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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역 열차 충돌사고 혹은 남원역 열차 역추돌사고라고도 한다.
1 개요
1971년 10월 13일 1970년에 수많은 학생들이 산화했던 모산 수학여행 참사와 원주터널 열차 충돌사고의 1주기를 불과 며칠을 남겨둔 이날 또 한번 대한민국 국민들을 분노케 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전라북도 남원역 구내에서 군산역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232명 및 통학생과 시민들을 태운 순천역발 용산역행 192호 보통열차가 남원역 출발후 1.5km 지점에서 기관차 출력부족으로 언덕에서 멈춘뒤 후진하여 후발열차로 대기중인 유조화물열차를 (역)추돌하여 9번 8번 7번 객차가 탈선되고 특히 7호 객차가 8호객차를 반쯤 짓이겨 8호객차에 탑승한 어린이들이 참변을 당했다. 이 사고로 인해 국민학생(초등생)15명, 고교생 3명이 사망하고 3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이후 후송된 중상자가 사망해 22명 사망으로 늘어난다.)
당시 신문기사를 참고해보자
2 발생 과정
192호 보통열차가 남원역에서 6시 40분에 출발후 7시 16분 후발 유조화물열차가 진입해 정거중이었다. 이때 선행 192호 보통열차에서 무전으로 기관차의 기관고장으로 구조해달라는 연락을 받게된다. 이후 직원들이 유조화물열차의 기관차를 유조탱크와 분리하려는 찰나 보통열차의 기관차의 제동장치가 풀려 뒤로 미끄러지기 시작해 남원역으로 돌진 유조화물열차와 뒤로 추돌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때 열차 충돌시 발생하는 타오름현상으로 7호차가 8호차를 타고올라 객실의 1/3이상을 뭉개버려 인명피해가 커져버렸다. 위의 신문 7면에 당시의 사진이 실려있다.
3 사고 원인
당연하게도 기관차가 기관고장으로(혹은 추력부족으로) 오르막길을 오르지 못하고 제동을 건 상태로 버티다가 제동이 풀려(압축된 공기가 모두 풀려서 제동장치가 풀림) 그대로 중력에 의해 뒤로 밀려 나아갔고 후속 열차에 그대로 추돌한것이다. 지금은 기관차들의 성능이 좋아 이같은 현상은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에는 열차라면, 선로가 언덕을 올라갈 시 언제든지 발생할수 있는 기초적인 사고 유형 중 하나였다. 이런 사고의 경우, 다른 기관차를 동원해 구원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이번 사고는 구원하기도 전에 이미 열차가 떠난 셈이다.[1]
따라서 이런 사고를 대비하여 열차바퀴에 침목을 대어 제동의 힘을 보강하고(자동차와 같다) 역에서는 열차가 뒤로 미끄러져 내려올 것을 대비해 선로를 비워두어(혹은 선로전환기를 작동시켜서) 추돌을 방지하고 열차를 세울 방법을 꾀하여야 한다. 이것은 기초적인 사고유형에 대한 기초적인 대비책이었지만 이 사고에서 지켜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한 언론사는 다음과 같은 기사제목을 썼다. 남원참사는 막을 수 있었다 돌 하나만 괴었어도...
당시 사고 기관차는 6000호대 디젤기관차로, 1963년도에 도입한 나름 신형이였고 9량쯤은 너끈히 끌 출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고당시에는 오일 펌프 고장으로 멈춘거라 한다. 그러나 제동하여 대기중 에어 브레이크에 압축공기 조작을 했어야 하는 기관사의 능력부족으로 제동을 유지못하고 열차가 밀린 것으로 조사된다. 이 때문에 경력이 모자란 신참 기관사들에 대한 문제제기가 따랐다.
4 이야깃거리
- 이 사고 때의 언론(신문)들이 기사들을 보면 69년부터 연이은 대형사고에 철도전체의 문제 제기가 잇다른다. 그것도 그럴 것이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인해 철도의 쇠퇴가 급속도로 빨라졌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철도종사자들의 사기가 꺾이고 근로의욕이 떨어져 사고를 미연에 막지 못하고 대처능력의 저하를 가져온다고 진단한 기사도 있다.
- ↑ 당시에는 기술이 없어 터널을 못 뚫고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지금은 직선화로 해소 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