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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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선 단정 반대 대책에 관한 결정서 초안을 낭독하는 인민공화당 김원봉.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수많은 무장투쟁의 업적에도 월북했다는 이유로, 사회주의계 무장독립투쟁의 전설임에도 김일성 독재체제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운의 인물

1 개요

김원봉(金元鳳, 1898년 8월 13일1958년 11월?)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북한의 정치인이다. 호는 약산(若山)이다. 따라서, 김약산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경상남도 밀양시 출생으로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2 생애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경성부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뜻을 두어 중국으로 건너가 1918년 난징 금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였다. 그 뒤 만주로 건너가 만주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나 자퇴하였다.

2.1 의열단 활동과 중국혁명 활동

1919년 12월, 의열단을 조직하여 의백(맏형)에 취임, 국내 기관 파괴, 일제 요인 암살 등 다양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6년에는 보다 더 체계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중국 국민당 정부가 설립한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했다.[1] 이곳에서 얻은 군사지식 및 사회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를 4기로 졸업하고, 국부군 장교로 임관,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도 중국 국민혁명에도 가담하였다.

1927년 8월 김원봉은 저우언라이, 주더 등이 지도한 중국 공산당의 출범을 이루어낸 난창봉기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2.2 조선의용대 조직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한 뒤, 1932년 장제스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중국 난징외곽에 설치하고 혁명요원을 모집하고 양성하였다. 1938년 10월에는 훈련해온 청년들을 규합하고 중화민국 정부(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한커우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 항일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를 조직, 편성하여 대장에 취임했다.
당시 중국의 2차 국공합작에 의해 중화민국 정부의 통일된 후원 세력을 얻은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군의 지원부대로 창설되어 중국 본토에서 일본군과 대항하여 싸웠으며 대원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식비와 공작비 등을 후원받았다. 당시 의용대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대원들이 많았으므로 선무공작, 즉 선전 업무를 맡아 일본군에게 전단을 배포하고 확성기를 이용한 방송을 했다.

(조선의용대 선무공작 홍보영상). 1940년 作.

그러나 조선의용대의 젊은 대원들 사이에 "전선에서 떨어진 곳에서 편하게 훈련만 받고, 정보수집만 할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있는 곳에 가서 싸우면서 항일운동을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하면서, 1941년 사이에 박효삼이 일부 대원들을 데리고 이탈, 화북지역의 태항산으로 올라가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활동하고, 이후 이들은 42년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바꿔 항일무장투쟁을 이어간다. 조선의용대의 북상은 김원봉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계기가 되었고 김원봉도 화북지대의 활약에 비해 국민당의 소극성에 붙잡혀 있는 본대의 현실에 분개했다.[2] 42년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본대와 다르게 국민당 정부가 아닌 중국 공산당 팔로군과 연합하게 되었다. 이들은 이후 한반도 내에서 몽양 여운형이 이끌던 건준위의 모체 조선건국동맹에 참가한 화북 연안(옌안)의 조선독립동맹과 구별되며, 화북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던 조선독립동맹은 김두봉이 위원장으로 역임중이었다. 이들이 바로 후일 북한의 연안파이다.[3]

2.3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조선의용대와 조선의용군의 분할이 일어난 1942년엔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다. 이는 41년 중경임정이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포함시킨 조소앙삼균주의가 그의 뜻과 일치하는 바가 있어서 그러하였다.[4] 그리고, 김원봉은 임시정부에서 한국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을 맡았다. 당시 사령관은 지청천이 임명되어 활동하는데... 문제는 임정 내 김구를 비롯한 우파세력들과 항상 마찰을 겪어 뜻대로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5][6]

김원봉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가 통합되는것을 원했지만, 임정내 보수파세력들은 '공산주의, 사회주의자들과는 연계할 수 없다.'면서 마찰이 심했었다.[7] 당시 지원해주던 중국 국민당 단체도 달랐다. 조선민족혁명당대립남의사지원을 받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CC단(CC파벌)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자세한건 중국 국민당항목의 조선 독립운동 부분을 참조.

2.4 해방 이후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전하자 임시정부를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합류하였다.

1947년 7월, 좌우합작운동을 주도하고 구심점 역할이자 좌익세력을 대변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여운형의 죽음에 분노하여 애도문을 '광명일보', '노력인민' 등 좌익지 7월 25일자에 게재하여 여운형의 유지를 받들어 미소공위를 성공시키자고 호소했다. 참고로 김원봉은 여운형과 잘 아는 사이였다. 여운형은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해주었으며, 김원봉은 해방 후 여운형의 환갑잔치에 참석하기도 했다. 플래쉬로 돌아가는 사진 중에 오른쪽에서 두번째, 선글라스를 끼고 고개를 숙인 인물이 김원봉. 여운형이 자주 테러를 당하자 김원봉은 여운형의 신변 보호에 나서기도 했다.

그의 월북에 대해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장을 비롯해 진보성향의 인물들은 친일파들 탄압에 못이겨 월북하였다고 한다.[8] 김원봉의 여동생, 김학봉씨에 의하면 김원봉 월북전에 자신(김학봉)은 물고문을 당했고 김원봉의 월북후에는 상황이 더 나빠졌으며 비슷한 시기에 끌려간 용봉·봉기·덕봉·구봉 등 오빠 4명은 모두 총살 되었다고 한다.[9]

상해에서 김원봉과 대면한 황용주 전 MBC 사장은 김원봉의 월북에 대해 "민전이 흐지부지되고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 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또 약산은 북행하기 전 박헌영을 자주 만나는 눈치였다며 아마 그의 북행에는 박헌영의 끈질긴 권유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참고

1948년 남북연석회의김구, 김규식과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는데 그대로 잔류하여 월북인사가 된다. 그가 월북하게 된 동기에 여러 이유가 있는데, 아무래도 가장 큰 이유는 옛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권세를 누리던 당시 정국에 매우 큰 절망을 느낀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앞서 언급되었듯 노덕술에게 체포된 것이 그의 멘탈을 금가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위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는 일찍이부터 김원봉을 연구한 이 분야의 권위자인 염인호 교수의 「김원봉 연구」(1993) 등 전문서적에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의 회고록 중 “김원봉이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이 인용될 뿐이다.

염 교수는 또 한상도 건국대 교수의 「김원봉의 생애와 항일 역정」(1990)을 인용해 “김원봉이 묶이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의 사무실로 끌려가자 장택상은 노덕술에게 화를 내며 ‘모셔 오랬지, 누가 이래라 했느냐’고 짐짓 황망해하면서 묶인 것을 풀어줬다”고 쓰고 있다. 이 말은 본래 1984년 당시 길진현 중앙일보 기자가 쓴 ‘역사에 다시 묻는다’에 김원봉의 의열단 동지였던 전 광복회장 유석현의 증언으로 나와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증언은 증언 날짜나 장소가 나와 있지 않아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된다.참고 해방 후 정정은 매우 불안하여 때로는 우익인사들까지도 고초를 겪던 것이 현실이다.[10]

동아일보의 보수언론인 송평인은 칼럼에서 고문내용을 반박하였다. 그는 수모라는 것이 기껏해야 수갑에 채워져 끌려갔다는 정도이고 당대의 정치 거물이었던 그가 그것을 몹시 수치스럽게 여겼다는 것이다.

사실, 해방 후 중도파를 아우른다 하였으나 실상은 중도파의 참여를 간접적으로 배제시킨 공산당이 주도하였던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의장단 일원이었던 그가 무사하길 바라는 것이 더 힘들 것이다. 참고로 그와 함께 의장단에 속했던 사람이 박헌영, 허헌, 여운형, 백남운이다. 암살당한 여운형을 제외하고 나머지 3인은 모두 47년 말에 월북하였는데 김원봉은 그래도 반 년 이상 남한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으니 생존력이 대단했던 셈. 강준만에 의하면 김원봉은 일제시대 때의 경험을 통해 한곳에 2시간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제일 오래 살아남았다고.

2.5 북한 정권 수립 참여, 실각과 최후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면서 김원봉은 북한 내 서열 7위에 해당하는 국가검열위원장에 올랐고 이 밖에도 노동상,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의장 등 여러 고위직을 거쳤다.

김원봉에 대해서 6.25 전쟁과 남침에 반대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일단 김원봉이 주축이 되어서 만들었던 조선의용대는 항목에서도 볼 수 있다 싶이 후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었고, 더 후에는 북한군의 근간을 이루고 6.25 전쟁 때 남침까지 했다. 또한 전쟁 기간 북한 ‘노동상’이 된 김원봉은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만일 6.25전쟁에 반대했거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면 불가능한 인사 조치였다.

1954년 1월 25일 남파 간첩단 4명이 체포되었는데, 조사결과 이들은 김원봉의 직접 지휘아래 남한의 경제 혼란 및 선거방해 목적으로 남파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이후부터 남파 활동을 벌였다. 참고

1956년에 터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연안파가 숙청된 후 1958년에 전면적으로 실각했다. 그리고 실각 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는데, 시골로 내려갔다는 설, 자살설, 총살설 등이 나오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실각 직후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 자세한 사망 시기, 경위는 알 수 없다. 다만 실각 시기를 봐서는 정적을 솎아내는데 여념이 없었던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설에는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이자 종파주의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죄명목[11]으로 형무소로 끌려가 거기서 울분을 참지못해 청산가리를 입에 털고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12] 김원봉 본인이 황포군관학교를 졸업생으므로, 당시 교장이던 장개석과 사제관계였다. 무엇보다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인 만큼, 국민당군 장교로 임관한 이력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이끌던 조선민족혁명당도 중국 내 백색테러를 주도하던 국민당 남의사의 지원을 받던 단체였다. 김일성으로선 국민당 간첩으로 몰아붙여 뒤집어 씌우기 딱 좋은 이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정작 똑같은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에 국민당군 대령이던 최덕신이 월북했을 땐 좋다고 넙죽 받아주며 김일성 훈장까지 수여했다.

3 평가

일제 해방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무장 독립투쟁을 이끈 인물 중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독립운동가.

독립운동 가운데 중 특히 무장투쟁 노선으로는 절대 빼놓을래야 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단체의 장을 여럿맡았으며 이 분의 거취에 따라 무장투쟁세력들의 판도가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장투쟁활동 활약상에 비해 남북한 양쪽의 평가는 낮은 편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묻혀버렸고, 한국에서는 북한 정권에 기여한 사회주의자로 인식되어 독립운동 경력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한 감이 있다.

근래 한국에서는 독립운동 경력을 인정받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실리고 있다. 그러나, 뭐가 어떻게 되었든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활동한 사람이기 때문에 독립유공 훈장은 받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받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북한에서 활동하긴 했으나 "진짜로 공산주의자 였는가?"에 대해서는 부정하는 주장이 많다. 1945년 8월 광복 직후, 귀국 전에 중국 상하이에서 체류하고 있을기간 동안 일본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던 '황용주'[13]는 김원봉하고 오랜시간동안 얘기를 나눴다는데, 황용주에 의하면 '김원봉은 김일성의 무장항일투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김일성의 활동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회고하였다고 한다.# 사실 김원봉이 활동한 의열단은 아나키즘적 성향이 더 강한데, 김원봉이 공산주의자에 아나키스트였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는 없다.

북한 정권에서 직책을 역임할때도 상당히 온건하고 중립적인 성향을 보여 한국전쟁때 납북된 정치인들[14]을 최대한 도와주었다고 알려져있고 한국전쟁 휴전 이후에도 '중립화 평화통일안'을 주장해왔던 인물이기도 했다.[15]

일본에 의해 100만원이라는 현상금이 걸렸었는데 이는 현재 화폐가치로 약 320억이 된다고한다. 어떤식으로 환율을 고려했는지는 모르지만 320억이라는 금액으로 본다면 거의 세계주요 테러리스트집단의 우두머리들에게 내건 금액과 맞먹는다. 물론 금액이 이러했기 때문에 일본이 김원봉이 잡혀온다 한들 제보자에게 이 금액을 지불할 능력도 없었고 그럴 의지도 없었을 것이라는 게 정설. 이 때문에 위에도 나와 있듯이 김원봉은 같은 자리에 2시간 이상 머물러 있지 않았다. 참고로 임시정부 주석인 백범 김구에게 걸린 현상금은 60만원이었다. [16]

최근에는 교과서에 실리게 되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활동내용이 출제가 되면서 입시를 위해서라도 김원봉을 기억한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 그리고 영화 암살밀정 등 대중매체에서 조금씩 다뤄지면서 대중들에게도 점점 더 알려지고 있다.

4 인물 연표

연도행적과 역사
1898년경남 밀양 출생
1910년한일강제병합
1916년중국 망명
1919년3·1운동 ,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 신흥무관학교 재학(6~9월)
- 의열단 창설 (11월)
1920년부산·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의열단원 박재혁·최수봉)
1921년조선총독부 폭탄 투척 (의열단원 김익상)
1922년일본군 대장 저격 미수 (의열단원 김익상·오성륜·이종암)
1923년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및 도심 총격전 (의열단원 김상옥)
-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집필
1924년도쿄 궁성 폭탄 공격 미수 (의열단원 김지섭)
1926년황포군관학교 입학
- 동양척식(주)·식산은행 폭탄 투척 (의열단원 나석주)
1927년중국 공산당 봉기 참여, 의열단 조직 위기
1929년'레닌주의' 창간호 발간, 조선공산당 재건설동맹 결성
1932년'조선혁명간부학교' 설립 (교장 취임)
1935년난징에서 의열단 등 5개 단체 '민족혁명당' 결성
1937년중일전쟁 발발, '조선민족전선연맹 (독립운동단체 연합) 결성
1938년'조선의용대' (군사조직) 결성
1941년민족혁명당, 임시정부 참여 선언
1942년조선의용대 광복군 편입 (부사령관 취임)
1944년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
1945년광복, 귀국
1946년대구 총파업 발생,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취임
1947년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체포
1948년월북·북한 정부의 국가검열상 , 남북한 정부 수립
1950년6.25 전쟁 발발
1952년북 노동상
1957년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1958년숙청설, 사망 추정(향년 60세)
출처 : 2015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 광복 70주년 약산 김원봉 특집기사

5 각종 매체에서의 등장

<아리랑(Song of Arirang)>(님 웨일즈 지음, 조우화 옮김, 동녘)과 <김산 평전>(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에 주인공 장지락이 만난 주요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약산 김원봉이다.

팟캐스트 방송 이박사와 이작가의 이이제이 중에서 2013년 2월 20일에 업로드된 29화에서 약산 김원봉 특집을 다루어 매체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독립운동가를 알게 됐다는 평이 많았다.

광복절 특집극 절정에서 김원봉 단장이 등장한다. 윤세주의 천거로 이육사의열단에 받아들이게 된다.

2015년 7월 개봉된 암살(2015)에 비중있는 조역으로 등장한다. 사실상 한국 내 영화, 드라마 내에서 김원봉에 대한 의미있는 조명은 이 영화가 처음이라고 봐도 좋다. 한국사회가 70년 동안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알게 해주는 부분. 배우는 조승우. 여담으로 암살의 흥행과 김원봉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2013년 초에 업로드했던 이이제이 김원봉 특집 편의 순위와 구독수가 급상승했다고 자신들의 방송에서 언급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서도 응원 메세지를 보냈다.

암살에 이어 2016년 9월 개봉인 밀정에서 이병헌이 맡은 역할인 정채산이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의열단 단장으로 나온다. 재미있는건 내부자들에서 같이 출연한 조승우, 이병헌이 한번씩 김원봉역할을 하게 되었다.

6 성격 및 일화

  • 상당히 말이 없고 과묵한 인물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다지 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인데 토론이나 웅변 때문에 한 번 말했다하면 상대방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항상 무표정이었다고 한다. 그와 임시정부 시절 오랜 시간을 보냈던 김구마저도 그가 웃는 모습은 거의 못봤다고 한다.
  •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박차정 여사와 결혼하고, 신접살림까지 차려서 살았다. 나중에 부인이 1939년 곤륜산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순국했을때, 손수 밀양에 돌아와 묻어주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손수 만든 무덤은 아직도 밀양에 보존되어 있다. 다만 관리가 잘 안되서 풀숲이 무성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박차정 여사의 모교인 동래여고 동문회에서 주기적으로 묘소 관리를 하러 들른다고 한다.
  • 밀양의 절에 자주 들려서 주지스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주지스님이 회고하길 인생에서 만나본 사람중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 의열단의 단장답게 항상 인물을 만나면 의심과 경계를 했다고 하며, 아무에게나 쉽게 정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2시간 이상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잠은 제대로 잤을까 싶을 정도. 초인적인 그의 정신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어릴 때부터 강한 반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보통학교에 다니던 1911년 4월, 일왕의 생일 때 학교에서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 변소에 처박고 자퇴했다고 한다.

7 가족

첫 부인 최씨는 평안도 출신 여성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유명한 여성 독립운동가로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 단장을 지낸 박차정으로 1931년에 결혼하였으나, 1939년 장시 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의 후유증과 관절염 등으로 1944년 충칭에서 병사했다. 이어, 세 번째 부인 역시 조선의용대 출신의 최동선이다. 최동선은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은 김중근(1945년~)이고 둘째는 김철근(1947년~)이다. 북에 최동선이 낳은 그의 두 아들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김원봉이 북한정권에 의해 사실상 숙청된 만큼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에서 가족들중 남동생들은 한때 보도연맹 사건으로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있었으나, 봉철씨(1918 - 1986)는 당시 생존하였다.

남에 남은 유일한 남동생 봉철씨는 4. 19. 혁명 당시 동생들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밀양피학살자조사대책위원회에 참여하였는데, 이후 이를 이유로 박정희 정권 하에서 무고한 옥살이를 하다 1986년 사망하였고 2010년 유족들의 노력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재심결정 및 무죄를 선고 받았다 (관련기사). 여동생 학봉(1932년~)씨는 여전히 밀양에 생존해 있다. 학봉 씨의 자제 (약산의 조카) 김태영 씨 인터뷰 : 형제 4명은 총살.. 김원봉 집안 풍비박산

두 번째 부인인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뻘인데, 박차정의 외당숙이 바로 김두봉이다. 박차정의 어머니가 김두봉의 사촌동생이라고.

  1. 정규군을 양성하는 군사학교인 만큼, 체계적인 교육을 이수할 수 있었다. 당시 교장은 장제스. 한때 중화민국과 (국부군 출신의)대한민국 군부 요인 가운데는 이 황포군관학교 동문들이 존재했다.
  2. 이부분은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있어서 가장 비극적인 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엄연히 말하자면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 세력보다 조선의용대 세력이 훨씬 더 항일 무장투쟁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한국광복군은 엄연히 말하자면,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단체라기보다는 중국국민당의 직속 산하단체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임정내 보수세력들이 지지기반이 약해서 국민당 정부에게 지휘권을 맡긴것이기 때문...그리고, 광복군은 일본군과 교전한 경력이 전무했다. 오히려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세력이 무장투쟁에 훨씬 적극적이었고 일본군과 여러차례 교전을 벌이기도...(대표적인 전투가 태항산 전투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에서는 홍사익이 지휘하고, 조선의용군에서는 김무정이 지휘했다.)
  3. 팔로군과 연합한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의 의리 때문에 해방 이후 국공내전까지 참전했고 그리고 대부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4.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공화정/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국비 의무교육 실시
  5. 김구 세력인 독립운동가 석린 민필호는, '김원봉은 사사건건 김구에 대들었다. 그는 교활한 공산주의자'라고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었다.(...)
  6. 앞서 말했듯이 조선의용대 소속의 부대원들 대부분이 옌안의 태항산으로 갔기 때문에, 세력이 약한 김원봉은 임정 내에서 마냥 뜻대로 활동할 수는 없었다.
  7. 사실,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이점은 정말 심각한 한계점이었다. 실제 한국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분열이 상상이상으로 심했었다.
  8. 여기서 노덕술이 김원봉의 빰을 때리고 모욕했다는 썰이 주가 된다. '약산 김원봉 평전'에 의하면 언론인 송건호의 언급을 인용하며 체포당했을 당시에 김원봉은 화장실에서 용변을 다 마치기도 전에 끌려갔다고 한다.
  9. 연합뉴스와 인터뷰, 2015/08/14
  10. 이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한글학자로 중도우파 성향이었던 이극로. 이극로도 역시 남북협상때 북에 남았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오랫동안 '좌익'인사로 분류되어 흑역사가 된 인물이었다.
  11. 박헌영 역시 미국 간첩으로 몰렸다.(...)
  12. 조선의용대 출신 김학철의 증언.
  13. 뒷날 MBC 사장이 되는 인물이다.
  14. 조소앙, 안재홍, 조완구,엄항섭 등등
  15. 이러한 점 때문에 김일성 눈 밖에나 숙청당하는 커다란 계기로 작용되기도 한다.
  16. 현재 화폐가치로 치면 약 200억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