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 |
생몰년 | 1888년 10월 9일~1938년 3월 15일 |
출생지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
정당 | 소련 공산당 |
학력 |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
종교 | 없음(무신론) |
배우자 | 안나 라리나 |
1 개요
소련의 정치가이며 러시아 혁명 영웅 중 한명이자, 마르크스주의자, 경제학자. 대숙청 당시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
2 생애
(추가예정)
초등학교 교사였던 부모 아래 출생했고 러시아 최고의 대학이었던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하였다.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의 저술을 돕기도 하였다.
2.1 혁명 이전
(추가예정)
2.2 혁명 이후
2.2.1 신경제정책
부하린은 일국사회주의를 주장[1]했고, 이는 후에 스탈린이 취하는 포지션이 된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과 대립했다. 부하린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급격한 집단화와 중화학 공업보다는 점진적으로 추진할 것을 당내에서 이를 강하게 주장했다. 허나 당에선 부하린의 주장은 비주류에 불가 했고 결국 당내에서 권력을 빼앗기고 자아비판을 하게 된다.
3 죽음
1937년 1월에 국가전복혐의로 체포 되었다. 이후 우익행위 및 트로츠키주의자로 사형판결이 내려진다. 혐의는 "레닌과 스탈린을 암살하려했고, 막심 고리키를 독살했으며, 소련의 영토를 제국주의 국가에게 할양하려 하였다"는 누명이었다.
몰로토프는 부하린은 고문 당한적이 없고 스스로 모든 죄목을 자백했다고 말했으나 후에 밝혀진 내용으로는 부인과 아들에 대한 위협때문에 어쩔수 없이 허위사실이 적시된 진술서에 서명을 했다고 한다. 부하린의 죄목과 재판에 대한 신빙성으로 인해 해외의 공산주의자들이 재심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들은채 하지 않았다. 결국 1938년 3월 15일 부하린은 처형되었다.
아들과 아내에 대하여 처벌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달리 아들과 아내는 수용소로 보내진다. 부하린의 아내는 흐루쇼프 시절 당시에는 문서로 남길 수 없어서 암기한 부하린의 유언을 말했으며 부하린은 1988년 복권되었다.
부하린이 혁명동지이자 친우였던 스탈린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코바, 왜 나의 죽음을 필요로 하지?"(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2] 스탈린이 죽고서 그의 집무실에서 발견된 편지 중에 하나라고 한다.
4 기타
- 나름 말빨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높아서 레닌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부하린의 출중한 지식에도 불구하고 항상 레닌에게 깨졌다.이와 같은 레닌과의 토론과 논쟁은 이후 숙청 당시 빌미가 되었다.
- 레닌도 부하린의 지식수준을 상당하게 여겼고, 레닌의 유서에서 언급되는 차기 국가원수후보이기도 했다. 다만 부하린은 기계적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레닌은 부하린에 대해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지만 변증법의 이해도가 부족하다"라고 까였다(...)
- 부하린은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많은 기여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식물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소련 학술원의 창립 회원이기도 하였다.
- 소련에서 최고의 경제학자였는데, "제국주의와 세계경제"라는 저술을 남겼다.[3] 이후 NEP에서 최고 이론가였다. 허나 스탈린과 중화학공업에 대한 이견을 보였고 결국 부하린이 자아비판을 하면서 물러났다. 이와 같은 논쟁은 이후 부하린을 숙청하는 빌미 중 하나로 쓰였다.
- 만화에도 소질이 있어서 혁명동지들의 케리커쳐를 그리기도 했다.
- 부하린은 총 3번 결혼 했는데 첫번째는 사촌 여동생과, 이후 동료 혁명가와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세번째 결혼은 45살에 했는데 19살과 결혼했다. 심지어 먼저 대시한쪽은 부하린이 아니라 아내였던 안나쪽이었다! 먼저 러브레터를 건냈다고(...). 스탈린도 재혼경력이 있었지만 어린신부와 결혼하는 부하린에게 핀잔을 하기도 했다.
여성관계만큼은 위너 - 부하린의 아내가 기억했던 부하린이 남긴 유언 중 하나는 "동지여 명심하라. 혁명 성공의 그날 동지들이 칫켜들 깃발 위엔 나의 피 한방울도 묻어 있을 것이다."
-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과 같은 혁명 영웅 중 한명이었는데도 항목이 가장 늦게 작성 되었다. 심지어 레닌의 유언장에 언급되는 인물중에 한명이었는데도 말이다.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도 아직 항목에 없다 - 니콜라이 예조프를 끔직하게도 싫어 했다. 부하린은 예조프를 아래와 같이 평했다.
내가 살아온 평생에 예조프만큼 혐오스러운 작자는 보지못했다. 내가 그를 쳐다볼 때면 난 항상 라스테라예바 거리 광장에서 파라핀에 적신 종이를 고양이의 꼬리에 묶고 불을 붙여놓은 뒤 겁먹은 동물을 보며 즐거워하는 악동을 떠올리게 된다. 나는 예조프 역시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하며 그 외양만 틀릴 뿐 지금 역시 그것과 다를바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니콜라이 부하린이 쓴 "늙은 볼셰비키의 편지(Letter of an Old Bolshevik, 1936)"라는 회고록 중[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