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오 가즈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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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나오 가즈히사 (稲尾 和久)
생몰1937년 6월 10일 ~ 2007년 11월 13일
국적일본
출신지오이타 현 벳푸 시
포지션투수
투타우투우타
프로입단1956년 니시테츠 라이온즈 입단
소속팀니시테츠 라이온즈 (1956~1969)
지도자 경력니시테츠 라이온즈/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코치/감독 (1966~1974[1])
주니치 드래곤즈(1978~1980) 코치
롯데 오리온즈 감독(1984~1986)
1956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신인왕
에노모토 기하치
(마이니치 오리온스)
이나오 가즈히사
(니시테츠 라이온즈)
기무라 다모츠
(난카이 호크스)
1957,58년 일본프로야구 퍼시픽리그 MVP
나카니시 후토시
(니시테츠 라이온즈)
이나오 가즈히사
(니시테츠 라이온즈
)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호크스)
1958년 일본시리즈 MVP
오시타 히로시
(니시테츠 라이온즈)
이나오 가즈히사
(니시테츠 라이온즈)
스기우라 타다시
(난카이 호크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영구결번
No.24

1 개요

일본의 前 프로야구 선수. 니시테츠 라이온즈(現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철완.

2 프로데뷔 전

규슈(九州) 벳푸(別府)의 어부 가문 출신으로, 가업을 잇기 싫어 야구에 몰두했다고 할 정도로 가난하고 힘든 어린 시절을 지냈다. 이 시절 노젓기를 익히면서 훗날 그를 명투수로 만들어준 강한 어깨와 허리, 밸런스 감각을 기르게 된다. 어라, 이거 누구랑 똑같은데?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년 간 프로로 뛰어봐서 신통치 않으면 가업을 잇는다'는 조건으로 세이부 라이온즈의 전신 니시테츠 라이온즈에 입단한다.

3 그리고 괴수도 초월한 전설이 되었다

위키백과 문서

.....스탯 한번 봐라. 특히 이닝과 평균자책점(...)

첫 해에 21승 6패, 이듬해에 35승 6패를 거두는 등 8년간 234승을 거두었고, 그 뒤로 3년 연속 30승, 8년 연속 20승 이상에, 한 시즌 평균 300이닝을 던졌는데, 평균자책점이 통산 1점대다.

특히 6년차인 1961년에는 404이닝(...)을 등판하여 방어율 1.69에 42승(!) 14패를 거두어 '일본 야구 1시즌 최다승 타이 기록'[2]을 세운다. 괴수도 초월했다. / 어떻게 42승을 세웠는지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14패나 한 거냐?

그러나 가장 극적인 장면을 만든 해는 1958년 일본시리즈. 당시 라이온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대결에서 초반 3연패를 당해 말 그대로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다.[3] 그 상황에서 이나오 가즈히사는 4,5,6,7차전을 모두 등판(5차전은 구원)하여 모두 승리를 따내 일본시리즈 4승(2패)이라는 일본 야구 사상 2번밖에 없는 대기록[4]을 세우고 MVP와 최우수 투수상을 수상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니시테츠는 일본시리즈 사상 최초의 리버스 스윕을 이룩한다. 미하라:이나오야 우짜노, 여기까지 왔는데 / 이나오:알겠십니더 감독님, 마 한번 해보입시더 그리고 교진은 31년 뒤 미하라제자가 이끌던 모 콩라인 팀에게 똑같이 화풀이를 했다 특히 5차전에선 연장 10회말에 타자로 나와 끝내기 홈런을 치고 야구장 밖으로 나오자, 한 니시테츠 팬이 이나오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면서 감격에 넘쳐 울부짖으며 "하느님[5], 부처님, 이나오님(神さま, 仏さま, 稲尾様)!!" 이라는 일본 야구에 길이 남을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도 라이온즈의 올드팬들은 그 때 당시를 안주삼아 얘기한다고 한다.

노무라 카츠야와 몇 가지 일화가 있다. 역대 최고의 슬라이더를 가졌다는 이나오[6]였지만 결정구는 슈트로 썼는데, 이걸 간파한 사람은 노무라뿐이었다고 한다. 또 올스타전에서 둘이 퍼시픽 리그 대표로 뽑혔을 때, 노무라는 어떤 타자에게는 슬라이더만 어떤 타자에게는 슈트만 요구하며 같은 리그의 적수인 이나오의 공략법을 찾았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도 결국 어깨 부상으로 인하여 9년차인 1964년에는 1승도 못 거두고 방어율도 10점을 넘기는 등 6년동안 42승 밖에 못 올리는 부진(?)에 빠져 1969년 은퇴한다. 이를 두고 "8년의 영광, 6년의 좌절"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이 분의 그 6년의 좌절이라는 로우 커리어가 65년 13승 6패 216이닝 101삼진 평균자책점 2.38의 스탯을 찍었고 이후 66년엔 11승 10패 185이닝 평균자책점 1.79에 134삼진이라는 스탯을 내놨다. 30승 3년 연속하던 굇수가 인간계 내려와 1~13승 한거면 좌절 맞...나?

그 뒤로 10승만 못했다 뿐이지 64년 부상으로 통채로 쉰 시즌과, 67년 129이닝, 은퇴시즌 69년 97이닝을 빼곤 6년의 좌절기간 평균 138이닝을 던졌단 거다.

그리고 69년 97이닝 1승 7패 46삼진[7] 2.78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러나 이 성적을 따지기 전에 이 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났나를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참고로 1965년 니시테츠에 입단하여 5시즌 반 동안 103승을 거둔 이케나가 마사아키가 이나오의 뒤를 이을 에이스로 성장하는가 했지만, 이른바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영구제명 당하면서 이나오에게 천추의 한을 남긴 바 있다. 그나마 이케나가는 승부조작 자체에 가담한 적이 없고 단지 선배의 강권에 휘둘렸단 점이 인정되어 2005년 4월 사면 복권 되었다. 이나오가 세상 뜨기 전에 복권된 것이 다행이다

4 은퇴 이후

이후 야구 해설, 평론가 및 1970~1974년 니시테츠 라이온즈 - 타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1978년~1980년 주니치 드래곤즈 코치, 1984~1986년 롯데 오리온즈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감독으로써의 성적은 그닥 썩 좋진 못하였다. 니시테츠 - 다이헤이요 클럽 감독 땐 1970~1972년 연속 6위로 리그 꼴찌. 1973년~1974년 땐 전기리그 3위/후기리그 4위를[8] 기록하였다.[9]

그리고 롯데 감독 땐 1984~1985년 연속 리그 2위로 상위권을 차지했지만 1986년 하위권인 4위에 안착하며 감독직을 그 해를 끝으로 사임했다.

그 뒤 1993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하지만 철완도 병마는 이길수 없었는지 2007년 11월 13일 별세.

5 평가

여러모로 한국의 최동원과 유사점이 많은 투수이다. 야구선수가 되기까지 뒤에서 조언해 준 부친을 뒀으며, 프로에서 혹사를 달고 살면서도 굇수같은 성적을 냈고, 무쇠팔이란 별명으로 한국시리즈/일본시리즈에서 4승을 거두며 각자 소속팀을 우승시켰다. 또한 정의감도 투철하여, 검은 안개 사건 당시 일각에서 제기된 '요미우리 흑막설' 등을 일축하며 사건의 철저한 조사를 바라는 한편 조사 협조에 미온적이던 구단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짧지만 강렬한 기록을 남기고 사라진 한 시대의 대투수.[10] 기록도 기록이지만 인간 냄새가 물씬 나는 선수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대스타로 성공을 했었어도 절대로 거만하지 않은 성품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말기 암으로 시한부인생이 된 부친을 위해 연봉을 가불받아 벳푸의 해안가 전망좋은 집을 사드렸다는 일화도 유명하다.[11]그리고 저 일본야구에서도 유명했던 괴짜인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포용한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으니 인성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그의 롯데감독 해임이 오치아이가 롯데를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

원래 이나오의 등번호인 24번은 오시타 히로시의 3번, 나카니시 후토시의 6번과 더불어 니시테츠 시절의 영구결번이었지만, 니시테츠 라이온스가 다이헤이요(太平洋)로 매각되면서 이나오 자신은 81번을 쓰고 24번은 재능있는 후배선수들에게 넘겨주기로 했다. 이후 라이온스 24번의 계보는 고가 마사아키(古賀正明)-아키야마 코지-히라노 켄(平野謙)-마츠나가 히로노리(松永浩典)로 이어졌다.

2012년 5월 1일, 그의 탄생 75주년을 맞아 선수시절 등번호인 24번이 세이부 라이온즈의 첫 영구결번으로 공식으로 지정했다. 세이부는 니시테츠의 전통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이번에 그의 등번호 24번의 영구결번 지정했는데, 원래 이전 팀의 영구결번을 잇지 않는 일본야구의 관례상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호크스 팬들 들고 일어나겠다[12][13]

6 트리비아

빙그레 이글스 초창기 몇번 한국에 방문했는데 당시 감독, 코치이던 김영덕[14], 강병철에 의하면 한국계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하나, 이것은 후에 거짓으로 밝혀졌다.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있었다면 새역모에 가담했을 리 만무하지
  1. 66~69년은 코치. 70~74년은 감독
  2. 다른 시즌 최다승은 1939년 도쿄 거인군의 러시아계 선수 빅토르 스타르핀(Victor Starffin, 일본 이름은 스다 히로시) 선수가 세운 42승(15패, 1.73). 그러나 이 때는 아직 일본 야구가 체계적이지 못한 시절의 기록이라 이의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많다.
  3. 천하의 이나오도 1, 3차전 선발로 나왔으나 패배를 기록했다. 그 중 3차전은 1실점만 한 경기였다.
  4. 또 하나의 4승은 이듬해인 1959년 일본시리즈에서 난카이 호크스스기우라 타다시가 세운다. 참고로 난카이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4연승을 거뒀으며 당연히 스기우라의 4승은 4연승이다.
  5. 여기서 말한 하느님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일본 전통신을 뜻한다.
  6. 고인이 된 아오타 노보루(青田昇)는 생전에 "일본에서 진짜 슬라이더를 던진 건, 후지모토 히데오(이팔용), 이나오 가즈히사, 이토 토모히토 단 세 사람뿐이었다."고 했다.
  7. 수정 전 34삼진이라 적혀있었으나 일본위키에 따르면 46삼진이다.
  8. 이때 1973~1982년까지 퍼시픽리그에선 플레이오프를 실시. 전후기리그제로 운영해 각 리그 1위당 플레이오프를 치뤄 이긴 팀이 일본시리즈 진출권을 얻는 방식으로 진행했다.(전후기리그 전부 우승시 일본시리즈 직행)
  9. 다만 이나오가 감독을 맡던 시기의 라이온즈는 검은 안개 사건으로 인해 주력 선수들이 대부분 영구제명/출장정지 당해 팀이 거의 개발살나다시피 하고 결국 모기업인 서일본 철도가 경영을 그만 둬 네이밍 스폰서 등으로 겨우 운영을 하던 팀 사정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다.
  10. 사실 50-60년대 당시 14년이면 짧은 기간은 아니다.
  11. 연봉 가불 협상 때 이나오 부친의 사연을 들은 니시테츠 대표가 이나오의 효심에 감격하여 눈물을 펑펑 쏟으며 흔쾌히 원하는 액수를 내줬다고. 덕분에 이나오 부친은 바다를 바라보면서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
  12. 그는 사이타마에서 뛴 적이 한 번도 없고 순전히 후쿠오카에서만 뛰었다. 현역 당시 그의 팬덤은 현재 호크스 구역.
  13. 사족으로 라이온스가 과거 후쿠오카를 연고로 하던 팀이라서 그런지 호크스-라이온스와의 시리즈 중 일부는 올드 유니폼 이벤트를 벌이기도 한다. 비록 과거에 연고로 하던 팀은 떠났지만, 라이온스의 후쿠오카 시절 역사를 최대한 후쿠오카 팬들에게 돌려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14. 이나오와 같은해 난카이 호크스 입단으로 NPB 데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