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와 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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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오사와 케이지(大沢啓二)
생년월일1932년 3월 14일
사망년월일2010년 10월 7일
출생지카나가와 현 후지사와시
포지션외야수
소속팀난카이 호크스(1956~1964)
도쿄 오리온즈(1965)
지도자 경력롯데 오리온즈 감독(1971[1]~1972)
닛폰햄 파이터즈(1976~1983, 1984 후반부[2] 1993-1994)
롯데 오리온즈 역대 감독
노닌 아유무
(1967.8. - 1971.7)
오사와 케이지
(1971.7 - 1972)
가네다 마사이치
(1973 - 1978)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감독
나카니시 후토시
(1974 - 1975)
오사와 케이지
(1976 - 1983)
우에무라 요시노부
(1984 개막 - 1984.6)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감독
우에무라 요시노부
(1984 개막 - 1984.6)
오사와 케이지
(1984.6 - 1984 시즌종료)
다카다 시게루
(1985 - 1988)
닛폰햄 파이터즈 역대 감독
도바시 마사유키
(1992)
오사와 케이지
(1993 - 1994)
우에다 토시하루
(1995 - 1999)

1 소개

일본프로야구의 前 선수, 감독, 해설가. 선수 시절은 난카이 호크스 황금기의 일원이었고, 감독으로써는 만년 비인기 구단이자 파리그의 전투력 측정기였던 닛폰햄 파이터즈를 리그 우승 1회, 6년 연속 A클래스로 인도한 명장. 별명은 오야붕.

오사와 아카네는 그의 외손녀이고, 게키단 히토리는 그의 손녀사위이다.

2 선수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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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

현립 히라쓰카 공고 1학년 때 교내 폭력사건에 연루되어 퇴학되었고, 이 후 히라쓰카 상공고로 전학했으나 3학년 때 고시엔 지역예선에서 히라쓰카 상공고에 불리한 판정을 한 주심을 폭행해 본인과 야구부가 출전정지 1년을 먹는 민폐대형사고를 친 흑역사가 있다. 그러나 당시 폭력의 피해자였던 주심이 릿쿄대학 직원이었는데, 그의 승부근성과 운동능력을 높게 평가해 릿쿄대에 체육특기생으로 추천하며 야구선수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고, 오사와는 그 직원에 기대에 부응해 두 차례나 도쿄 6대학 리그 베스트 나인에 오를 정도로 맹활약했고, 졸업과 동시에 난카이 호크스에 스카웃된다.

프로에서는 장타력은 떨어졌지만 완벽에 가까운 외야수비력으로 황금기 난카이 외야진의 주전으로 활약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59년 일본시리즈였다. 당시 그는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으로부터 받은 거인 타자들의 타격 자료를 완벽히 숙지, 타자의 성향에 따라 수비위치를 수시로 바꾸며 안타성 타구를 모조리 범타처리해 난카이의 일본시리즈 우승에 보이지 않는 공을 세웠는데, 이 시리즈에서 TV 객원해설자를 맡은 미하라 오사무로부터[3] "MVP 스기우라 타다시가 부상으로 중형차를 받았는데, 스기우라의 호투를 보이지 않게 도운 오사와에게도 소형차가 제공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극찬을 받았다.

그 외에도 발느린 상대팀 타자의 우전안타성 타구를 빠뜨린 척 하면서 타자주자의 2루행을 유도한 뒤 정확한 송구로 타자를 2루에서 잡아내는 고도의 낚시를 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10년 선수 제도[4] 혜택을 1년 앞둔 1964년, 프런트가 뜬금없이 스카우트 전직을 제의하자[5] 이에 반발해 도쿄 오리온즈로 이적했고, 1965년 한 해만 뛰고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시절

3.1 롯데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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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오리온즈의(1968년까진 도쿄 오리온즈) 타격코치를 거쳐 1970년에는 오리온즈의[6] 2군 감독을 맡아 그해 이스턴리그 우승을 달성하는 수완을 발휘한다.[7]

1971년 7월 24일, 몰수패 파동으로 경질된 노닌 와타루를 대신해 1군 감독대행으로 취임, 잔여경기에서 33승 2무 19패의 호성적을 기록하며 이해 퍼시픽리그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와 3.5게임 차의 2위를 차지하면서 정식감독이 되었으나, 1972년에는 5위로 침체하면서 경질된다(...)[8]

3.2 닛폰햄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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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감독 당시.
재팬 힙합 레전드 MC keiji
김응용 감독님?

1973년부터 라디오 간토의 해설자를 맡다가 1975년 겨울, 미하라 오사무 사장의 요청으로 나카니시 후토시의 뒤를 이어[9] 닛폰햄 파이터즈 감독에 취임한다.

감독에 취임한 오사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에나츠 유타카를 영입해 팀의 뒷문을 강화하고, 시마다 마코토, 다카시로 노부히로 등 발빠른 젊은 야수들을 중용해 달리는 야구로 팀컬러를 바꿨는데, 그 노력이 결실을 맺어 1981년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한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 2승 4패로 발리먼서 V9 이후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선물했다(...)[10] 의리의 고라쿠엔 Friends

1984년 닛폰햄 구단 상무로 취임하며 프런트로 전직, 우에무라 요시노부 감독의 사퇴로 감독대행을 겸했던 1984년 후반기를 제외하고는 1992년까지 구단 행정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2년 가을, 닛폰햄의 감독 선정이 난항을 겪자[11] 다시 감독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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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기 감독 시절.

1993시즌은 리그 최강 세이부 라이온즈와 불과 1게임 차인 2위로 마치며 선전했으나, 이듬해에는 한 차례도 4연승을 기록하지 못하는 부진 속에서 다시 최하위가 되었고,[12] 그 해를 마지막으로 감독직에서 완전 은퇴, 닛폰햄에서도 떠나게 되었다.

감독으로써의 통산성적은 725승 93무 723패.

4 이후

감독직 은퇴 이후 야구평론가와 야구해설자로 활동하면서 프로야구 마스터스 리그 회장 등을 역임하며 왕성히 활동했으나, 2010년 10월 3일 담낭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5 여담

  • 릿쿄대 선배인 니시모토 유키오에게만큼은 항상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는 특기생으로 들어온 자신과는 달리 니시모토가 입시를 통해 릿쿄대에 진학했고, 지도자로써도 자신보다 훨씬 우수한 퍼시픽리그 우승 8회의 성적을 남겼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그 우수한 성적이란 게 파리그 우승 8회.
  • 난카이 황금기 시절의 동료인 노무라 카츠야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고졸 테스트 합격생 출신인 노무라가 입단연차는 빠르지만, 연상인 오사와는 단 한번도 노무라에게 경칭을 쓰지 않았고, 난카이 시절을 회고하는 인터뷰에서는 "츠루오카 감독님 이후로 난카이는 감독의 그릇이 아닌 사람이 감독을 맡았다"면서 절묘하게 노무라를 깠다(...) 근데 노무라는 일본시리즈 3번 우승하고 츠루오카보다도 많다. 리그 우승은 훨씬 적지만. 일본시리즈 우승 3회의 야쿠르트 왕조를 만든 남자 노무라 VS 퍼시픽리그 깡패 츠루오카 리그 우승도 5번이나 이루고 만년 B클래스 라쿠텐 이글스를 우승권으로 올린 사람인데? 리그 우승 1번만 한 사람이 할 말은..
  1. 노닌 와타루 당시 감독의 경질로 인한 감독대행.
  2. 감독대행.
  3. 1959년 시즌까지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감독을 맡고 있었으나 그 해 4위에 그치며 사임한 상태였다.
  4. 10년 동안 한 팀에 근속한 선수가 원 소속팀과 장기계약 또는 자신이 원하는 팀으로 이적할 수 있고 여러 팀에서 10년간 뛴 선수는 장기계약 자격을 부과하는 제도. FA 제도의 프로토타입 격으로 1947년-1975년 사이에 존재했었다.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가 본인의 소망인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루기 위하여 이 제도를 이용해 1965년 고쿠테츠 스왈로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였다.(당시의 스왈로즈는 1961년에야 팀 최초로 리그 A클래스를 기록할 정도로 하위권만 전전하던 팀이었다.)
  5. 이때 츠루오카 카즈토 감독의 자택에서 메이저리그 이적 관련으로 먼저 와있던 무라카미 마사노리에게 이 따위 팀에 의리 따위 가질 필요 없다 란 식으로 말해 츠루오카와 말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6. 중간에 1969년 롯데가 네이밍 스폰서로 나서면서 팀명이 롯데 오리온즈로 바뀐다. 그 뒤 1970년 시즌종료 후 롯데가 구단을 매입하게 된다.
  7. 그 해 노닌 와타루가 이끌던 오리온즈 1군도 1960년 이후 10년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다만 상대가 하필 V9 시대의 그 거인놈들이라서(...) 여담이지만 둘 다 당시 연고지가 도쿄라서 도쿄에서만 경기가 열렸기 때문에 일명 도쿄시리즈 였던 일본시리즈였다.
  8. 그의 후임감독이 바로 가네다 마사이치였다. 가네다가 1974년 교진군의 V10을 저지하고 세리그 우승을 차지한 주니치 드래곤즈를 격파하고 일본시리즈 우승한건 덤(..)
  9. 미하라는 사위인 나카니시 후토시를 감독으로 임명했으나 하위권만 기록하자 짤랐다. 미하라 : 나가게. 자네랑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네/나카니시 : 잠시만요! 장인어른! 장..(쾅!)
  10. 여담으로 이 해 일본시리즈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폰햄 파이터즈가 둘 다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써서 발생한 전무후무한, 앞으로도 전무후무할(닛폰햄이 2004년 홋카이도로 연고이전했으니) 덕아웃시리즈였다.
  11. 당시 오사와는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우에다 토시하루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프런트 높으신 분의 "오사카 사람이 도쿄팀 감독을 맡는 게 말이 되느냐?"지역드립으로 인해 협상이 파투났고,(다만 우에다는 후에 오사와의 후임으로 닛폰햄 감독직을 맡았다.) 다음으로 오 사다하루를 영입하려고 했으나 당시 거인군후지타 모토시 감독의 경질설이 도는 바람에 좌절되었다.
  12. 이것 때문에 시즌 최종전 종료 후 팬 앞에서 도게자까지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