 방송된 '임란포로 빈센트 권은 왜 화형당했나' 편에서 운젠 지옥에서 행해진 가톨릭 신자 대상의 고문과 처형에 대한 언급이 잠시 나온다. 일본에 남아있는 당시의 기록을 보면 '산입(山入)'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운젠 지옥에서 고문을 당했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10. 1950년 8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성모몽소승천 교리를 교황 무류권으로 선포하면서 전례력이 8월 15일로 달라졌다. 거 날짜 참
  11. 당시 동양 최대의 성당이자 나가사키 대교구 주교좌 성당이기도 하다. 위에도 설명했지만 나가사키는 가톨릭 신자 비율이 일본 최다인 곳이다.
  12. 엄밀하게는 고토시가 배경이다. 울릉군이 행정구역상 경북에 속해 있지만, 울릉도 사람이 경북사람으로 일반화하기 어려운 것처럼 고토시도 일반적인 나가사키와는 다른 점이 있다. 무엇보다 나가사키는 너무 크다. 수학여행이나 히로시 면접 등에서는 나가사키시에 가는 장면이 가끔 나온다.
  13. 2권 이후의 주요 무대.
  14. 게임 내 방귀 필살기 이름 중 하나가 나가사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