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5분사탐-세계사 - 20강 러시아 혁명 _#001

1 개요

러시아 제국에서 1917년에 일어난 혁명. 100년전의 전제군주제를 무너트린 이 혁명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참고로, 2월/3월 혁명 이렇게 달이 정신없게 나눠지는 이유는 그 당시 러시아가 율리우스력을 쓰고 있어서 날짜 시스템이 그레고리력을 쓰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러시아 입장에서 보면 2월 혁명인데 다른 나라에서 보면 3월 혁명이다. 그리고 두 표현 모두 혼용된다. 괄호로 친 날짜가 러시아 달력(구력)을 기준으로 한 것.

2 혁명 이전(1870 ~ 1900)

19세기 중엽이후, 러시아의 자본주의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1860년대 부터 1900년까지 공업 생산고는 7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대규모 공장제 공업과 중공업이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그 결과 러시아는 광물 채굴, 철강 생산, 운송, 제조등의 면에서 결코 서유럽에 뒤지지 않는 수준까지 도달하였다. 도시 노동자 수도 더불어 증가해 1865년에는 70만 이었으나, 1870년대 말에는 100만, 20세기 초에는 200만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과 상관없이 그들의 삶은 비참하였다. 최저 임금도 없었고 노동시간 제한도 없었다.

또한 지각등의 사소한 규정 위반에도 임금의 1/3 이상이 벌금이라는 명목으로 차감되었다. 여자 노동자의 경우 출산휴가 그런 거 없이 출산 후 바로 다음 날 예외 없이 출근하여야 했다. 이에 대해 항의라도 하면 가차없이 해고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단체를 결성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에 따라 70년대 후반, 오데사키예프의 남부동맹, 페테르부르크의 북부동맹 등의 정치조직이 탄생하였다. 이에 발맞추어 70년대 부터 파업이 속출했으며, 이는 더욱 과격해져 마침내 1885년 주에보에서 섬유노동자의 주도하에 1만명이상이 참여한 파업이 일어났다. 이는 당시까지 일어난 파업중에 최대 규모였다. 처음에 정부는 이러한 노동운동 자체를 무시했으나 결국 이에 굴복해 노동자 보호법이 마련되었고, 여자와 미성년자의 노동이 보호되고 노동시간도 다소 줄어들었다.

그러나 부르주아들은 여전히 편법을 저지르있었고 이런저런 이유로 작업과 임금 상황도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당연히 러시아 노동자들의 불만이 증가하고 정부에 대한 불신도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이러한 가혹한 노동환경은 훗날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가 공산화되는 가장 근본적인 밑바탕이 된다.

1840년대 러시아에 들어온 공산주의는 당시 위와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 지식인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1869년 바쿠닌이 공산당 선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고 자본주의를 분석한 유용한 경제이론으로 공산주의가 소개되면서 이와 같은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또한 러시아가 산업화되면서 농촌에서의 혁명을 주창한 인민주의[1]에서 도시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공산주의가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더욱 설득적으로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관심을 반영하듯 1883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주도하에 제네바에서 러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 조직 '노동자 해방단'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자본주의를 거쳐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이른바 '2단계 혁명론'을 주창하며 마르크스엥겔스의 책을 러시아어로 번역, 보급하였다.


노동자 해방단의 결성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러시아 국내에서는 1883년 '블라고예프단'이 페테르부르크에서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1885년 노동자들의 주도로 '토치키스 그룹', 1889년에는 '브루스네프단'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계몽을 돕는 동시에 공산주의를 선전했다. 위와 같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의 조직과 활동은 해외의 노동자 해방단과는 별개로 진행되었으나, 노동자 해방단이 번역한 공산주의 서적들과 출판물들이 러시아에 유입되므로서 간접적인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서적의 유입은 국내의 공산주의 운동을 더욱 활성화시켜 1890년대에 이르면 전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소규모 조직이 폭넓게 확산되면서 분열된 상태였던 인민주의는 몰락하고 공산주의가 혁명의 이념으로 완전히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게 러시아 전역에 혁명을 위한 바탕이 마련되어갈 무렵, 전제정치를 펼치던 알렉산드르 3세가 죽고 그의 아들 니콜라이 2세가 새로운 차르로 즉위하였다. 노동자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은 그가 개혁을 실행하기를 원했지만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의 제국에 어떠한 변화가 오는 것도 희망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시대착오적인 반동정치를 계속 펼쳤다. 1881년의 임시법을 계속 적용, 확대하여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통제하고 교육에도 제한을 가했다. 이에 반발한 공산주의자들은 1895년 '노동자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에는 레닌, 마르토프[2], 크루프스카야[3], 라드첸코, 포트레소프 등 훗날 혁명을 이끌 지도자들이 핵심 멤버로 참여했다. 그러나 투쟁 동맹은 그 해 12월 당국에 의해 해산 되었고 레닌은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1900년까지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한편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s-3이 창당되었고 이들은 유형 중인 레닌을 판플렛 편집자로, 제네바의 플레하노프를 해외 대표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s-3은 제1차 창당대회 직후 당국에 의해 해산되면서 사실상 창립선언만 한채 괴멸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러시아의 혁명가들을 크게 고무시켰으며 노동자들 사이에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한층 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선언문중 한 구절이다.

유럽의 동쪽으로 갈수록 부르주아지는 정치감각이 뒤떨어지고 나약해진다. 그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과되는 문화적, 정치적 임무는 더욱 막중해진다. 러시아 노동자 계급은 정치적 자유의 획득이라는 임무를 그 굳은 어깨에 짊어지고 수행해야만 하며, 또 수행해낼 것이다.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위대한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고, 그 어디에도 인간에 의한 착취가 남아 있지 않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이며, 그 첫걸음이다.

3 혁명 이전(1900 ~ 1917)

레닌은 형기가 끝나자 런던으로 망명하여 마르토프, 플레하노프와 함께 혁명적 공산주의 신문 <이스크라[4]>를 창간했다. 그러나 1903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당대회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표면적인 원인은 <이스크라>의 편집진을 누구로 구성할 것인가 였지만 실은 혁명노선의 차이로 인한 대립이었다. 레닌은 혁명은 오로지 노동자와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해서만 추진되어야 하며 무장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 차르를 타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마르토프는 폭력적인 방법이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서유럽의 사회주의 정당같이 대중적이고 개방적인 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소(小)부르주아도 정당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두사람의 안건은 투표에 부쳐졌고, 결과에 따라 레닌의 파벌은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 마르토프의 파벌은 소수파라는 뜻의 '멘셰비키'로 불려지게 되었다.이 두 파벌은 한동안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안에서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되지만 결국 1912년 프라하 대회에서 레닌은 멘셰비키와 완전히 결별하고 볼셰비키당을 만들게 된다.


맨셰비키의 지도자 '마르토프'

한편, 러시아 국내에서는 20세기 접어들어면서 노동자들의 정치파업과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1901년 2~3월 동안,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 하르코프 등지에서 수만의 시위대가 '전제 타도'의 기치를 내걸고 가두행진을 벌였으며 같은년 7~8월의 남러시아 노동자 총파업에는 20만의 노동자가 참여, 차르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정부는 탄압을 병행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을 혁명에서 분리하려는 정책을 썼다. 노동자 사이에 간첩을 투입하거나 관제노동조합을 만들기도 했으며, '오히나라'라고 불리는 비밀경찰을 운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투쟁은 탄압이 심해질수록 오히려 증가할 뿐이었다. 1901년, 이러한 투쟁을 바탕으로 러시아 국내에 '사회혁명당(SR)'이 결성됐다. 사회 혁명당은 기관지 <혁명 러시아>를 발간하여 전제정권에 대해 투쟁을 열망하나 정치적으로 자각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또한 이들은 테러를 통해 전제정권과 투쟁할 것을 주장하며 당 전투단을 조직했고 반동적인 관료들을 암살하며 차리즘에 저항하였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은 차리즘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였고, 러시아 제국은 근대화된지 30년도 안된 일본제국에게 패하여 남사할린을 할양하고 대한제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는 굴욕을 맛보았다. 보다못한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1905년, 전제정을 타파하고 입헌군주제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고 농민과 노동자들도 열악한 경제 상황을 개선시켜줄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들의 요구에 돌아온 것은 황제의 총칼뿐이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수백년간 러시아 국민들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던 황제숭배사상이 일시에 무너졌다. 이전에는 단순히 차리즘, 즉 전제정에 반하는 것이 투쟁의 목적 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혁명은 군주정을 아예 부정하고 차르의 퇴위를 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름까지 농민들은 전 러시아의 1/5를 장악했고 가을에는 절반을 점령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은 전제정권의 기둥이었던 군대마저 흔들어 놓았다. 러일전쟁의 패전과 혁명세력의 공작이 군대의 동요를 가속화 했다. 결국 6월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이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비록 반란은 실패했으나 노동자와 군대의 결합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으며 이는 훗날 2월 혁명이 성공하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된다.

결국 니콜라이 2세는 더 이상의 혼란을 막고 군주정을 지키기 위해 1905년 10월 선언을 발표하였다. 입법권을 가진 두마(국회)의 개설, 헌법제정, 투표권 확대를 약속하였으며, 언론·출판·결사·조합 결성의 자유·인권보장이 선언되었다. 11월에는 두마 선거법이 공포되었다. 그러나 공포된 선거법은 많은 국민들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여성은 물론, 25세 미만, 군인, 학생, 종업원 50인 미만의 소기업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소규모 수공업자, 농업노동자에게는 선거권이 없었다. 선거권이 주어진 사람들도 불평등이 심했다. 국민 전체를 지주, 도시민, 농민, 노동자의 네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별로 선거인을 선출했는데, 선거인 1명을 선출하는 사람 수가 각각 달랐다. 지주의 1표는 도시민의 2표, 농민의 15표, 노동자의 45표에 해당했다.[5] 1906년에는 헌법이 공포되고 전제군주가 두마(하원)와 국가평의회(상원)의 협조를 얻어 입법권을 행사하는 입헌군주제가 선언됐다. 그러나 차르가 여전히 행정과 군사, 외교등의 실권은 물론 법률 거부권, 비상시 입법권, 두마 해산권까지 장악한 '사이비' 입헌군주제였다. 또한 두마에서 통과된 법안은 차르에게 충성하는 국가평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했다. 무엇보다 니콜라이 2세는 공식적으로 전제군주로서의 자신의 직함을 포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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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선언으로 개설된 두마의 모습. 니콜라이 2세의 사진이 눈에 뛴다.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사이비 개혁에 반발했지만 반쯤 중세사회나 다름없던 제정 러시아에 국회란 것이 생긴것만 해도 대단히 고무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초기 민족주의에 고무된 러시아 민중은 차르를 지지하며 독일제국과의 전쟁에 참여했다. 그러나 탄넨베르크 전투에서12만 5천명의 러시아군이 전사하며 패퇴하고 1915년 초여름 러시아령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가 함락, 벨로루시와 발트해 연안까지 독일군에 진주하는 등 러시아가 열세에 놓이는 상황에 이르렀다. 결정적으로 제정 러시아가 모든 물자와 병력을 몰빵하여 준비한 브루실로프 공세까지 영 좋지 않은 결과로 종결되자 러시아에선 차츰 혁명적 정세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916년 말까지 500만의 병사가 죽거나 부상당했고, 정부가 전비의 충당을 위해 막대한 양의 루블을 찍어내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되었다. 특히, 빵을 비롯한 생필품의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았다. 거의 모든 국민이 전쟁을 혐오했고, 반전감정은 차리즘에 대한 반발로 이어졌다. 노동운동도 다시 급격히 고조되어 1916년에 100만명 이상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고 병사들의 탈영과 프래깅도 빈번해졌다. 1917년 들어서는 파업이 더욱 빈번해져 1월에는 25만, 2월에는 40만의 노동자가 참여했다. 이를 진압해야 할 군대까지 전쟁에 지치면서 진압을 거부하고 파업에 호의적이게 반응하기까지 했다. 1917년 초, 페트로그라드는 점점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정부는 상황을 수습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바야흐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4 2월 혁명


결국 1917년 2월 23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비보로크의 방직공업 여성 노동자들과 푸틸로프 공장[6]의 노동자들이 '전제타도', '빵을 달라'. '전쟁 반대'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파업을 시작했고 25일에는 페테르부르크 전 도시의 총파업이 발생해서 군경과 시위대의 충격이 본격화 되었다. 27일과 28일에는 볼린스키 연대 등 진압을 명받은 모든 병사들이 혁명 편에 가담하여 러시아 제국은 결국 무너졌다. 한 정부 관리는 보고서를 통해 날짜별로 상황을 보고했다.

2월 23일. 비보로크 지구의 여성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 시위대, 다리 건너 시내 중심부 진입 시도. 다리에서 경찰에 저지됐으나 일부는 얼어붙은 네바강을 건너 시 중심부 진출. 오후 5시, 본대도 다리 돌파하여 네프스키 대로 행진.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도 합류. 슬로건은 주로 '빵을 달라'. 파업 참가자는 약 13만.

2월 24일. 파업이 다른 구역으로 확대. 21만여 명이 파업에 참가하고 학생들도 개별 참가. 카자크[7] 기병이 출동했음에도 네프스키 대로에서 시위 관철. 슬로건은 '빵'이외에도 '전쟁 반대', '전제 타도'까지 나타남.

2월 25일. 파업이 전 도시로 확대되어 총파업 시작. 30만여 명이 파업 참가. 신문도 안나오고 전차도 운휴. 대학과 전문학교가 수업 거부 돌입. 시위대와 군경의 충돌 격화. 노동자들도 무기 사용. 카자크 병사가 시위대와 함께 경찰을 습격해 경찰서장 살해. 군대의 발포로 4명 사망. 슬로건은 '전제 타도'였고 '노동자 소비에트 만세!'도 등장. 비보로크 지구의 전 경찰서가 파괴되고 경찰관 모두 도망. 26일 새벽까지 100여명 체포.

2월 26일(일요일). 오전은 평온했고 낮부터 시위 재개. 군경이 시위대에 사격해 다수 사상. 파블로프스키 연대 4중대가 시위대 발포 저지 위해 네프스키 대로로 향함. 병영으로 돌아와 반란을 선언했으나 다른 연대 병사들에게 무장해제 당함.

2월 27일, 볼린스키 연대 교도대, 하사관 지휘하에 출동명령 거부하고 장교 살해 후 반란 선언. 근위보병 2개 연대와 공병 제6예비대대도 반란 가담. 병사들이 감옥과 구치소 해방시키고 정치범 3,358명 석방, 재판소 불타고, 시위대가 무기고에서 소총 4만정, 권총 3만정 탈취. 오후 3시경 비보로크 지구의 모스크바 연대, 저녁때 장갑차 부대, 밤에 시 남부 3개 연대가 반란 가담. 총 6만 6,700명이 반란 가담. 페트로그라드 군관구사령관 하바로프, 진압부대 편성해 출동했으나 도중 해체.

대중들의 열망으로 혁명을 완수할 기구가 시급히 조직되었다. 27일 저녁, 타브리다 궁전에서 공장과 군대에서 선출된 대표가 모여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대표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3월 초, 구성이 완료된 소비에트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하였다.[8] 3월혁명의 성공은 제정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 한 달도 되지 않아 전국의 모든 현과 군에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구성되었다. 공업지역에서 소비에트는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혁명 수호를 위해 적위대를 조직했으며, 차르 정부의 판사는 파면되고 인민판사를 뽑았다.

소비에트와 더불어 자본가와 지주 세력을 기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27일 밤, 두마는 임시위원회를 선출하고 위원회의 수도의 질서확립을 요청했다. 또한 위원회는 전선에 나가있던 니콜라이 2세에게 대표단을 파견해 황태자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에게 재위를 양위하고 퇴위할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아들의 혈우병을 염려한 차르는 3월 2일 동생인 미하일 대공에게 양위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하일 대공은 사태의 위중함을 파악하고 재위 계승을 거부하면서 3월 4일에 공화국이 선포되어 304년 로마노프 왕조제정 러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편, 두마 임시위원회와 소비에트의 협정하에 3월 2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입헌민주주의자로서 젬스트보[9]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르보프가 정부수반이 되었으며 후에 카데츠라고 불리는 입헌민주당[10]과 10월당[11]이 임시정부의 세력을 잡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로서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유일하게 개인자격으로 입각했다. 이리하여 신생 러시아 공화국에는 임시정부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의 소위 이중 권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소비에트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셰비키들은 '2단계 혁명론'에 따라 부르주아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양도했고 임시정부도 소비에트의 승인 없이는 중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집행 할 수 없었다.

3월 혁명의 성공으로 인한 러시아 민중의 반응은 그야말로 고무적이었다. 300년동안 민중을 억압했던 차리즘이 불과 2, 3주 사이에 사라졌고 사람들은 완전한 자유를 만끽했다.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가르쳤고 학생들이 교수에게 강의를 주문했다. 문화계도 혁명의 영향으로 배우들의 극장을 인수해 대본을 직접 선택하는가 하면 극장을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 동안 차리즘에 억눌린 민중의 목소리가 봇물터지듯 쏟아졌다. 훗날 케렌스키는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2월에서 10월 사이에 혁명은 밀물이 되어 우리는 그것을 중지시킬 수도, 통제할 수도 없었다.

5 2월 혁명 이후

차르가 없어지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민중들이 보기에 근본적인 문제점을 해결되지 않았다.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굶주림과 기아는 여전했다. 노동자는 여전히 착취당했고 토지는 지주들의 손아귀에 있었으며 소수민족들에 대한 탄압도 여전했다. 이를 해결해야 하는 것은 자본가와 자유주의자들로 구성된 임시정부였지만 이들은 이 문제는 해결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 생각에 계속되는 전쟁은 임시정부의 자본가로서는 오히려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고 군의 위계질서를 확립해 반란을 방지할 수 있었으며 전후 세계질서 재편을 고려해 서유럽과 연대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더욱 유리했다. 결국 임시정부는 차르가 연합국과 맺은 모든 조약을 인정하고 최후의 승리까지 전쟁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기까지 이른다.반동이다!!!

이제 민중들의 열망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소비에트 뿐이었지만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로 구성된 소비에트는 본연의 임무를 저버리고 임시정부의 충실한 딸랑이가 되있었다. 일단은 부르주아를 도와 민주주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인민이 권력을 잡는 공산주의 혁명은 그 다음 이라는, 이른바 '2단게 혁명론'에 너무나 충실히 따른 것에 대한 결과였다. 민중들은 점차 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에서 멀어졌고, 다시 그들만의 군위원회와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농민위원회를 만들었다.

3개의 사회주의 정당 중 가장 소수였던 볼셰비키만이 이러한 민중의 불만을 간파했다. 그들은 임시정부와의 협력에 반대하고, 전쟁반대와 평화조약 체결, 공산주의 혁명을 주창했다. 그러던 중 스위스에서 망명 중이던 레닌이 러시아 후방전선의 교란을 목적으로 한 독일의 지원으로 4월 3일 귀국했다.[12] 그는 페트로그라드 핀란드 역에서 민중의 환호를 받으며 연설을 했다.

사랑하는 동지, 병사, 노동자 여러분! 혁명을 승리로 이끈 여러분이 무척 기쁩니다. 여러분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 군대의 전위 입니다. 강도들의 제국주의 전쟁은 전 유럽 내전의 시작입니다. 머지않아 유럽의 자본주의는 깡그리 무너질 것입니다. 러시아 혁명은 그 시작입니다. 전 세계의 사회주의 혁명 만세!

다음 날, 레닌볼셰비키 집회에서 그 유명한 4월 테제[13]를 발표하였다.

1. 게속되고 있는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이 반대하고 즉각 평화를 실현한다.
2. 부르주아에게 권력을 넘긴 1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이 권력을 장악하는 2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3. 임시정부를 지지하면 안된다.
4. 소비에트의 권력을 확대해야 한다.
5. 의회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
6.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 국유화 한다.
7. 모든 은행은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는 국립은행으로 통합한다.
8. 생산과 분배는 소비에트가 통제한다.
9. 당 대회를 소집하여 강령을 바꾸고 당명은 공산당으로 바꿔야 한다.
10. 새로운 국제혁명조직으로 제3인터네셔널을 창설해야 한다.


연설하는 레닌

4월 테제는 러시아 전역을 뒤집어놓았다. 부르주아는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고 주장했고, 멘셰비키는 레닌이 반동에 봉사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플레하노프는 대머리가 잠꼬대를 한다고 비꼬았다. 같은 볼셰비키 내에서도 큰 반향이 일었다. 카메네프 등 당에 많은 지도자들은 러시아가 아직 사회주의의 토대가 갖추어지지 않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주장이 임시정부 타도로 해석되어 당국에게 체포되는 게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의 말빨과 인맥으로 4월말, 볼셰비키 협의회는 레닌의 4월 테제를 공식입장으로 채택한다.

6 7월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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곪을대로 곪은 임시정부와 민중 간의 갈등은 전쟁 문제를 계기로 폭발했다. 4월 18일, 노동자들은 즉시 강화의슬로건은 내걸고 대규모 집회를 벌였고 같은날 임시정부의 외무장관 밀류코프는 연합국들에게 차르 정부가 체결한 조약을 지킬 것이며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할 것을 통보했다.(...)아아 좋은 반응이다 4월 20일, 이러한 사실이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알려지자 깊은 빡침을 느낀 민중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임시정부 타도', '밀류코프 타도'를 외치며 규탄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한 임시정부의 돌파구는 하계공세를 취하는 것이었다.(...)노이즈 마케팅이냐? 연합국들의 요청도 있었지만 공세를 성공시킴으로써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이중권력을 소멸시켜 부르주아 권력을 수립한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전 분위기가 매우 심각해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고 6월 18일이나 되서야 서남 방면군에서 하계 공세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성공하는가 싶었지만 7월 6일, 독일군의 역공에 4만명의 사상자만 낸 채 임시정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하계공세는 참패로 끝났다.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이런 임시정부의 뻘짓에 민중들은 더욱더 깊은 빡침(...)을 느껴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발트함대, 리가. 민스크, 톰스크 등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를 따르지 않은 세력들이 점점 늘어났다. 우크라이나 의회인 '라다'와 핀란드의 의회인 '세임'이 자치 움직임을 보이는 등의 민족 문제도 첨예화됐다.

결국 참다 못한 민중들은 7월 3일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연대의 일부를 전선으로 파견하라는 임시정부의 명령에 저항하고 있던 페트로그라드 제1기관총 연대의 무장봉기가 그 시작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소비에트 중심의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연대 총회에서는 이를 위해 볼셰비키 당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다른 부대와 공장에 대표를 파견해 함께 행동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많은 부대와 공장이 적극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정작 볼셰비키는 이러한 무장봉기에 회의적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분명히 노동자와 병사들이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장악할 힘을 갖고 있었으나, 전국의 민중 대다수가 아직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따르고 있어 권력을 유지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 중앙위는시위 자제를 결정했으나 민중들은 이미 볼셰비키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3일 저녁 7시, 기관총 연대를 선두로 대규모 무장시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수도의 각 부대와 노동자도 시위에 가담했다. 시위대가 볼셰비키 본부인 크세신스카야 저택에 도착했고 스베르들로프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자제를 호소했으나 그들에게 돌아온 시위대의 대답은 꺼져(...) 였다. 시위대의 완강한 입장에 볼셰비키는 굴복하여 부득이 방침을 변경했다. 타브리다 궁까지 행진하여 대표를 통해 우리의 요구를 전달하자는 볼셰비키의 제안이 시위대에게 전달되었고 시위대는 이에 동의했다. 시위대는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밤 10시경 소비에트 본부인 타브리다 궁에 도착했다. 밤 12시경에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집행위와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5시간 이상 게속된 회의에서 시위대에 대한 압력행사에 거부의사를 밝히면서 '소비에트 권력 반대' 결의가 채택되었다. 한편, 다른 방에서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 등의 혁명파 합동회의에서는 4일에 다시 시위를 전개로 결의했다.

7월 4일 아침,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중앙은 무장시위 금지하라고 경고하며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휘하의 모든 부대에 질서회복에 착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정부를 지지하는 군대는 카자크 병연대와 사관학교 생도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결국 정부는 전선 사령부에 파병을 요청하기까지 이른다. 반면 시위대는 오히려 세력이 크게 늘고 있었다. 크론슈타트에서 1만여명이 배를 타고 도착하는 등 수도 근교로부터 병사와 노동자가 밀어닥쳐 시위대는 50만을 넘었다. 그러나 더이상 판이 커지는 것이 두려웠던 볼셰비키가 시위대를 설득[14]하는 바람에 7월시위는 허무하게 종결되었다.시작은 장대했는데 끝이 뭔가 빈약하다? 한편, 수도의 시위에 자극받아 지방에서도 봉기가 발생했다. 발트함대, 핀란드, 리가, 이바노보 등지의 많은 소비에트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를 외쳤고 많은 곳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지방은 아직까지 전체적으로 혁명파보다 타협파가 우세했기 때문에 봉기는 더이상 확산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 힘을 얻은 임시정부와 타협파가 반격을 개시했다.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은 레닌이 독일의 첩자라 주장했고 중립적이었던 이에 동조한 몇몇 부대가 임시정부에 붙었다. 전선에서도 정부에 충성하는 군대가 도착했다. 7월시위 이후 볼셰비키에 대한 임시정부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7월시위에서 볼셰비키의 세력이 예상보다 강력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본부가 점령되었고 당 기관지 <프라브다>의 발행이 금지되었다. 시위에 적극 가담한 노동자의 집이 수색당했고, 반란에 가담한 부대가 해체되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에게도 수배령이 내려저 레닌과 지노비에프는 지하로 피신했고, 카메네프, 트로츠키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볼셰비키의 세력은 줄지 않았다. 오히려 4월에 8만이었던 당원이 8월엔 24만이 되는등 탄압과 비례하여 세력이 더욱 늘어났다.

7월 시위와 그 후의 탄압은 러시아의 세력관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제 자유주의자들과 연합해 혁명읕 탄압하는 마치 '차르'와 같은 존재로 변해있었다. 민중들은 이제 임시정부를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고 뒤이은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로 임시정부는 완전히 민심을 잃게 된다.

7 케렌스키 내각과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라브르 코르닐로프

7월 시위 이후, 농업문제 등에 관한 노선의 차이로 제1차 연립정부는 붕괴했고, 7월 24일 제2차 연립정부가 설립되었다. 사회혁명당 극우파의 리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새로운 수상이 되었고, 사회주의자 7명, 자유주의자 8명이 각료로 취임했다. 신임수상 케렌스키에게 비상대권이 주어졌고, 입헌민주당의 요청으로 내각은 소비에트의 통제로 부터 자유로워졌다. 혁명과 완전히 관계를 끊은 케렌스키는 이제 부르주아만의 길은 가기 시작했다. 서유럽의 민주정치에 심취한 각료들은 몸짓과 스타일까지 서유럽을 모방했고, 권위에 대한 복종을 내세우며 민중의 혁명적 요구를 묵살했다. 민중의 요구는 제헌의회 구성 뒤로 미루어졌고, 그 구성 시기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다. 민중들의 마음이 임시정부를 떠나고 있는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7월 26일부터 열린 제6차 당대회에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을 철회하고 무장봉기를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소비에트가 우경화된 지금, 오로지 무장봉기만을 통해 권력을 쟁취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즉각 행동하지는 말고 민중들이 좀더 임시정부에게 멀어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혁명파와 부르주아,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의 대립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라브르 코르닐로프가 크게 부상했다. 그는 7월 18일 최고사령관에 오른 후 군사독재를 향한 발걸음을 본격화했다. 군사령관과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 대다수가 그를 지지했다. 8월에 들어 코르닐로프는 군사동원을 개시하며 군대의 일부를 수도 주변에 집결시키고 자파에 있던 주력부대를 훈련시켰다. 8월 11일의 각료회의에서는 '후방에서의 사형 부활', '지휘관 권한 회복', '병사위원회 권한 제한' 등을 포함하는 코르닐로프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 내각을 끌어내리고 과거로 회귀하기 위한 독자행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8월 25일 코르닐로프는 기병 제3군단을 전선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동시켰다. 군단장은 수도와 인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8월 26일,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즉시 자리에서 물러나고 모든 권력을 최고사령관에게 넘기라는 최후통첩을 띄웠다. 이것이 쿠데타임을 직시한 케렌스키는 즉각 코르닐로프군을 반란군으로 선언하고 소비에트와, 심지어 볼셰비키에까지 도움을 요청했다. 코르닐로프의 부대는 즉각 수도를 향해 진격했다. 소비에트 지도부와 사회혁명당, 멘셰비키들을무시할땐 언제고 민중들에게 임시정부의 방위를 호소했다. 볼셰비키도 민중들에게 반혁명 분쇄투쟁에 일어서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것이 임시정부를 지키기 위한 것도 아니고,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위한 것도 아님을 강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쨌든 민중들은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그 결과 코르닐로프가 보낸 전신이 그의 부대에 전달되지도 못했고 반란군이 탄 기차는 철도 노동자들의 방해로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민중들에게 간단히 진압되고 말았다. 9월 1일에는 코르닐로프와 공범들이 체포되면서 반란은 완전히 종결되었다.안습

코르닐로프의 반란 이후, 민중들은 부르주아와 타협파 사회주의자들의 무능함과 혁명을 타도하려는 세력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정부가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점도 깨달았다. 그 결과 민중들 사이에서 전쟁반대와 혁명적 투쟁을 계속해온 볼셰비키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민중들은 소비에트의 타협파 대의원들을 소환하고 그 자리를 볼셰비키로 대체했다. 8월 31일, 창설이래 처음으로 볼셰비키가 다수를 이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즉시 강화, 지주토지의 몰수, 노동자에 의한 생산통제,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 등을 주장하는 볼셰비키의 결의를 채택했다. 9월 5일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도 같은 결의를 채택하였다. 그밖의 많은 도시에서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 무렵 러시아 경제는 점점 더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연료난과 원료부족으로 공장의 가동이 멈추고 식량난도 극심해졌다. 이 모든것이 부르주아와 지주로 이루어진 임시정부때문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을 공장을 장악하여 직접 관리를 하고 농민들은 전투적이게 변해 지주를 추방하고 스스로 토지를 재분배했다. 유럽 러시아의 절반 이상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군대도 동요해 지휘관을 추방하고 직접 지휘관을 선출했으며, 전쟁을 계속 거부했다. 한편, 민중의 혁명화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분열은 더욱 극심해졌다. 마르토프등의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들은 볼셰비키에 점점 가까워졌고, 사회혁명당 좌파세력은 독자행동을 선언하며 기존의 사회혁명당에서 완전독립을 선언했다. 정세는 볼셰비키에게 전적으로 유리해 졌고 민중들은 한마음으로 볼셰비키 중심의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기를 바랐다.

또 한번의 혁명이 일어날 모든 준비가 끝났다.

8 10월 혁명


적위대의 모습

코르닐로프의 반란 와중 제2차 연립정부는 와해되었다. 케렌스키는 9월 1일 5명의 각료로 총재정부를 구성하였다. 총재정부는 정식으로 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하고 두마를 공식 해산하는 등 형식적으로 양보를 하는 한편 '반혁명 분쇄 투쟁위원회'의 해산, 군대 내의 정치투쟁 중지 등을 명령하며 고양된 민중운동을 억압하려 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된 민중들은 통제되지 않았고 민중의 혁명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것을 느낀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민중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카데츠가 참가하는 새정부에 입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볼셰비키는 두 정당에게 부르주아와의 연대를 끊고 좌파끼리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으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모든 세력의 통일'을 주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벗어난 소비에트를 공격하고 소비에트를 대신하여 '전 러시아 민주세력 협의회'를 소집했다. 또한 이제는 아예 대놓고부르주아와 지주의 조직인 젬스트보와 시 두마의 대표권을 늘리고 공장 위원회, 군 위원회, 노동조합의 의석수를 삭감했다.

9월 25일 케렌스키는 다시 카데츠와 타협파 사회주의 정당의 지지를 얻어 제3차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정부는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가 대거 참여하는 '공화국 임시의회'를 선출하였다. 당연히 민중들의 불만을 갈수록 높아졌고 민중들은 이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소비에트권력 수립을 원하고 있었다, 10월 초, 이러한 정세를 파악한 레닌은 지금이 무장봉기를 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10월 10일과 10월 16일에 열린 볼셰비키 중앙위와 확대중앙위는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장봉기를 통한 권력장악과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재차 확인했다. 레닌은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는다면 역사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파를 억눌렀다. 10월 12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트로츠키의 주도 하에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수도와 혁명을 방지한다는 명분으로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어서 봉기 지도부인 군사혁명중앙이 구성되어 당 군사조직과 함께 군사혁명위원회와 힘을 합쳤다. 이제 봉기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반혁명파의 거점은 페트로그라드 중심부에 있었다. 임시정부는 겨울궁전에 있었고, 그 바로 옆에는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총사령부와 해군성이 있었다. 혁명파의 사령부는 시의 동쪽 변두리의 귀족 여학교인 '스몰니 학원'이었다. 이곳에는 군사혁명위원회,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볼셰비키 당중앙이 있었다. 혁명파의 주력부대는 셋이었다. 적위대는 북쪽과 동쪽과 남쪽에서 시의 중심부를 포위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의 혁명파 부대는 그 안쪽에서 제2의 반원을 형성했다. 서쪽에서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요청으로 발트해 함대가 네바강 하구를 장악했다. 혁명파의 노동자와 육군과 해군은 합동으로 페트로그라드를 포위해 차단했다가 일시에 공력, 점령할 계획이었다. 트로츠키는 혁명을 시작하며 다음과 같이 외쳤다.

우리 앞에는 진정한 인민의 정부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 역사가 빗자루로 쓸어내 주기를 바라는 무력하고 가엾은 정부가 있다.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을 조직하여 전국에서 행해진 작업을 마무리 지을 것이다. 만약 정부가 등 뒤에 칼을 꽂으려 한다면, 우리는 반격으로 대응할 것이다. 타격에는 타격으로, 철에는 강철로!

10월 24일 밤, 레닌의 지시로 즉각 행동이 개시 되었다, 중앙전신국, 우체국, 전화국, 주요 역이 혁명군에게 장악되었고 25일 저녁까지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제외한 반혁명파의 모든 거점이 분쇄되었다. 마침내 26일 새벽 2시, 겨울궁전이 점령되면서 혁명은 완료되었다. 25일 밤, 스몰니 학원에서 열린 제2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는 임시정부가 타도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가 장악했음을 선포했다. 26일에는 <평화에 대한 포고>와 <토지에 관한 포고>가 발표되어 즉시강화와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약속했다. 대회는 전 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를 새로 선출하고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라 할 수 있는 인민위원회를 창설했다, 레닌이 인민위원장이 되었고 트로츠키는 외무, 미래의 숙청왕스탈린은 민족인민위원직을 맡았다. 중앙 집행위장에는 스베르들로프가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세계최초의 공산주의국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레닌을 연설을 통해 혁명의 성공을 기념했다,

소비에트 권력이란 무엇인가? 국민 대다수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 새로운 권력의 본질은 무엇인가? 점점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이 권력의 본질은 부자들과 부르주아들이 독점하던 국가 경영이 이제는 처음으로 억압받고 박해당하던 계급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모스크바를 제외하고 혁명은 희생자를 거의 내지 않고 막을 내렸다. 실제로 당시의 페트로그라드는 조용했으며, 겨울 궁전 등의 정부 시설을 접수하는 과정에서 극소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뿐 혁명 자체는 비교적 평화롭게 끝났다.[15]

8.1 11월 혁명 이후

혁명은 성공했지만 소비에트 정부의 기반은 아직 취약했다. 농촌에서는 농민 대다수가 아직도 사회혁명당을 따르고 있었고 도시에서는 적지않은 민중들이 소비에트가 정부의 역할까지 맡는다는 것에 매우 생소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망친 케렌스키와 타협파 정당들은 즉각 반격을 개시했다. 케렌스키는 반혁명파 카자크 부대를 이끌고 수도로 진격했다. 사회혁명당 우파와 멘셰비키는 사관생도들을 선동,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혁명의 성공으로 사기가 충만한 볼셰비키에게 이들을 11월 말에 모두 분쇄되었다.

노동자와 빈농, 병사들의 지지를 받으며 소비에트 정부는 사회의 공산주의적 개조에 착수했다. 공산주의적 생산과 인민경제 관리를 위해 인민위원회 산하에 '최고인민경제회의'가 창설되었고, 지방에서도 각급 국민경제회의가 만들어졌다. 남아있던 봉건제의 유물도 일소되었다. 지주 소유의 토지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러시아 주민이 인민이 되었다. 학교는 교회에서, 교회는 국가에 분리되었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다, 11월 2일 공포된 <러시아 내 모든 민족의 권리선언>은 러시아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평등권을 법령으로 확립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인민의 경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도 힘을 쏟았다. 노동자들에게 식량이 우선 공급되었고, 그들은 지하실과 가건물에서 나와 부르주아와 지주 소유였던 좋은 집으로 몇 가족씩 합쳐 이주했다.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고 노동조건도 개선되었으며, 산업재해와 실업에 대한 보험법도 발표되었다. 학교교육과 의료서비스도 모두 무료로 제공되었다. 차르의 궁전과 부호의 대저택은 인민의 집회장, 요양소, 박물관이 되었다.

또한 소비에트 정부는 임시정부가 예전에 약속한 제헌의회 설립을 예정대로 이행하기로 결정했다. 11월 혁명 이후에도 제헌의회 설립은 여전히 민중, 특히 농민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소비에트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지지도를 확보려고 노력했다. 민중들에게 의회제도가 얼마나 비효율적인지 직접 체험하게 하려는 것도 이들의 의도였다. 11월 12일, 20세 이상 모든 남녀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보통, 평등, 비밀, 직접의 원칙에 따라 제헌의회 선거에 참여했다. 그 결과 사회혁명당이 40% 득표로 제1당, 볼셰비키가 24%로 제2당이 되었고 나머지 표는 기타 듣보정당이 나누어 가졌다. 볼셰비키는 대도시, 공업 중심지, 군주둔지에서 지지를 얻었고 사회혁명당은 농촌지역에서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반혁명 세력은 제헌의회를 통해 다시한번 설욕전을 준비하려 하였다. 사회혁명당 우파의 체르노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헌의회 지도자들은 제헌의회를 소비에트 권력과 대치시켜 모든 권력을 제헌의회로!라는 슬로건을 내놓았다. 이에 대해 소비에트는 의원의 소환권을 도입하고, 제헌의회에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제헌의회를 둘러싸고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이견이 표출되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소비에트를 혁명의 기둥으로 삼아 제헌의회를 견인하여 혁명과업을 이루어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레닌은 소비에트가 제헌의회보다 백배 천배 민주적인 제도라며 제헌의회가 결코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1918년 1월 4일, 소비에트 중앙집행위는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채택했다.

1. 러시아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소비에트공화국 이다.
2.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유로운 민족의 자유로운 연합의 토대 위에 세워질 것이다.
3. 소비에트 국가의 기본과제는 인간에 의한 착취 폐지와 사회주의 건설이다.
4. 평화와 토지와 민족해방에 관한 대중들의 열망을 즉시 실현할 것이다.

1월 5일, 제헌의회가 소집되었고 중앙집행위 위원장 스베르들로프가 위의 선언을 인준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제헌의회의 다수파인 우익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볼셰비키들의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 제헌의회는 제안을 거부하고 사회혁명당 우파가 마련한 별도 법안의 심의에 들어갔다. 17시간의 토론 후 의회는 휴회했지만 중앙집행위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제헌의회의 해산을 명령함으로서 제헌의회는 단 하루만에 사라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대중들은 의회해산에 무덤덤하게 반응했지만 의회의 활동을 기대했던 일부 소시민과 지식인들은 볼셰비키의 조치에 수긍하지 못했다. 사회혁명당 좌파를 제외한 모든 사회주의 정당들은 볼셰비키에 등을 돌렸으며 일부는 적백내전때 볼셰비키에게 총부리를 겨누기도 했다.

제헌의회 해산 직후 열린 제3차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농민 소비에트 통합대회는 제헌의회에 대한 정부의 정책과 <피착취 근로인민의 권리선언>을 승인하여 마침내 볼셰비키가 권력을 확고하고 잡게 되었다.

9 파장의 확산

이후 레닌은 독일에게 유리한 협정을 맺으며 사실상의 항복을 한다.[16] 독일은 레닌을 지원하며 노린 것을 이뤘다. 그러나 이 시점에 독일의 전세도 이미 호전시키지 못 할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이미 독일은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 부족이 심각했고, 영국의 끈질긴 노력 끝에 미국이 참전하면서 더 못 견딜 낭떠러지로 밀려났다. 1918년 독일 해군의 반란으로 독일 11월 혁명이 일어나 독일 제국은 항복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뒤 러시아 내부에서 반볼셰비키 세력이 다시 규합해 적백내전이 일어났고 연합군도 반 볼셰비키 세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미 전쟁에 질렸고 러시아 민중들이 공산정권을 지지했기에, 끝내 볼셰비키가 승리하여 소련을 건국한다. 한편 볼셰비키는 내전기 중 백군의 구출 계획을 듣자 퇴위 뒤에도 살아남았던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을 총살시켰다.

러시아의 공산혁명은 반자본·반제국을 외쳤고 지배세력을 타도했다는 이미지 때문에 서유럽 내 사회주의 세력들에게는 물론 당시 열강의 침략에 신음하던 나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소련도 제국주의 침략에 신음하는 국가들이 공산주의가 퍼지기 좋은 환경임을 알았다. 따라서 이들 국가에 반제국주의·반침략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명목으로 공산주의를 알려, 전세계에 공산주의가 퍼져나갔다. 실제 여러 방법으로 지원했는데 민족주의 운동에도 상당한 지원을 뒷받침했다. 당장 우리나라에 왜 1920년대를 전후로 사회주의가 퍼졌나 생각하면 쉽다.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실체가 3.1 운동의 실패로 명백히 드러난 뒤라 열강에게 실망감이 늘었다. 이 때 소련이 직접적으로 반제국주의 운동을 지지할 뿐더러 직접 지원까지 한다는데, 당연히 지지하는 사람이 나온다.[17] 당장 쑨원만 해도 국공합작을 지지했으니... 이런 분위기는 해방 직후까지 이어진다.
  1. '옵시나'라고 불리던 러시아 고유의 농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농민을 바탕으로 한 혁명을 주장하며 농촌 계몽을 위해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참고로 1881년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한 것도 이들이다.
  2. 멘셰비키가 되어 레닌의 볼셰비키와 대립하게 된다.
  3. 레닌의 부인
  4. '불꽃' 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5. 1907년에는 지주의 1표가 대자본가의 4표, 중산층의 65표, 농민의 260표(!!), 노동자의 540표(!!!)에 해당되게 변경되어 더욱더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6. 당시 러시아 최대의 금속 공장
  7. 카자크와 카자흐는 다르다. 카자크 참조.
  8. 병사들 사이에선 사회혁명당이, 노동자들 사이에선 멘셰비키가 주로 선출되었다. 농촌 출신인 병사들은 사회혁명당의 오랜 뿌리와 포괄적인 주장에 친근감을 느꼈고, 노동자들은 볼셰비키의 전투성보다 느슨하고 부담없는 멘셰비키에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9. 제정 러시아에서, 1864년의 개혁으로 설치된 지방 자치 기관. 중앙 정부의 감독 아래 주(州), 군(郡) 단위로 구성되어 토목, 위생, 교육, 경제 등의 문제를 맡아보다가 러시아 혁명 후 없어졌다.
  10. 차르의 복위를 주장하는 왕정복고파, 입헌민주주의파, 자유주의 공화파, 그리고 서구적 헌정을 추구하는 지식인 계층의 연합이었다. 2월 혁명 이전 차르가 통치할 때는 개혁파 야당으로, 혁명 이후 임시정부가 성립되면서는 보수파 여당의 위치를 담당했으며 반볼셰비키파의 핵심이 된다.
  11. 입헌민주당보다 약간 더 보수적인 정당으로, 입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입헌군주정 구축을 추구했으며 당내 좌파는 당적만 다를뿐 실질적으로 입헌민주당원이었다. 주로 거대 자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12. 레닌의 실질적 의중은 독일의 의도와는 정반대에 있었다. 독일의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레닌은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에 탑승한다. 하지만, 독일의 의도는 분명했기에 사회혁명당과 맨셰비키는 레닌에게 독일의 첩자라는 누명을 씌우며 공격했다.
  13. 원제는 <당면 혁명에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임무>
  14. 아직 때가 아니니 힘을 좀더 기르자고 했다.
  15. 실제 혁명 당시에 죽은 사람보다 당시 상황을 그린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대작영화 10월 촬영시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는 말까지 있다.
  16. 그 당시 러시아 영토였던 동유럽 지역을 몽땅 빼앗겼다. 핀란드,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등.
  17. 심지어 1920년 제 2차 코민테른 대회때는 조선인 대표들이 참가하여 당시 사진을 보면 태극기가 떡하니 등장한다.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