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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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단원들[1]

1 소개

의열단 투쟁이야말로 수 많은 독립투쟁 중에서도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투쟁이였다. -언론인 고 송건호 선생-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 선언'[2]의 마지막 구절, 신채호 著-

義烈團(의로운 바를 맹렬하게 실천하는 조직)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 김원봉3.1 운동의 대중화 단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 만세시위를 전개한 민중들의 혁명적 진출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이로써 의열투쟁 결사대를 조직하여 암살ㆍ파괴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국내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환기시키고, 나아가 이를 통하여 민중혁명을 촉발함으로써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 같은 구상 아래 김원봉1919년 11월 윤세주, 이성우, 곽경(곽재기), 이종암 등의 동지들과 길림성(吉林省)에서 의열단을 발족시켰다.

의혈단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된 표현이다. 의열단이 맞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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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고문으로는 김대지, 황상규가 맡았고, 단원으로는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 창단 직후 "공약 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이라는 행동목표를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이 13명은 광복 때까지 단 1명도 배신하지 않았다. 하지만 암살과 테러를 위한 전문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았던 탓에(사실 당시에는 가르쳐줄 사람이나 단체도 없었지만) 작전의 실행에 허술한 점이 많아 암살대상의 자택 앞에서 귀가할 때를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다가 졸아서 놓치는 등 실패할 때가 많았다. 그래도 이들 중에는 동양 최초로 시한폭탄을 만든 김시현 열사가 있는데, 그는 해방 후 국회의원이 되었다. 또한 시인 이육사도 의열단 단원이었다.

비밀결사조직인 탓에 의열단의 단원이 몇 명인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2010년 기밀 해제된 영국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무려 2천여 명에 달했으며 도쿄에도 50여명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의 규모가 외부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게 정말로 대단한 사실.

공약 10조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 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매 초회(招會)에 필응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이다.

신채호는 1923년 1월에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전문 링크에서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문화주의, 외교론, 준비론 등의 입장을 비판하고 민중에 의한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노선을 제시하였다. 당시 이승만이 이끌던 임시정부의 소득없는 외교일관론과 거기에 따른 내분에 신물이 났던 신채호는,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내걸었던 것이다.

의열단은 창단한 얼마 뒤에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하이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경에는 약 70여 명의 단원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한국민족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김구, 김규식, 김창숙, 신채호 등이 실질상의 고문 역할을 했고, 장제스 중국 국민당 총통의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3 알려진 독립운동들

1920년 3월부터 의열단은 곽재기∙이성우∙신철휴∙윤세주 등의 핵심 단원들을 행동대원으로 국내에 잠입시켰고,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일보사를 폭파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지막 실행단계에서 비밀이 누설되어 최초의 대규모 암살∙파괴 활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열단은 같은 해 9월 14일 박재혁을 파견하여 부산경찰서를 폭파하였고, 또 12월 27일에는 최수봉으로 하여금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게 하는 등 '연쇄적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관을 공격하였다. 1921년 9월에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 의거를 성공시킨다.

그 외에도 1920년대 일본 고관암살과 관공서 폭파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4 해체

이후 소규모 투탄 행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좀 더 구체적인 전략적이고 군사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을 느끼면서 1920년대 중반을 전후로 의열단원들 핵심요인들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 의열단은 사라지게 된다. 이들 의열단 요인들은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국민당 군대 장교로 복무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3]에 참여,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間을 넘나들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어 활동하였고, 이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조선의용대[4]의 군대 형태로 체재를 개편하게 된다.

5 평가

의열단의 단장인 약산 김원봉은 해방 후 미군정이 점령한 남한에서 '빨갱이'로 몰렸다. 그가 의장단 일부로 참여하였던 '민족주의 민족 전선(이하 민전)'을 공산당이 주도하면서 결국 미군정 및 우익의 대표적인 감시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증언에 따르면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체포당하는 치욕을 보기도 했다. 실제로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사흘 밤낮을 울부짖었다고 한다.[5] 그 후, 월북하여 김일성과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지만 1958년에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장이 남북 양쪽에서 배척당하였기 때문에 의열단에 대한 깊은 연구나 평가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최근에서야 주목받기 시작했다.[6]

<약산과 의열단>의 저자인 박태원은 김원봉을 직접만나 증언을 들었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저술하였다. 저자 후기에서 의열단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선생이 지금은 이미 없는 옛 동지들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줄 때, 나는 그들에 대한 선생의 뜨거운 애정을 내 자신 가슴 깊이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구경 나의 이 적은 기록은 선생이 옛 동지들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 <약산과 의열단>의 저자 후기

<아리랑>(The Song of Ariran)의 저자인 '님 웨일스'(Nym Wales)는 미국인 여기자로 1937년에 의열단원 김산(본명 장지락)에 대한 일대기를 기록하였다. 의열단에 가입한 김산은 당시 조선과 중국을 넘나들며 혁명가로 활동했는데 1938년 중국 당국에 의해 '일제 스파이'로 몰려 34세에 처형되었다. 그에 대해서 '님 웨일스'는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그는 내가 7년 동안 동방에 있으면서 만났던 가장 매력적인 사람 중의 하나였다" - 님 웨일스

또한, 김산이 속한 의열단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의열단원들은 마치 특별한 신도처럼 생활하였고, 수영, 테니스, 그 밖의 운동을 통해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매일같이 저격연습도 하였다. 이 젊은이들은 독서도 하였고, 쾌활함을 유지하기 위해 오락도 하였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었음으로 생명이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기막히게 멋진 친구들이었다. 스포티한 멋진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벽할 정도로 말쑥하게 차려입었다."

- 님 웨일스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따르면 의열단원은 언제나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 살아있는 한 자유롭게 생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언제나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 마지막 사진이라고 생각하면서 찍었다고 한다. 또한 의열단은 잘생긴 사람들의 무력독립운동단체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중국 기생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7].

6 기타

  • 한국근현대사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주로 3명 정도 대강 아는데(나석주, 김익상, 김상옥) 김익상에 대해서는 알아두자. 조선총독부를 폭파한 것은 교과서, 참고서에 자주 나와서 안다. 하지만 그 후가 중요하다. 보통 한 번 테러를 하고 나면 잡혀서 고문+코렁탕+사형, 즉 죽게된다. 위에서 언급했듯 옷을 잘 차려입고 사진을 잘 찍는 이유도 그러하다. 하지만 김익상은 조선총독부를 폭파시키고도 무사히 도주에 성공했다.이렇게 돌아오자 의열단 내부에서는 하늘의 도움으로 살아났으니 이제 자유롭게 살라고 했지만, 김익상은 다시 한 번 더 의거를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상하이 황포탄 세관 부두에서 다나카 대장을 암살하기로 한다. 문제는 당시 총의 성능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것. 몇 번 불발 후 발사가 되었는데, 하필이면 다나카 대장이 아닌 민간인이 맞았다. 그것도 외국인 기자의 부인. 한편 김익상은 다나카 대장이 총에 맞았다고 생각했다 한다. 다나카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총소리에 본능적으로 땅에 엎드렸고, 김익상은 이를 오해하여 총에 맞아 쓰러진 것이라 여긴 것. 이 사건으로 의열단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부인을 잃은 영국 기자 톰슨(기사에는 톱손)은 그 자리에서 김익상에게 총을 쏘고, 총상입은 김익상은 도망을 못 가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네이버 캐스트엔 기자가 아닌 경찰이라고 나와 있다. 어느 쪽이 맞는 걸까? 그리고 김익상의 최후에 대해서는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25년 순국했다는 설과, 20년형을 살고 난 뒤 1943년 6월에 출소했으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다.

7 단원

8 등장매체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비밀결사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관련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 이유는 조선혁명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열단이 아나키즘을 표방하였고, 급진좌파였던 데다가 중공군을 거슬러 올라가면 의열단에도 닿아 있어서[9] 의열단까지 도매금으로 빨갱이 취급당했던 게 원인이 아닌가 싶다.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도 해방 후 월북해서 활동했으니. 게다가 이 조선의용군 병력 중 일부가 국공내전 후 북한으로 귀국해 한국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게 의용군 대원들의 책임으로 보기도 힘든 게, 대원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김일성이 남침을 위해 중국에 요청해서 북한으로 귀국시켜 북한군에 배속시킨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대원들이 단순히 부대를 이동한다는 명령을 받고 차량에 타서 도착해 보니 북한이었고, 북한군 군복으로 갈아입으라는 명령을 받고 나서야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았다고.

최근 암살이나 밀정 등 의열단을 소재로 한 영화가 속속들이 개봉하고 있다. 의열단 활동 자체가 비장미가 있고 숨겨진 역사인데다 직접적이고 순교적인 독립운동을 하는 등 드라마틱한 상황이 많고, 영화소재로 삼기 좋은 암살, 폭파 등의 활동을 했다는 점도 있다. 아울러 일제강점기의 어두웠던 역사가 아직까지 청산되지 않고 일제부역자의 자손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호의호식하는 반면 독립운동가의 자손들은 어려운 삶을 살고 있고, 위안부 문제조차 일본정부가 사과조차 않는 와중에 우리 정부조차 이에 동조하는 상황 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

8.1 영화

  • 암살(2015) - 극중 의열단장 김원봉이 등장하며 배우는 조승우가 맡았다. 영화상에서 김원봉과 함께하는 이들이 조,단역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의열단일 가능성이 높다. 의열단 단원들답게 양복 맵시가 좋다. 사실상 한국 내에서 김원봉 본인에 한하는 경우이긴 하지만, 의열단을 제대로 그린 첫 케이스다. 영화에 등장하는 안옥윤, 속사포, 황덕삼은 의열단원이 아니다.
  • 밀정 - 의열단원 김지섭이 일본 황궁에 폭탄을 투척한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일제의 주요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일본 경찰 사이의 숨막히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을 그린 영화다.[10]

8.2 드라마

8.3 문학

  • 아리랑
  • 약산과 의열단 - 작가 박태원#s-1이 쓴 책으로, 의열단 단원 유자명의 '의열단간사'와 근근이 보존되어있던 의열단 단원들의 편지 및 당시의 신문기사를 참조하여 약산 김원봉의 구술을 받아 완성한 책이다.

9 참고자료

  1. 해방 후 촬영한 의열단원들의 모습, 국가보훈처
  2. '조선혁명선언'이라고도 함.
  3. 장개석의 북벌 시기.
  4. 이 부대는 국민당 장개석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한국인 독립부대이다.
  5. 하지만 고문설은 증언으로도 확인되지 않는 사실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김원봉 항목 참고.
  6. 김경준, "영화 <밀정>이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 오마이뉴스 2016.09.10 기사를 참고.
  7. 실제 사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기생들중에 독립 운동에 협력한 기생들도 많았다.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협력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본 관료들의 술시중을 통해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술자리 등의 명목으로 독립 운동가들의 신분이나 활동 상황을 숨기기 좋았기 때문.
  8. 본명은 정부은. 광주 출신으로 1933년에 중국 난징으로 넘어가 의열단에 가입, 김원봉이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교했다. 여담으로 일설에는 '율성'이라는 이름을 김원봉이 지어줬다는 얘기가 있다.
  9. 의열단 →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 조선의용군 → 팔로군과 연합, 마오쩌둥의 중공군에 합류.
  10. 마지막 장면에서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파 의거가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