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니시 후토시

20131125_1773322.jpg

현역 시절의 나카니시.

이름나카니시 후토시(中西 太)
생년월일1933년 4월 11일
국적일본
출신지카가와 현 다카마쓰 시[1]
포지션3루수
프로입단1952년
은퇴1969년
195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이이다 도쿠지
(난카이 호크스)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라이온즈
)
이나오 가즈히사
(니시테츠 라이온즈)
니시테쓰 라이온즈 역대 감독
가와사키 도쿠지
(1960 - 1961)
나카니시 후토시
(1962 - 1969)
이나오 가즈히사
(1970 - 1974)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감독
도바시 마사유키
(1973)
나카니시 후토시
(1974 - 1975)
오사와 케이지
(1976 - 1983)

일본프로야구 前 선수, 지도자, 해설가.

1 현역 시절

다카마쓰 제일고교 재학 당시부터 슬러거로 명성을 날렸으며, 고시엔 대회에서는 학교를 4강에 두번 진출시켰으나 전부 그해 우승 학교에 패배한 경험이 있다.

2 프로 시절

1952년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입단, 그 해 타율 0.281, 12홈런, 65타점으로 신인왕을 수상하면서 일약 괴동이라 명명되며 스타덤에 올랐다.[2] 이후 수위타자, 홈런왕, 타점왕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며 1958년 까지 매년 타격 3관왕에 가까운 성적을 남겼다. 1953~56년엔 4년 연속 홈런왕을 기록.

건장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의외로 빠른 발을 갖고 있던, 말 그대로 호타준족의 선수였다. 데뷔 2년차인 1953년 36도루를 훔치며 일본프로야구 사상 3번째로 3할-30홈런-30도루, 일명 트리플 쓰리를 기록하기도 했다.[3] 또한 파워와 배트 스피드가 뛰어나 그의 타구는 거의 라인 드라이브로 펜스를 넘어가는 경우가 허다했고, 직선타구를 3루수가 점프했는데 그대로 3루수 키를 넘어 외야석에 떨어졌다 던지 야수 정면으로 오는 타구를 포구했는데 글러브를 낀 손에 마비가 와서 공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라는 등의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ㅎㄷㄷ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3루수로서 수비도 훌륭했고 특히 파울 플라이때 펜스를 코앞에 두고도 두려움 없이 타구를 쫓는 허슬 플레이의 달인으로[4] 동료 유격수였던 토요다 야스미츠와 함께 금강불괴 라는 별명으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니시테츠의 중심타선을 이끌며 1954년 퍼시픽리그 우승, 1956~58년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는 등 니시테츠 황금시대의 주역이었지만, 1959년 경기 중 상대팀 주자의 스파이크에 오른손이 찍히는 부상을 입고 1960년엔 건초염이 도지면서 나카니시의 불같은 타격은 조금씩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1962년 29세의 나이로 니시테츠의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여 주변에서는 야구계의 케네디 정권 이란 비아냥이 있었지만 이듬해인 1963년에 난카이 호크스와의 치열한 리그 우승 쟁탈전 끝에 무려 10.5게임 이란 게임차를 극복하고 우승을 거머쥐면서 주변의 우려를 불식시켰다.[5]

1969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와 감독직을 모두 그만두며 현역에서 은퇴.[6] 프로 통산성적은 18년 동안 타율 0.307, 244홈런, 785타점, 142도루. 그의 등번호 6번은 니시테츠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으나 1973년 니시테츠가 다이헤이요 클럽에 매각되면서 무효가 되어 버렸다.

3 은퇴 이후

은퇴 후 약 1년 간 TBS의 해설가로 일하였으며, 1971년부터 1997년 까지 야쿠르트(1971~1973, 1983~1984), 닛폰햄(1974~1975), 한신(1979~1981), 킨테츠(1985~1990), 요미우리(1990), 롯데(1994), 오릭스(1995~1997) 등의 감독과 수석, 타격코치를 역임하였다.[7]

1997년 오릭스 블루웨이브 타격코치를 끝으로 야구계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갔지만 타격 이론과 지도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탁월한지라 여러 구단의 초청으로 타격 인스트럭터 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2000년 이후 닛칸스포츠의 야구 평론가로 재직중이며, 수년 전 갑상선암을 앓았으나 다행히 완쾌된 상태이다.

니시테츠 시절 스승인 미하라 오사무 감독의 큰딸과 결혼하여 장인-사위지간이 되었다.[8] 팀메이트 였던 토요다 야스미츠 와는 팀내 라이벌 관계로 서로 격한 성격탓에 말도 안할것 같은 사이로 보였지만, 사실은 상당히 친밀하여, 경기 도중에도 토요다와 자주 상대 투수의 투구패턴과 공략법에 대해 의논하고 조언을 나누는 사이였다고 한다.

1999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 일본 프로야구 4대 명감독 중 두명인 미즈하라 시게루, 미하라 오사무와 동향.
  2. 나카니시가 일본 프로야구의 초대 괴동인 셈이고, 그 후 오자키 유키오, 호리우치 츠네오,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괴동의 계보를 잇고 있다.
  3. 1950년 벳토 카오루(마이니치 오리온즈)와 이와모토 요시유키(쇼치쿠 로빈스)가 같은 해 동시에 3-30-30 클럽에 가입했다.
  4. 그래서 수비 도중 펜스와 충돌하여 앞니가 3개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적도 있다(...).
  5. 이것이 니시테츠 시절 최후의 리그 우승이며, 그해 일본시리즈 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3승 4패로 주저앉았다.
  6. 그해 10월에 터진, 니시테츠 선수들이 연루된 검은 안개 사건에 대한 도의적 책임이기도 했다.
  7. 닛폰햄, 한신에서는 감독을, 야쿠르트, 롯데에서는 감독대행 직을 맡았다.
  8. 호적상의 이름은 미하라 후토시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