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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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믿음이 가는 사람이 가장 먼저 의심받아야 될 사람이다.

- 이오시프 스탈린[1]

레닌이 오래 살았다면 그도 감옥으로 갔을 것이다.

- 블라디미르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룹스카야가 1936년 8월의 모스크바 재판을 방청한 후 남긴 말이다.[2]

"붉은 군대의 베테랑들을 다 없애버린게 네놈 아니냐? 네가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여버렸잖아!"

-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자신을 비난하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3] 내뱉은 말.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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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 당시의 희생자들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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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 당시에 작성된 스탈린의 숙청 대상자 목록.[4] 이 노트에 이름이 적힌 사람은 스탈린에 의해 숙청당한다.소련판 데스노트 ㄷㄷ

스탈린의 이 행동이 뻘짓인지 아닌지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인 영역이다(하지만 소련은 유능한 군사 지휘자들을 잃기도 했다.). 또한 스탈린의 역할에 대해서도 그렇다. 주도적인 위치를 담당한 니콜라이 예조프의 이름을 따 예조프시나(Ежовщина)[5]라고 불린다. 영어로는 Great Purges, Great Terror 등으로 불린다.

공식적 사상자는 총 681,692명이지만 실제로는 최대 200만명 이상이 처형당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죽지는 않았지만 고문이나 시베리아 유형 등으로 고통받은 인원은 이보다 훨씬 많다.[6]

1935년~1938년 사이의 기간 동안 정치, 경제, 국방 등 소련 각계에서 스탈린과 좀 덜 친하다 싶은 사람들이 모조리 쓸려나갔던 사건. 그러나 본격적인 숙청의 해일은 37년 초~38년 초까지라고 봐야할 것이다.


왼쪽부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원수(당시 국방장관이라고 할 만한 국방인민위원장), 몰로토프(당시는 인민위원회의 의장, 후에는 외무장관이라고 할 만한 외무인민위원장), 스탈린, 예조프. 제일 작은 땅꼬마가 니콜라이 예조프. 일명 피의 난쟁이로 불렸으며, 키가 163cm인 스탈린 보다도 머리 하나가 작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51cm.[7]


그러나 이 숙청의 주도자였던 니콜라이 예조프조차 숙청당했다. 숙청된 뒤 저 사진에서 바로 삭제된다.

이 숙청이 얼마나 막장스러웠는가 하면, 이 시기에 숙청을 주도한 NKVD의 수장부터 두 명이나 숙청당했다. 초기 대숙청을 주도했던 겐리흐 야고다는 1937년에 체포돼 1938년 처형되었고, 그 뒤를 이은 니콜라이 예조프도 1938년 11월 실각한 이후 1년 만에 체포돼 1940년 2월 처형당했다. 물론 부장들만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부장이 바뀔 때마다 전임요원들 대부분이 숙청되었다. 그러니까 오늘의 숙청자는 내일의 피숙청자가 되었던 것이다. 다만 피라미 요원들의 경우는 굴라그에 이송돼서 짧게 형을 살다가 굴라그 간수로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평생 거기서 썩어야 한다는 점에서 좌천 및 귀양이라고 봐도 되는 것. 물론 고위인사는 얄짤없이 총살형이었다.

처음에는 당 내의 스탈린 반대파들이 걸려들었다.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부하린레닌과 함께 혁명을 이끈 고참 볼셰비키들이 대부분 처형되거나 체포되기 전 자살했다. 그 다음에는 이 숙청이 사회 전반에 이르렀고 학계, 예술계, 관리계급 등에까지 확산되었다. 일단 누가 반혁명분자로 고발하거나 혹은 정보기관의 의심을 사면 살아남기 힘들었다. 바로 끌려와 고문당하면 죄가 없어도 자기의 죄를 불고 약식재판[8]을 거쳐 처형되거나 혹은 시베리아굴라그로 끌려갔다.[9] 이러한 과정에서 죽은 사람의 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소련 정부가 밝힌 처형자 수만 60만명 가량이다.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던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때 나온거니 대체로 축소되지는 않았을거라는 주장도 있으나, 흐루쇼프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였다. 당장 NKVD가 굴라그 등의 문제와 엮여있었고,대숙청 기간간의 소수민족 박해를 인정하면 소수민족간의 분란이 있을수 있어 어쩔수 없이 적당히 걸러서 발표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굴라그에 끌려간 사람은 수백만. 물론 실제로 그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게 정설이다. 예조프가 벌인 이런 마구잡이 숙청은 많은 인재를 유실시켜 소련의 국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고, 예조프는 이 때문에 스탈린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실각당하고 처형된다. 오죽하면 나중에 NKVD에서도 인력이 부족해서 당원이 아닌 사람을 데려다가 쓰곤 했다.

1.1 소수민족 박해

그리고 이때 소련 각지에 산재해 있던 소수민족들이 상당수 박해받았다. 소수민족 전체가 반혁명세력으로 낙인찍힌 경우도 있었으며 가장 대표적인 게 연해주에 있던 고려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추방시켜 버린 사례였는데 그게 보통 여행이 아니었기 때문에 역을 지날 때마다 시체가 쌓였다고 한다.[10] 참고로 대숙청 기간에 희생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도 꽤나 많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무장 항일 투쟁의 거목이라 할 수 있는 김경천 장군과 초창기 한국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선구자 격이라 할 수 있는 박진순 등을 비롯해 조선공산당 당원이었고 박헌영과 막역한 사이였던 김단야와 그의 아내 주세죽도 이 시기 일본의 첩자로 몰려 사형당한다. [11] 김단야의 아내 주세죽은 원래 박헌영과 결혼한 뒤 소련으로 망명하여 박헌영은 국제 레닌대학(당시 국제 혁명가들을 양성해 내는 최고의 대학),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당시 국제 혁명가 및 활동가를 양성해내는 대학)에 다닌 뒤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재건에 대한 지시를 받고 상해로 이주한다. 상해에는 김단야가 먼저 와 있었고 이 세 명은 상해 조계지를 근거로 활동했지만 얼마 안 가 일본 밀정에 의해 박헌영이 검거된다. 박헌영이 옥신각신하며 시간을 버는 사이 김단야와 주세죽은 상해를 탈출하여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때가 1933년이었다. 그리고 김단야와 주세죽은 박헌영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재혼했으며 바로 몇 년 뒤 대숙청에 휘말려서 김단야는 사형, 주세죽은 모스크바 추방 및 카자흐스탄 5년 유배에 처해지게 된다.

그 밖에 체첸, 잉구시인, 폴란드인, 유대인 등을 비롯한 수많은 소수민족이 당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탄압을 받았다. 중앙아시아로 통째로 강제이주를 가서 생판 만날 일이 없는 체첸인과 우크라이나인과 고려인과 위구르인들이 거의 비슷한 동네에 사는 엽기적인 일도 벌어졌다.

2 대숙청에 대한 전통주의적 시각

전통적인 해석은 두 방향이 존재하는데, 각각 한나 아렌트 이래로 시작한 "전체주의론"[12]에 입각한 대숙청 해석과 소련 공산당에서 내놓던 관제 역사 서술이 그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전통주의적 시각은 대체로 토탈리태리언의 시각을 의미한다.


세르게이 키로프(러시아어 : Серге́й Миро́нович Ки́ров)
(1886년 3월 27일 ~ 1934년 12월 1일)

전통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대숙청은 스탈린의 과격한 정책이 빚어낸 사회 모순으로 발생한 불만세력을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스탈린이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분쇄하고 절대권력을 구축하고자 한 시도로 평가된다. 이에 따르면 농업정책 실패와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인해 스탈린의 인기가 땅에 떨어졌고, 그 대안으로 떠올랐던 인물이 레닌그라드 공산당 지도자였던 세르게이 키로프였다. 세르게이 키로프는 굉장히 인기가 많았는데 1934년 당 대회의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선거에서 나온 반대표가 단 3표[13]일 정도로 원만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탈린파였지만 스탈린에게 몇 차례 산업화 속도를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고, 때문에 스탈린은 이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키로프를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수도인 모스크바가 아니라 레닌그라드에 머물게 하였다.

키로프는 이렇게 레닌그라드 당사의 자신의 사무실에 머물다가 그 해 암살되었는데 스탈린이 이를 공산당 내에 파시스트들과 연결돼 있는 제5열[14]의 소행이라고 선전하여 당내 첩자들의 색출작업을 실시한다. 이 과정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 같은 반(反) 스탈린파들은 물론이고 스탈린을 제외한 10월 혁명의 원로들과 경쟁자들, 최종적으로는 반(反) 공산주의 계층들까지 모두 쓸려나가버려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스탈린 절대지배체제가 확고히 수립된다.

세르게이 키로프의 보안 문제에 스탈린이 직접 간섭하는 등[15] 키로프의 암살을 전후해 석연치 않은 문제가 있어 스탈린이 사주했다는 설이 있었다. 실제로는 키로프의 부인에 대한 연정(...)으로 벌어진 치정극이라는 설부터 반소련 음모, 스탈린이 손수 사주했다는 설 등이 있는데 니키타 흐루쇼프의 경우는 노골적으로 스탈린의 사주설을 주장했다.

사실 스탈린은 혁명 후 동지가 동지를 처형하던 프랑스 혁명의 악순환을 경고하며 대숙청 10년 전에는 숙명의 라이벌이자 불구대천의 원수 레온 트로츠키를 처형하는 것을 반대한 적도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그 이후에 대부분의 동지들이 처형된 것과는 달리 외국 추방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이 그렇게 인정이 많을 리가 없었고, 후에 멕시코로 망명한 트로츠키가 자신을 계속 까대자 자객을 보내 암살한다. 이전에도 볼셰비키는 제정을 무너트리는데 같은 혁명동지였으나 방법론 차이로 갈라졌던 멘셰비키들을 처형하지 않고 대체로 망명을 허용할 정도로 혁명 동지들에 대한 처형은 매우 자제하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를 축출한 스탈린이 농업을 집단화시키고 과격한 산업화를 추진하자 당 내에서는 그에 대한 반대가 많아졌다. 그 당시만 해도 스탈린보다 경력이 화려한 혁명가들이 당 내에 있었던지라 만약에 중앙위원회에서 불신임 투표라도 당하면 그는 그대로 정권을 잃고 정치계에서 묻힐 판이었다. 그래서 당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세력을 뿌리 뽑아서 자신의 정책을 추인하는 거수기로 만들려고 하였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게 농업집단화였는데 농민들이 자기 땅을 빼앗기고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반란 진압을 위해 군이 동원되었는데 잘 알려져 있지만 이 과정이 정말로 참혹했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대기근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스탈린은 윈스턴 처칠에게 독소전쟁보다 이 시기의 반란 진압이 더 참혹했다고 했다. 인민을 위한다는 붉은 군대가 인민을 탄압하니 장교들이 스탈린 체제에 회의감을 느낀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당원이었던 몇몇 장교들은 중앙위원회에서 스탈린에게 용감하게 반대표를 던지기도 하였다. 더욱이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에서는 이러한 집단화 정책 실패와 자연재해가 겹쳐 대기근이 일어나서 수백만 명이 아사하였는데(홀로도모르) 이 책임은 모두 무리한 산업화를 밀어붙인 스탈린이 져야 할 판이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산업화는 내가 아니면 안 된다. 또한 여기서 산업화를 중지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식의 독선을 가졌고 이건 스탈린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이런 식의 사고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계속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오르기 주코프의 회고록을 봐도 그 당시에 만약에 산업화를 포기했으면 몇 년 후 일어났을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이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생각이 스탈린 독재와 대숙청을 합리화했으며 결국 이는 실존하는 반대파 또는 반대할 수 있는 세력을 모조리 숙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더해서 대숙청 후에 라브렌티 베리야가 예조프를 기소하면서 넣은 죄목 중에 양성애[16]와 변태 성향을 넣을 정도로 새디스트 성향이 있는 예조프가 숙청을 감독하면서 막장으로 치달았다. 웃기는 것은 사실상 후임자라고 할 수 있는 베리야도 로리콘 성향이며 새디스트였다는 것.

군부에 대한 숙청도 있었다. 적백내전 중 양성된 노련한 장교들을 누명을 씌워 정치적 혐의로 숙청해서 처형하거나 NKVD의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굴라그로 보내거나 해서 제2차 세계대전 직전 소련군은 몇몇 장성을 제외한 훌륭한 군인들의 씨가 말라버렸다고 알려졌다. 때문에 독소전이 개전하자 심각한 인력부족에 시달린 소련은 그때까지 죽지 않은 장교들을 다시 불러와서 복귀시키는 조치가 취해졌고, 죽은 사람 중에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 같이 유능한 장교들 역시 많았으며 대독승전의 주역 중 한 명인 로코소프스키 원수는 숙청 전에도 소장이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발가락이 다 뭉개지고 이빨도 절반이나 날아갔다가 독소전 때문에 살아났다. 주코프는 실제로 숙청 리스트에 올라갔다가 할힌골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이름이 슬그머니 빠졌으며, 이반 코네프는 인맥줄을 잘 타 스탈린의 술친구인 보로실로프 원수 라인으로 들어갔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은 사람들이 현대전에서 정말 무능했을지는 알 수 없는 셈. 그리고 무능한 장교들이 싹 쓸려나갔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당장 대숙청에서 살아남은 원수 2명이 스탈린의 예스맨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시대에 뒤떨어진 세묜 부됸늬다. 둘 다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군에게 뼛속까지 처발린 다음 다시는 일선에 나서지 못했다(...). 대숙청 직후 벌어진 소련-핀란드 전쟁만 봐도 결과가 어떻게 작용했는지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든지 간에 독소전 초반 소련군을 반신불수로 만든 것에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정도로 타격이 심했다.[17]

군부에 대한 숙청이 시작된 것에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첫째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독일 방첩대(SD)가 소련군의 고위장교들이 독일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문서를 흘렸고 거기에 위조된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서명이 있었는데 이걸 본 스탈린이 "헐, 이 새퀴들이 내 뒤통수 깔 준비하고 있던 거야? 용서할 수 없다!"라면서 예조프와 함께 고위장교들을 줄줄이 쳐냈다는 것이고, 둘째는 NKVD가 일부러 군의 고위장교들에 대한 불신감을 부추겼다는 설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의심 잘하는 스탈린에게는 효과 직방이었을 것이다. 세번째로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역정보를 스탈린이 간파하였음에도 오히려 이를 숙청의 구실로 삼았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떤 이유든 간에 실제로 스탈린이 군에까지 대숙청을 옮기고 싶어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들은 꽤나 있는 편이다. 실제로 1937년까지는 민간에 대한 숙청은 많았어도 군대만은 거의 건드리지 않았는데, 위의 이유들로 인해 스탈린이 군대에 슬슬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소련군은 고도의 기계화와 함께 신속한 기동력을 갖는 기동군을 창설하는 계획이 있었기에 군 지휘관들에게 더 많은 재량권을 주고 당의 감시역인 정치장교 제도를 없애려고까지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위에 언급된 누명에 부채질을 하는 꼴이 된 것이다. 기동전 구상 자체는 스탈린도 동의한 것이지만 하필이면 굉장히 안 좋은 시기에 찍히기 쉬운 짓을 스스로 벌이고 있던 것. 대숙청 이전의 소련군이 킹왕짱 좋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후사정이 어찌됐든 그나마 육성되기 시작한 장교들을 대거 제거한 것도 그렇고 장교들이 숙청에 대한 강한 공포감을 갖게 만들어 몸 사리게 만든 것도 소련군의 전투력이 내려가는데 크게 기여했다. 극단적으로 몸을 사린 결과 자기 판단대로 창의적으로 지휘하지 못하고 전투교범 등에만 매달리는 경직된 모습을 보이게 된 것. 덕분에 독소전 초기에 독일군이 감청한 유명한 대화도 나왔다.

"우리는 포격을 받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들 미친 거냐! 왜 암호로 보고하지 않는 거냐! 암호로 다시 보고해라!" 너는?

이미 공격을 받고 있는 급박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다시 보고하라는 것도 어이없지만, 더 큰 문제는 보고를 받은 쪽, 그러니까 지휘관 쪽에서 통신보안의 가장 기본적인 사항 중 하나인 이중송신[18] 금지를 무시하라는, 실로 어처구니없는 지시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대숙청 직후의 붉은 군대가 얼마나 막장 상태였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화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지경이니 우라돌격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19]

이 숙청의 규모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당시 소련에서 불과 다섯 명 뿐이었던 원수들이 두 명만 남고 몽땅 처형되었다는 것만 언급해도 충분할 정도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20]와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바실리 블류헤르가 이 기간 동안 '반혁명 분자', '독일/일본의 첩자' 등 말도 안 되는 날조된 혐의를 받고 비밀재판을 거쳐 목숨을 잃었다. 좀 어이없는 것은 예고로프와 블류헤르가 투하체프스키의 비밀재판을 맡았던 군사재판장이었다는 사실이다. 블류헤르는 처형 직전 만주에서 일본군의 도발을 쳐부수는 승리를 거둔 바가 있으며 장제스의 고문으로 파견되어 그와 몇 년간 일하며 우정을 쌓은, 꽤 준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건만 일본의 여간첩에게 유혹당해 정보를 일본에 바쳤다는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고 고문 담당자와 싸우다가 살해당했다. 예고로프는 결국 두 경쟁자를 가지쳐내는데 성공했지만 그도 서기장 동무의 싸늘한 눈초리는 결국 피하지 못했다.[21]

결국 살아남은 원수는 위에서 언급했듯 무능하기 그지없는 '스탈린의 예스맨'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와 보로실로프보다는 유능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세묜 부됸늬 뿐. 여기에는 작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술 친구이기도 할 만큼 개인적으로 스탈린과 친했기에 살아남았고[22] 보로실로프와 친하거나 그가 보호해준 장교들 상당수가 살아남아 독소전에서 활약했다.

그런가 하면 부됸늬는 NKVD 요원들이 사무실을 덮치자 이들과 완력으로 맞섰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 그리고 그들이 주춤하는 사이 잽싸게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은 스탈린이 "아, 그건 오해다"라며 간단히 그 자리에서 혐의를 풀어줘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원수급 이하 수많은 장성들, 영관급 장교들도 이 풍파에 쓸려나갔는데 투하체프스키의 추종자였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폴란드 스파이 활동 등의 혐의로 NKVD에 끌려가 발가락들이 전부 쇠망치로 짓이겨지고 아홉 개의 치아가 부러져나갈 정도로 극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독소전이 시작되고 무능한 장성들이 전사 혹은 해임되기 시작하자 임시로 소장 계급을 부여받고 군적에 되돌려졌다. 이후 군단장이 되어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역관광을 펼치면서 원수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금속제 틀니를 하고 살았고 금속 발가락이 내장된 부츠를 신고 절뚝거리면서 걸어야 했다고 한다.

대숙청은 다섯 원수 중 3명을, 11명의 부(副)국방 인민 위원 전원과, 모든 군관구 사령관, 16명의 야전군 사령관 중에 14명, 67명의 군단장 중에 60명, 199명의 사단장 중에 136명, 397명의 여단장 중에 221명, 모든 연대장의 50%이상을 포함한 전체 장성들의 90%, 영관급 지휘관의 80%를 골로 보내버렸고 그 희생자는 35,000명에 달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보직해임으로 그쳤지만 1만 명 가량은 NKVD에 끌려가 수감, 고문, 심하면 처형되었다. 특히 전투부대 지휘관으로서의 영관장교는 대부분 심해야 굴라그 수감으로 그쳤지만, 경험을 어느 정도 쌓은 참모장교 및 장성들은 총살된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1941년이 되자 해임된 이들은 80% 가량 복직되었지만 조직관리 및 대부대 지휘통제 경험자가 거의 괴멸한 피해를 복구하기엔 턱도 없는 상황이었다. 특이한 것은 후일 적군 최고의 명장으로 거듭나는 게오르기 주코프는 예조프의 숙청 리스트에는 들지 않았지만 베리야가 실권을 잡은 뒤 숙청 리스트에 올랐다. 그런데 그가 할힌골 전투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자 베리야는 슬그머니 리스트에서 이름을 지웠다.

당연하지만 이 숙청의 칼날은 육해공 병종을 전혀 가리지 않았다. 위에 언급한 육군 외에도 소련 공군과 해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공군의 경우 스페인 내전 참전 등의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조종 장교와 지휘관들이 대거 수감, 사형을 당했고 설계국의 주요 기술자들도 마찬가지로 수감당하거나 사형을 당했다. 해군의 경우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포템킨 사건 등 러시아 혁명 과정에 깊이 관여해서 숙청을 피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거 없고 마찬가지로 주요 장교단이 대거 숙청당했다.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등 일부 고위 지휘관들이 숙청 대상자들의 신원 보증을 해주며 저항해 보았지만 그들의 노력만으로 숙청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단지 소련 해군의 경우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이전부터 듣보잡 수준의 전력을 가져서 상대적으로 그 피해가 적어 보이는 것 뿐이다. 그리고 해군이나 공군의 경우 설계/정비 기술자나 조종사 등 숙련된 인적 자원의 비중이 더욱 컸기 때문에 그 피해는 육군에 비해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대숙청으로 인해 붉은 군대의 지휘체계가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소련군은 정규군인 붉은 군대만이 아니라 바로 저 숙청을 주도한 NKVD 산하 준군사조직마저 숙청의 후유증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연대대위소령[23]이 지휘하는 게 당연하다시피 한 상태가 되어버렸고 때문에 대령 사단장이 속출했으며 여단장[24] 계급으로 군단을 지휘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그것도 저 계급이 부족한 간부를 충당하기 위해 쾌속 진급시킨 계급이었다. 어떤 때는 1938년에 참모학교를 졸업하고 대위가 되어 사단 참모장교로 배치되고 보니 사단장부터 예하 연대장들까지 전부 숙청당한 상태라 대위가 사단 최선임자여서 월 단위로 진급을 거듭한 후 부임 2~3개월차에 대령으로 사단장이 된 경우도 흔했다. 더 불쌍한 건 사단장이 되고 나서 숙청의 칼날에 걸린 자들도 상당히 많다는 것. 참모였을 때 잡혀갔으면 수감으로 끝날 것을 사단장으로 잡혀가는 바람에 뒤통수에 바람구멍이 뚫린 사람도 꽤 많다고...

여담이지만 스탈린의 라이벌 아돌프 히틀러는 군부 대숙청을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프로이센 출신 장교단이 자신의 말을 잘 안 따라서 전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한 히틀러는 "스탈린처럼 군부의 고집불통 짬밥들을 모조리 숙청해야 했는데... 그래야 그처럼 군부를 수족처럼 부릴 수 있었을 텐데"라고 스탈린을 부러워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시시콜콜 간섭했던 독소전쟁 전반기와는 달리 후반기엔 간섭을 자제하여 소련군이 창의성 있게 잘 움직여 나간 건데 히틀러는 정반대로 해석.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후 히틀러는 정말로 그를 따라했다. 암살 미수사건에 가담했다고 여겨진 장교들이 전선에서 소환되어 과장되거나 짜맞춘 결론으로 처형되었다. 그런 숙청재판을 주재한 재판관 롤란트 프라이슬러를 히틀러는 "프라이슬러는 우리의 비신스키[25]다"라며 스탈린식으로 숙청할 것을 주문했다.

결국 군부의 경우 위에서도 말했듯이 당연히 수 많은 유능한 군인들이 좌천되거나 처형당하고 살아남은 장교들도 소극적으로 작전에 임하게 되었고, 그 결과 소련군의 급격한 약체화를 불러와 겨울전쟁독소전쟁 초기에 신나게 얻어터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거기다 이 숙청은 군인 뿐 아니라 소련 각계각층 인사와 민간인까지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파장이 대단히 컸다. 고위층 장교 한 명 잡아 없애기 시작하니 가족 관계며 친분 관계까지 사다리 타고 계속 내려오는 걸 거의 다 가지 쳤을 정도. 부모가 잡혀가면 그 다음에 남은 아이들은 대체로 인민의 적의 자식들을 수용하는 고아원으로 이송되었고, 성인이 된 뒤에는 사실상 유형지나 다름 없는 시베리아의 도시들에서 거주이전의 자유를 제약 받은 채로 살아가야 했다. 니콜라이 예조프의 딸도 숙청 당한 뒤 이 테크를 탔다. 그러나 흐루쇼프 시대, 숙청 희생자들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졌을 때 이들 중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거주권을 발급해주는 보상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참고로 투하체프스키 원수의 경우 아내와 아들까지 모두 처형되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역사가들의 조사에 따르면 대숙청 직전인 1934년 17차 전당대회 참석자 명단에 실린 대의원 1966명 중 1108명이 체포되고 그 반 이상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또한 당 최고기관인 중앙위원회 위원 139명 중 110명이 처형당하거나 자살 또는 의문사했다. 당시 모스크바의 당 간부용 아파트 단지에서 대숙청 종결 때까지 가장이 무사히 남아있던 가구는 겨우 두 가구에 불과했다는 소름끼치는 전설이 있다.

반혁명 즉결 재판을 통해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만 해도 겨우 2년 동안 1,345,000명에 달한다. 게다가 정확한 숫자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심지어 소련이 멸망한 뒤 공개된 비밀해제 문서들에는 각 마을과 시마다 인구비율당 체포 할당량을 주기까지 한 것이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2차대전이 한창이던 때와 종전 후에도 별의 별 꼬투리를 다 잡혀서 끌려간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희생자 숫자는 더 많아지는데 대전 후 중국에서 벌어진 문화대혁명,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킬링필드 등과 함께 일당독재 국가가 막장테크를 타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려주는 사례인 셈. 다만 흔히 알려진 2000만 명이 죽었다(경우에 따라서는 4000만까지도 간다)는 주장은 사실과는 다르다. 실제로 대숙청으로 죽은 사람의 수는 60만 명에서 200만 명 사이로 보고 있으며 90만에서 130만 명 사이로 보는 게 정설이다.

아무튼 이런 막장행위를 주선한 스탈린도 인재 부족에 대한 인식+예조프에 대한 견제의식+그외 잡다한 생각으로 인해 이 숙청을 완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고 1938년 '스탈린의 개새끼' 예조프를 자르고 NKVD 부장에 '스탈린의 힘러' 라브렌티 베리야를 임명한다. 예조프가 스탈린의 눈 밖에 난 결정적인 사유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NKVD 설립 20주년 기념식에서 예조프는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양 행세했고 그때 참석한 스탈린은 이를 보고 그의 정치적 야심을 의심, 숙청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결국 1940년, 스탈린은 예조프를 처형해버린다. 즉, 숙청 담당자가 너무 숙청했다고 숙청당한 것으로 이 대숙청은 대미를 장식한다. 물론 대숙청의 후폭풍은 별개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밀한 의미에서 숙청이 완전히 끝났다고 할 수는 없었다. 1939년 발트 3국이 소련에 합병되자 그곳에 있던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베리야에게 숙청되었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들을 대거 처형한 카틴 학살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참고로 대숙청을 감독한 이가 베리야로 잘못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베리야는 예조프가 남긴 후유증을 뒷수습했다. 물론 그렇다고 베리야가 착한 놈은 절대로 아니며 전쟁 기간 동안 베리야의 손에 죽어나간 사람이 예조프와 맞먹을 지경이다. 스탈린식 정치는 베리야에게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베리야는 스탈린 사후 스탈린 노선을 폐기하는 정책을 펴지만 결국 니키타 흐루쇼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고 처형당했다.

이렇게 예조프가 토사구팽당한 이유는 대숙청의 여파가 소련에 얼마나 심각했던지 누구든 이 책임을 져야 했고 이는 곧 지도자인 스탈린에게 돌아올 판이었다. 베리야는 취임 후 솔직히 공안기관의 오버를 인정하면서도 그걸 모두 예조프 탓으로 돌렸다. 그러니까 베리야는 막장으로 치달아 국가에 큰 해를 끼친 대숙청의 책임론에 대해 스탈린에 대해 실드를 쳐준 건데, 예조프를 임명한 것은 스탈린이기 때문에 스탈린이 그 책임에서 피해갈 수 없다.

이 대숙청이 가져온 가장 큰 불행한 유산은 소련인들을 모두 명령과 규범에만 기계적으로 순종하는 로봇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상부 지시 없이 훈련을 했다는 이유로 장교가 숙청되는 막장스러운 상황에서 다들 살아남기 위하여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었다. 이런데 혁신적인 아이디어, 자발적인 도전 등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어떤 분야든 끊임없는 도전과 실패 그리고 피드백이 계속돼야 하는데, 모두 상관의 입만 쳐다보고 아무것도 안 하는 상황에서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2.1 원인 분석 :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

전통주의적 관점에서 대숙청의 원인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전체주의적 통제사회를 건설하고 스탈린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하는 절대권력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대숙청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대숙청이 벌어진 30년대 후반 이전까지 소련에서 스탈린이 가진 권력은 이후 40~50년대의 스탈린이 가졌던 절대권력과는 비교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취약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34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 선거를 보더라도 위에 서술된 것처럼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무려 300표 가까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고, 독소전쟁 발발 직후 패닉에 빠진 스탈린이 관저에 은둔해 있는 상태에서 몰로토프를 비롯한 심복들이 대책이라도 세워야 하지 않겠냐며 일하라고 끌어내려 쳐들어오자 자신을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온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는 절대권력이 공고해진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의 스탈린에 대한 공식적인 반대가 사실상 불가능했던 점이나, 암살이나 테러는 두려워할지언정 공개적인 탄핵이나 체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면 분명 스탈린의 권력이 절대적이지 못했다는 증거가 될 만하다. 즉, 대숙청과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스탈린이 설령 소련의 최대 권력자라고 할지라도, 다른 권력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견제나 도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스탈린의 권력 획득 과정을 살펴본다면, 일단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의 1인자가 된 것은 20년대 중반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것을 기점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925년 무렵에 트로츠키는 정치적인 권한을 거의 상실하고 실각하게 되지만, 정작 트로츠키가 국외로 추방당한 것은 29년의 일이었다. 최대의 정적이자 정치적 위험요소인 트로츠키를 실각시키고도 4년간이나 해외로 쫓아내지도 못하고 국내에 머물도록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기간동안 스탈린은 트로츠키의 국외 추방을 실행했을 때 사람들이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도록 소문을 미리 퍼트리는 등 다양한 공작을 펼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트로츠키를 체포하여 처형하자는 지노비예프의 제안에 대하여 스탈린이 '동지가 동지를 처형하던 프랑스 혁명의 악순환'을 예로 들어 반대의사를 표명했던 것은 트로츠키를 처형했을 경우 돌아올 정치적 부담과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 역시 가능하다. 만약 정말로 순수하고 동지를 죽이기 싫어서 처형하지 않았던 거라면 실각시킨 후 바로 해외로 추방하는 것이 합리적 행동이었을 것이며, 국내에 계속 머물도록 할 경우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당장 스탈린과 연합하여 트로츠키를 실각시킨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도 스탈린의 잔혹성이 두드러진 20년대 후반부터는 자신들의 선택을 후회하고 다시 트로츠키와 손을 잡고 스탈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정치적 위기에 몰린 트로츠키를 염려한 군대 내 추종자들이 트로츠키를 권좌에 옹립하기 위한 쿠데타를 자발적으로 제의할 정도였고[26] 굴라그에서 살아 돌아온 행운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스스로를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고 부르던 트로츠키의 추종자들이 40년대 후반까지도 수용소에 남아있었다고 할 정도로 당시 소련 내에서 트로츠키의 정치적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29년에 트로츠키를 국외 추방함으로써 최대의 정적을 일단 제거한 이후에도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을 비롯한 나머지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30년대 초반 내내 각종 누명과 음모로 이들의 당원 자격을 여러 차례 빼앗기까지 했지만, 자아비판 등의 절차를 거친 뒤 다시 돌려줄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러한 길고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이들을 본격적으로 투옥하고 처형한 것이 바로 대숙청 기간인 30년대 후반이며, 추방당한 상태인 트로츠키를 암살한 것은 대숙청이 분수령을 넘은 1940년의 일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종합해 본다면, 권력 획득 이후 대숙청기 이전까지 10여년의 기간은 소규모 숙청과 음모로 다른 경쟁자들의 권력을 조금씩 깎아내리고, 그만큼씩 스탈린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일종의 독재 태동기였으며, 대숙청이 시작된 3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경쟁 관계의 다른 권력자들을 압도할만한 권력이 스탈린에게 집중된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막강한 권력을 얻은 다음에 굳이 대규모 숙청을 자행했느냐는 것인데, 이 역시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그 전까지는 대규모 숙청을 벌일 힘이 없었고, 권력을 얻은 이후에는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요소를 배제하기 위해 숙청한 것이다.

여기서는 스탈린이 당시 혁명 당시의 볼셰비키 당 지도자, 소위 말하는 '고참 볼셰비키' 중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한데, 혁명 과정에서 아무것도 한 일 없는 잉여 찐따라는 이야기는 스탈린을 디스하기 위한 다른 볼셰비키 당 지도자(주로 트로츠키)들이 퍼트린 악평이기는 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정확히 말한다면 나름대로 공적이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오만방자와 시건방이 하늘을 찌르고 잘난 척을 주된 정체성으로 삼는 트로츠키 같은 인물이라면 '스탈린은 아무것도 한 일 없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할 정도(...). 스탈린이 주로 활동한 영역은 사무작업이나 자금마련 같은 부분인데, 문필가로서 독일에까지 알려진 명성을 제외하더라도 10월 혁명 당시 적위대를 이끌고 임시정부를 전복시키는 것을 주도하고, 이후에는 붉은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군대를 조직하여 반혁명군을 상대로 한 승리를 주도한 트로츠키에 비한다면 확실히 화려함이 크게 떨어진다.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해외 인물들조차 10월 혁명 이후의 볼셰비키 정권을 레닌과 트로츠키가 만든 정부라고 부를 정도니 트로츠키는 그냥 못 이긴다고 치더라도, 그 외의 다른 경쟁자들과 비교할 때도 스탈린의 경우는 화려함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부하린 같은 경우 뛰어난 이론가이면서 특히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전문가라는 명성과 함께 레닌에게 '당 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을 정도로 인망도 높은 인물이었으며, 지노비예프는 일개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인 스탈린에 비해 명목상 전 세계 모든 공산주의 정당의 상위조직인 코민테른의 집행위원장이자 벽촌인 캅카스 지방에서 활동한 스탈린과는 달리 수도인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한 바 있었고 카메네프 역시 수도인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의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본적으로 탁월한 이론가+연설가 스킬을 기본 장착한 위 인물들에 비해 스탈린은 민족 문제에만 능통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러시아어도 어눌한 편이었다.

결론적으로, 문화대혁명이나 킬링필드의 예를 봐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수많은 독재자들이 일종의 '이념적 세탁'을 위해 대규모의 학살과 숙청을 자행하곤 하는데 스탈린의 대숙청도 이러한 행태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스탈린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반대자나 잠재적 반대자, 반대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공포로 압도하여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숙청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으로 1) 소련 공산당의 정치국원들이 몰살당한 것처럼 권력조직 내부에 대한 숙청이 외부에 대한 숙청보다 더 심했다는 점과 2) 영관 장교의 80%, 장성의 90%가 숙청당한 것에서 보듯 군대에 대한 숙청이 몹시 두드러졌다는 점, 그리고 3) 특정한 집단에 대한 숙청이 아니라 별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핑계로 삼은 무작위성이 강한 숙청이었고 특히 엘리트 계층에 대한 숙청이 심했다는 점 등이 있는데, 이 역시 위 맥락에 따라 많은 부분이 설명 가능하다.

1) 소련 공산당 내부에 대한 숙청이 특별히 더 지독했던 이유는, 위에 설명된 바와 같이 스탈린이 당 내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남보다 잘난 사람이 지도자가 되기는 쉽지만, 남보다 딱히 잘난 점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려고 하면 자기와 동급의 잠재적 경쟁자들을 다 무력화시켜야 하니까.

2) 대숙청이라고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이 고급 장교 숙청일 텐데, 붉은 군대의 지휘구조를 파탄지경에 몰아넣은 이 숙청 역시 스탈린의 입장에서 군대가 잠재적 위험으로 느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권력투쟁이란 어떤 면에서 보면 행정부장관과 국방부장관 사이의 권력투쟁이니까. 더구나 그 국방부 장관이 보통 장관도 아니고 건군의 아버지라면? 당연히 정권을 잡은 행정부장관으로서는 군대가 꺼림칙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줄 근거가 하나 있다. 군 내에서 주 숙청 대상인 영관~장성급의 고급 지휘관들이라면 대략적인 연령은 40대~60대 정도였을 것이다. 소련의 건국이 1917년, 군부 대숙청이 1937년이니 이들 고급 지휘관의 대다수는 소련이 건국될 당시에 이미 20~40대의 나이로 군인으로서 경력을 시작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즉, 당시 붉은 군대의 고급 지휘관의 주류는 제정 러시아의 군인 출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혁명 직후 한 번 군대에서 추방당했던 이들 제정 러시아군 출신자들을 다시 군대로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트로츠키이다. 요컨데, 당시 붉은 군대 고급지휘관의 상당수는 트로츠키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스탈린에 의해 숙청된 군 지휘관 중에서 가장 아까운 사례로 꼽히는 투하체프스키를 보더라도, 귀족 태생의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트로츠키에 의해 발탁된 것에 가까운 입장이었고[27], 내전기에는 트로츠키의 지휘 아래서 눈부신 공적을 쌓아 최고위직까지 승진한 입장이었다. 덤으로 폴란드 전선에서의 패배 문제로 스탈린과는 사이가 나쁘기까지 했지만... 투하체프스키 자신은 군인으로서의 입장에 충실한 것인지 트로츠키 실각 직후에 총참모장에 취임하여 자기 책임을 다했지만, 이 역시 3년만에 보수파 장성들의 반대에 밀려 해임되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투하체프스키 개인에게 스탈린과 트로츠키 둘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느냐고 물으면 트로츠키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쪽이 오히려 더 적절하게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투하체프스키 개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붉은 군대 전체에 해당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군대를 적으로 돌리고 무사할 수 있는 독재자는 없다.

3) 이 문제도 붉은 군대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당시 군대 내에서 트로츠키에 우호적인 세력의 범위를 한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진짜 트로츠키파 자체야 트로츠키 실각 직후에 미리 숙청해 버렸지만 트로츠키에게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지휘관은 그냥 장교의 대다수이고, 오히려 스탈린파가 일부 계파에 불과한 상황이었던 것. 그나마 이 비교에서는 스탈린의 최대 정적이었던 트로츠키의 경우에 한정해서 설명하고 있지만, 몹시 오만한 성격과 애초부터 주류 볼셰비키가 아니었던 트로츠키의 입장상 트로츠키파는 차라리 특정해내기가 쉬운 상황이었고, 카메네프나 지노비예프, 부하린 같은 유명한 고참 볼셰비키의 경우 그들의 지지자가 곧 볼셰비키 지지자였던 상황이었다. 스탈린 역시 고참 볼셰비키였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러시아어도 고등학생 수준으로밖에 구사하지 못하고, 생긴 게 멀끔한 것도 아니고, 성실하고 꼼꼼하긴 하지만 특출나게 똑똑한 것도 아닌 데다가 성격까지 음침한 스탈린을 다른 지도자보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을 듯. 결국 소련 사회 전반에 걸쳐 명백한 스탈린파는 소수에 불과했고, 스탈린의 권력이란 볼셰비키당이 소련의 권력을 장악한 상태에서 볼셰비키당을 정략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얻어진 것이었지, 그 권력에 상응하는 지지를 기반으로 얻어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절대독재권력을 얻기를 포기하고 말겠지만(...) 어떻게든 절대적인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면 결국 스탈린보다 다른 지도자를 더 선호하는 다수집단 전체를 숙청해야 하는데, 다수의 집단을 특정해낸다는 건 의미가 없으니 결국 남은 길은 무작위 숙청 뿐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반대파 전체를 물리적으로 제거했다기 보다는, 감히 반대할 엄두를 못 내게 만드는 방법으로 스탈린은 절대권력을 얻은 것. 특히 엘리트 집단에 대한 숙청이 잔혹했던 이유 역시 이들이야말로 스탈린이 평범한 당 지도자 중 1人이었던 과거를 잘 기억하고 있을 테니 그만큼 위험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간단히 요약하자면, 대숙청이 없었다면 소련의 절대 권력자 스탈린은 탄생할 수 없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스탈린도 그것을 잘 알고 의도했다는 것이 요지이다. 실제로 레닌 시대만 해도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탄압은 꽤나 공공연하게 행해졌지만 최소한 당 내에서는 레닌에 대한 비판이나 레닌의 입장에 대한 반대가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28]

3 수정주의(재발견)

3.1 대숙청에 대한 수정주의

한편 이런 전통주의적 시각의 틀 안에서 공부를 한 일군의 역사학자들이 1970년대부터 소련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혁명 이전의 러시아를 연구하던 사학자들이 자신들의 방법론으로 스탈린 체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대숙청도 이런 새로운 분석을 피해갈 수가 없었다. 2차대전 시기에 독일군이 노획하였던 스몰렌스크 문서고와 같이 서방권에서 가용할 수 있던 소련 내부 자료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각각의 수많은 사회집단들이 각자의 이익을 주장했으며 대숙청에서 대규모 대중참여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요약하자면 수정주의에서는 대숙청은 본질적으로 중앙집권적 근대국가를 지향하던 소비에트 연방과 스탈린이, 중앙당 및 지역당의 기율 와해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 수행한 몇가지 노력들이 화학적 결합을 일으켜 대폭발을 한 것에 가깝고, 흔히 생각하는 키로프 암살에서 예조프시나까지 이어지는 스탈린의 거대 계획이라는 것이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1929년과 1933년 숙청[29]을 진행하고 당원들의 현황을 조사하면서 스탈린과 중앙당은 지역당의 한심스러운 실태를 알게 된다. 소련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특권을 보장해주는 당원증부터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당 사무실에서 이름이 비어있는 당원증을 뭉텅이로 빼돌려서 폴란드에 팔아 넘긴다던지, 당원이 죽었는데 가족들은 당원증을 계속 갖고 있어 배급 특전을 계속 받아먹는다던지, 비리나 횡령으로 출당되었는데 당원증만 갖고 다른 동네로 가서 당원 행세를 하고 그 지역 요직에 다시 올라있다던지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전반적인 당원의 질도 굉장히 안 좋았다.[30] 특히 5개년 계획을 거치며 엄청나게 팽창한 소련 관료제의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어중이떠중이를 받아서 일을 시켰는데 이들 상당수가 경제 문제에 천착하느라 다른 조직적인 일, 정치적인 일에서는 아예 개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경제 문제를 처리하는 것조차도 어려워했다. 심지어는 대놓고 중앙정부에 거짓 보고서를 올리기 일쑤였다. 이를테면 우랄에서는 우크라이나와 제철소 수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지질조사국을 갈아버리면서까지 없는 탄광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고 보고서 조작에 생산 장부 조작 등 온갖 막장스러운 일들을 하기도 했다. 한편 지방을 통제할 당원 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해 몇몇 집단농장에는 맡아서 관리하는 당원들이 하나도 없거나 한 명 있으면 많은 정도의 개판. 나름 러시아에 붙어있다는 스몰렌스크가 이 정도면 저기 극동의 시골구석은 뭐...

1934년, 이 당원 관리의 실패가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드러났다. 출당 당해서 이제 당원도 아닌 자가 레닌그라드 당 사무소의 경비를 반납하지 않은 당원증으로 속여먹고 세르게이 키로프를 암살해버린 것. 안 그래도 당원에 대한 대대적인 확인 조치에 들어가려 했던 공산당은 화들짝 놀랐다.

여기서 잠깐 키로프 암살에 대해 언급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전통주의적 입장에서는 이 키로프 암살이야말로 스탈린 숙청의 결정적인 전기이며, 스탈린이 이를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정주의 입장에서 키로프 암살은 어떤 것이었을까? 대숙청을 연구해온 학자 게티에 따르면 우선 전통주의적 시각에서 전제해온 "온건한 키로프" 모델이 근거가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한다. 실제로 트로츠키를 비롯한 스탈린의 정적들은 그를 온건하다고 인식한 적이 없었다. 키로프 본인은 집단화와 산업화를 최전선에서 이끈 스탈린의 충복이었고, 실제로 키로프가 레닌그라드 지역당을 맡았을 때 그가 파괴한 정교회 성당은 전임자인 카메네프와 후임자인 즈다노프보다도 많다. 키로프가 온건파라고 알려진 근거로 인용되곤 하는 1934년의 당대회 연설에서도, 키로프는 좌익 및 우익 반대파에 대해 조소로 일관했고 비밀경찰의 강제노동 활용을 높게 평가한 바가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가 온건파였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물론 키로프가 온건파가 아니었을지라도 높은 인기로 스탈린에게 위협이 되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키로프 위협설의 중요한 정황증거로 인용되는 1934년 중앙위 선거도 근거가 그리 확실하지는 않다. 중앙위 선거에서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무더기로 나왔다는 설은 당시 투표 집계를 진행했던 사람 중 하나인 베르호비흐가 1960년에 증언한 것을 그 시초로 한다. 베르호비흐는 정확한 숫자는 기억 안 나지만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123표였나 125표 정도 나왔다고 말했고 지도부를 당혹스럽게 한 투표함은 폐기된 뒤 조작된 공식 통계가 발표되었다고 말했다.[31] 그러나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그런 일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말했고 후에 소련 정부에서 추가적으로 1934년 투표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지만 베르호비흐의 증언을 확인해주는 확실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실제로 166표 가량이 비기는 했는데 이것이 단순히 투표에 불참한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그 중 스탈린에 대한 반대표가 몇이나 나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로프의 인기에 대해서, 몰로토프는 나중에 인터뷰를 하면서 "키로프요? 단순한 선동가일 뿐입니다."라고 경멸적으로 언급했다고 한다.

이 키로프 암살이 소련인들 입장에서도 굉장히 의문스러운 점이 많은 미스테리 사건이었기 때문에 스탈린 사후 정치국 차원에서도 여러 차례 조사를 진행한 바 있으며, 특히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도 그런 일들이 있었다. 암살범인 니콜라예프의 일기도 나왔는데, 그 일기를 들여다보면 그가 정신적 질환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위대한 혁명적 테러리스트"가 되고 싶다는 등 황당무계한 내용들이 써져있다. 또한 키로프 암살이 탄압의 전기라고 하는 것도 의심스러운 점은 마찬가지이다. 왜냐면 지노비예프는 키로프가 암살되기 이전부터 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못미 지노비예프 키로프 암살을 분명 스탈린이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여러 정황을 봤을 때 암살 자체를 스탈린이 사주했다고 의심해볼 만한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 의심을 표할 만한 근거도 충분히 많다. 판단은 알아서.

하여튼 공산당은 1935년 프로베르카라고 불리는 작업을 시행한다. 바로 신규 당원의 입당을 막아버리고 각 지역에서 당원 명단을 확실하게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 사업은 근무태만으로 무지막지하게 지연되었다.[32] 그리고 확인해보니 더 가관인 모습들이 나타났다. 당원 목록에 명단은 올라가 있는데 지역에서 찾아볼 수도 없는 사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막 들어가 있었고, 기존 문서의 한심한 관리 상태가 또 다시 드러나버렸던 것이다. 중앙당에서는 이와 동시에 당원을 확인하면서 출신 계급을 속인 자, 비리, 횡령, 과음, 근무태만 등의 사유를 보이는 자들을 또 쳐냈는데 이 과정에서 지역 당의 상급 당원들이 자기들끼리 뭉쳐서 내부의 잘못은 쉬쉬하고 하급 당원을 제물로 보내버리는 정황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지역의 NKVD도 같은 패거리였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은 이 과정에서 일반 하급 당원이 지역의 상급 당원들과 간부급에게 많은 불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1936년 구 당원증을 신규 당원증으로 교체하는 작업까지 수행한다.

관료제 내부의 무능을 잡으려고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급진파 안드레이 즈다노프를 기용한다. 즈다노프는 지금 관료제의 상태가 전반적으로 개판인 건 당원들이 정치와 당의 역사에 대해 개념이 없어서 그런 것이고 지역당 조직 내부가 대중들과 유리되어 있어서 민주적인 참여가 제한받고 있기 때문이라는, 당시 공산당에서는 님 뭔 소리 하시는 거죠?라고 통할 만한 급진적인 주장을 하였다. 즈다노프는 심지어 당 조직 내부에서 상급자를 비밀선거로 뽑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치는데, 스탈린은 이에 흡족해하면서 당원들을 이 수단으로 통제하고자 노력하며 각지에 "님들 정치교육 빨리 좀 돌리셈"하는 공문을 발송한다. 그리고 즈다노프와 스탈린의 합작품으로 나온 것이 바로 1936년의 스탈린 헌법이었다. 그리고 그 즈음하여 스탈린의 교시가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붉은 군대 사관학교 연설에서 행한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라는 말이었다.[33] 즈다노프는 지금 당 내에서 중요한 건 비판과 자아비판이며, 자유로운 비판의 분위기가 만들어질 때야말로 당 관료조직의 일이 효율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지역당의 자치권을 억제하기 위하여 지역의 독자적인 경제 및 재정권한, 사형을 핵심으로 하는 사법권한을 은근슬쩍 박탈해놓은 상태였다.

한편 중앙당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다. 스탈린 파벌 내부에서의 싸움이 격화되는 중이었던 것이다. 트로츠키, 부하린에 대한 강경한 처벌과 산업생산에서의 급진적 움직임을 지지하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이들 당 내 반대파들에 대한 유화적인 해결책과 온건한 산업투자를 지지했던 세르고 오르조니키제의 다툼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몰로토프는 당시 소련의 정부부처라고 할만한 인민위원회들의 회의를 주관하는 소브나르콤[34]의 의장으로 있었고, 오르조니키제는 5개년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 모든 국가자원을 먹어치우고 있었던 중공업인민위원이었는데, 몰로토프가 오르조니키제의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오르조니키제 개인의 인망과 중공업인민위원회가 갖는 막대한 권력으로 둘의 다툼은 관료제 내부까지 스며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트로츠키를 지지하던 몇몇 당원들이 어설프게 일을 벌이다가 잡히는 일이라던가, 트로츠키가 소련 내부의 지지자와 사적으로 연락하던 게 걸리는 일 등이 발생하였고, 결정적으로 세르게이 키로프 암살이 벌어짐에 따라 온건파의 입지는 굉장히 취약해졌다. 이 시기 스탈린이 매우 상징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바로 겐리흐 야고다를 내리고 니콜라이 예조프를 NKVD 의장으로 앉힌 일이었다. 니콜라이 예조프는 반대파들에 대한 색출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자는 급진적인 입장을 보였는데 야고다는 그에 반대하고 적당히 몇 놈 잡아서 족치는 수준에서 끝내자고 치워버린 것. 야고다는 우편인민위원회라는 엄청난 중책(...)을 떠맡게 되고 공산당 중앙위 산하 당통제위원회의 의장이었던 예조프가 그 위치를 점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처음에 한 일은, 과거 트로츠키파의 일원으로 현재 오르조니키제의 충실한 부하로 변신한 퍄타코프를 숙청하는 일이었다. 몰로토프는 오르조니키제가 공격받는 것에 신나서 그를 극딜했으며, 퍄타코프는 투옥되었고 오르조니키제는 얼마 안 가서 자살한다. 이게 자살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논란이 많을 정도로 의미심장한 사건. 당 내 온건파는 이를 기점으로 몰락한다.[35]

거기에 예조프가 올라가자마자 한 일은, NKVD의 조직개편과 조직장악을 실시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NKVD는 각 지역의 지부들이 지역 당 조직과 사실상 협력 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감사가 진행될 것이라는 정보가 뜨면, 지역의 NKVD 의장이 나서서 감사 정보를 흘려주는 막장스러운 일도 많았다. 예조프는 야고다 체제하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유착관계와 업무태만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고 사람 족치는 일을 부지런하게 해야 하다니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 잔혹한 조직개편 및 숙청을 실시하였다. NKVD 지부들의 상부 인원들을 싹 다 교체하고 체포하였으며 기존 야고다와 연줄이 있는 그룹은 다 갈려나갔다. 사라토프 주의 NKVD 의장인 필랴르를 소환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예조프 : 인민의 적을 체포하는 데 왜 이리 안일하게 일하시는지?

필랴르 : 우리는 체포될 필요가 있는 사람은 누구든 체포했습니다.
예조프 : 그렇소, 그러나 그들은 고립된 개인일 뿐이었지. 그리고 그들은 진정한 위협을 제기하는 이들은 아니오. 여기, 이 리스트를 읽어보시오.
필랴르 : 제가 알기로 이 사람들이 국가적대행위에 가담했다는 어떤 증거도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들을, 아니, 당과 정부와 붉은 군대의 중요 직책을 차지한 공산주의자들을 어떤 법적 근거도 없이 체포한단 말입니까?
예조프 : 어떤 근거가 없다고?
필랴르 : 법적 근거 말입니다.
예조프 : 이 리스트를 받아가시오. 삼일 주겠소. 당신 일을 체크할 테니.

필랴르는 3일 후 체포되어 그의 자리는 예조프의 심복들로 교체되었다. 이제 NKVD는 지역 당과 공조하는 관계가 아니라 철저하게 지역 당을 감시하는 역할을 자임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많은 지역 당의 수뇌부가 멘붕을 겪게 된다.[36]

그리고 동시에 스탈린이 교묘하게 진행한 것이 바로 지역당의 제1서기들을 자리바꿈한 것이었다. 제1서기는 대충 주지사 정도 되는 위치라고 할 수 있는데, 지역의 최상급 당원이자 전체 관료제 내부에서 중급 정도에 위치하는 이들의 막강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 중 하나였다. 1936년에서 1937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지역의 많은 제1서기들의 부임지를 싹 셔플링해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의 권력기반이라고 할 수 있었던 측근들을 같이 데리고 이동하는 것을 금지시켜버렸다. 손발이 잘린 상태에서 완전 타지로 옮겨가게 된 이들의 권력기반은 많이 취약해지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대숙청에 기여를 한 것은 또한 1936년부터 줄곧 이어진 소련의 경제위기였다. 전통주의적 관점에서는 대숙청으로 유능한 관료진이 썰려나가면서 경제가 악화된 것이라고 여겼으나, 실제로는 경제위기가 대숙청을 불러왔던 것으로 여겨진다. 1936년 안 좋았던 날씨로 인한 작황 현황, 가뭄으로 수로가 말라붙으면서 생긴 수송 문제의 악화, 그로 인한 철도 체제의 과부하, 농업생산의 추락, 목재 생산 및 석탄 생산의 위축으로 인한 연료 수급 문제의 악화 및 건설의 둔화, 노동력 공급의 심각한 부족 등등 온갖 문제가 다 겹쳤으며 설상가상으로 동서 양쪽 파시스트 국가들의 부상으로 군비가 엄청난 경제적 부담이 되고 있었던 것. 특히 제1차 5개년 계획으로 잔뜩 들여놓은 신기술과 기계들을 운영 인력들의 미숙한 운영으로 다 말아먹는 것도 주효했다. 또한 지역의 경제주체들이 계획된 대로 예산을 집행한 것이 아니라 일단 추가집행해놓고 더 달라고 하면 주겠지 하는 식의 방만한 예산 운영도 국가의 재정에 매우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런 경제의 종합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스타하노프 운동을 비롯한 각종 자구책들이 입안되었고 실행되었으나, 오히려 소련에 존재하던 사회적 긴장을 더욱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소련이 곧 있으면 제국주의 국가들과 전쟁을 할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몇 년까지만 해도 잘만 돌아가던 경제가 갑자기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분명 외부의 누군가가 소련을 괴롭히려고 조작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소련을 지배했고, 그에 대해서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만 했다.

1937년 2월, 17차 당대회가 시작되었다. 이번엔 아주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는데, 스탈린보다 즈다노프와 몰로토프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당대회였던 것이다. 그간 스탈린의 모호하면서도 치밀한 행보로 이들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가게 되었는지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즈다노프는 주로 당 내 민주주의의 확대, 일반당원과 간부당원의 긴밀한 연결 및 협조, 경제 문제에만 천착하지 말고 정치와 교육 문제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라는 말을 주로 했고 몰로토프는 반대파 놈들 족쳐야 한다는 말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스탈린은 여기에 추임새를 넣으면서 이들의 이야기를 지지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당원 그룹의 리더십 대신에, 평화롭게 살고자 신중하신 당원들로 구성된 가까운 친구들의 자그마한 파벌들을 잘 이해하고 있소. 그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빨래를 말리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칭찬의 노래나 불러댔고, 그리고 이따금 구역질나고 알맹이 없는 '성공'의 보고서나 보내왔소."

이에 대해 대부분의 당원은 당연히 자신들을 저격하는 것이라고 직감하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 와중에 부하린과 리코프가 출당되어 반대파 사냥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당대회가 끝나고 몇 달 뒤까지도 아무나 잡고 반대파라고 하는 일은 많이 없었다. 흔히 생각하는 대숙청의 레토릭은 지나가던 사람 잡고 "얘 트로츠키주의자에요 숙청해주세요"인데, 1937년 6월까지도 그런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반대파에 대한 숙청과 지역당에 대한 장악을 위한 숙청이 이때까지는 명백히 구분되던 일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전국적인 대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자신들의 직속 상관이라고 공개비판으로 까기를 두려워했던 일반 당원들이 프라브다의 즈다노프 사설을 인용하면서 상급자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을 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몇몇 간부들이 갈려나갔고, 설상가상으로 제2차 5개년 계획이 신통치 않게 끝날 기미를 보이자 간부당원 사이에서의 연대도 무너지고 있던 중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몇몇 지역은 완전 풍비박산이 나기 시작했다.

사실 대숙청에서 지역 행정기구의 숙청은 제1차 5개년 계획 때부터 뿌려져 있던 씨앗이었다. 지역 지도자들은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 막대한 중앙 투자를 받기 위한 열정으로 넘쳤을 때 사기친 것들이 걸려나왔던 것이었다. 지역 지도부가 원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고 자치적인 지역중심적 행정이었으나 스탈린이 그걸 허용할 리가 없었고, 지역 지도자들은 그를 위해서 자신들의 제도적 이점을 활용해 중앙정부를 속여왔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거짓으로 장부를 작성하고, 존재하지도 않은 탄전을 있다고 속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명령-행정 시스템"이 진화해가면서 모스크바는 계속되는 실패와 그에 대비해 야심찬 계획에 분노하고 있었다. 지역도 이런 현상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그들은 투자를 받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모스크바에 많은 권한을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제 많은 권한을 넘겨받으면서, 그리고 권한을 실행할 능력을 갖추면서 모스크바는 더 이상 지역 지도자들의 도움이 필요없어졌다. 이제 중앙 내부에서의 갈등도 사라져서 트로츠키나 부하린을 쳐내기 위해 지역당의 협조를 받을 필요도 없어졌다. 그리고 계획을 만드는 것은 중앙 정부 부처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제서야 모스크바는 지역에 대한 대규모 테러를 감당할 수 있었다. 실제로 지역 간 결탁이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어떤 범죄적 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지역 지도자들이 행한 중앙 정책에 대한 저항이나 조작된 보고서를 올려보내는 일들이 문제가 되었다. 위기가 심해질 때 그들은 희생양들을 찾았으나, 이런 것으로도 버티지 못할 임계점에 도달하자 물결이 바뀌고 말았다.

사실 희생양을 찾아서 모스크바에 제물로 헌납하는 전략은 자기파괴적인 전략이었다. 경제의 상호연결성 때문에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같이 죽어야만 했다. 경제 전반에 걸친 위기가 지소되자 긴장과 갈등과 불만이 모두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지역 지도자들은 이 물결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다. 모스크바는 하부 단위에서의 상호 비방과 기소의 물결을 촉진시키며 모가지 수확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탈린의 계산은 적중했다.

그러나 그들도 예상 못한 건 그간의 희생양 만들기 관행이 빚어낸 화학적 결합이었다. 즈다노프가 만들어낸 이 상황에서 기름을 부은 것이 바로 예조프와 몰로토프의 작품이었다. 3월 지역당 회의에서 시작된 거센 비판의 물결을 버티고, 심지어 얼마 안 가 시행된 선거에서도 상당수의 간부당원들이 그대로 살아남자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6월 지역당 회의에서 일반 당원들이 트로츠키주의자와 파시스트 첩자라는 레토릭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보타주, 외국 첩자, 반대파, 인민의 적 등의 라벨링 관행이 이 폭발적 비난의 물결과 맞물려버린 것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동시에 진행되기 시작하였던 군부대숙청의 불길이 지역당에 옮겨붙기 시작한다. 소련군은 군관구 체제라 군관구 장이 지역당 회의에 참여하게 되어 있었는데[37] 이들이 파시스트 첩자로 몰려서 숙청당하는 동안 "니들 이런 첩자를 당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시켰냐?"라는 이야기가 안 나올 수 없기 때문. 스탈린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할 것을 염려하면서(물론 쾌재도 불렀겠지만) 카가노비치와 말렌코프와 같은 그의 심복을 지방 당 대회에 참관시켜 적절한 교통정리를 시행하는 동시에 모든 지역당의 제1서기들을 갈아버렸다. 말렌코프는 벨라루스로 갔고,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로, 베리야는 조지아로, 미코얀은 아르메니아로 갔다.[38] 그와 동시에 이제 숙청의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바로 예조프시나였다.

이때부터 우리가 흔히 아는 대숙청의 모습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기소하고, 10년 전의 생각 없이 했던 행적이 낱낱이 밝혀지며 비판받고, 출신 계급이 어디냐에 따른 충성도 체크가 이루어지는 그 공포정치가 막을 올린 것이었다. 소련 사회 구석구석까지 숙청의 칼날이 기어들어왔는데 가장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곳은 지역당의 수뇌부였다. 고참 볼셰비키는 그들의 명망이 높아서 숙청당한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예조프시나의 당 지도부 타격 때 지도부에 들어가 있어서 걸린 것에 가까웠다. 한편 중앙당의 스탈린 측근들은 이 대혼란을 기회로 조직 내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다. 지도부는 이 비난의 물결을 아래로 돌려서 자신들의 곤경을 피하려고 하였고, 일반 당원들 사이에서도 공포정치의 확산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소련은 당시 국가 내부에 만연해있던 사회적 긴장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었다. 이것이 예조프시나 때 터져나왔던 것이다. 관료제 내부의 무능이나 도덕적 오류들은 있는 현실 그대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 첩자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음모로 치부되었었고 이것은 책임을 방기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적대관계가 폭발하고 표면화되자 서로가 서로를 진지하게 트로츠키주의 음모라고 생각하며 고발해댔던 것이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1936년 경제위기로 소련의 사회적 긴장과 갈등이 훨씬 극심해진 상황에서 이런 공포의 물결이 지속되자 상급 당원들은 하급 당원들이 자신들을 없애서 소련을 약화시키려는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고 믿었고, 하급 당원은 상급 당원들이 외국 첩자와 결탁하여 국가를 내부에서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믿었다. 결국 독소전쟁이 발발하고 소련이 속수무책으로 털려나가자, 모든 사람들은 이 믿음이 결국 현실화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는 독일군 측에서 진행한 NKVD 포로 심문 작업을 통해 밝혀졌다.

그러나 당무의 상당부분이 줄곧 대혼란이었던 것처럼 이 예조프시나도 계획된 공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다른 조직들이 죄다 당원 관리도 안 되고 지리멸렬한 상태인데 숙청기관인 NKVD만 빠릿빠릿한 기율로 움직이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누구를 숙청해야 하나부터 어디까지 숙청해야 하나, 이 사람 숙청해도 되는 건가에 대해 전반적인 가이드 라인이나 합의가 없이 숙청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한다.[39] 또한, 즈다노프와 예조프의 두 노선이 별개로 진행되다가 37년에 갑자기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대혼란을 촉발하는데, 스탈린이 이 둘의 화학반응을 예측하고 완전 의도적으로 두 노선을 멱살 잡고 하드캐리한 건지, 아니면 스탈린도 예측 못한 상태에서 두 노선이 결합하며 예조프시나가 터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스탈린의 머리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현대인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솔직히 저거 예측하고 한 일이라면 스탈린은 진짜 천재 중의 천재임이 틀림없다 다만 어느 쪽이든 정황상 스탈린이 이걸 무작정 확대해서 통제하지도 않고 전부 박살내려고 의도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건 확실하다.[40] 6월에 당 기관지인 프라브다에서 "일반당원님들 우리 조금만 속도 줄이죠 ㅎㅎ"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사설이 실리고 은연 중에 스탈린 본인이 과도한 비난 드라이브는 삼가자는 신호를 여러 방면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특히 즈다노프 노선에 따른 소비에트에 대한 비밀선거 및 자유로운 입후보는 1937년의 하반기를 거치면서 급속도로 후퇴하였다. 모스크바 중앙당이 농촌지역에서의 반대표를 감당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에 더하여, 스탈린의 예조프에 대한 태도도 이 시기를 거치면서 변화하게 된다. 대숙청을 지휘하면서 NKVD가 너무 많은 힘을 쌓았기 때문이다. 예조프와 NKVD에 대한 온갖 찬양이 언론을 뒤덮었고, 레닌훈장이 NKVD 인사들에게 뿌리듯 수여되었으며 심지어 예조프의 이름을 딴 도시마저 생겼다. 미쳤나봐요 마침내 10월, 예조프는 공산당 중앙위 정치국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그러나 예조프의 승승장구는 오래 가지 않았다. 피에 굶주린 미친 개를 누가 좋게 보겠는가?[41]

위에서는 이런 스탈린의 태도변화를 보여주는 것을 볼쇼이 극장에서 치러진 NKVD 20주년 행사라고 서술했으나, 이는 사실과 맞지 않다. 그 전에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정치국 고위 위원들이 그 해 12월 선거에서 최고 소비에트에 진출하게 된 것에 대한 취임연설이었다. 13명의 국원들이 연설을 했는데, 이 중 7명의 국원들은 NKVD의 뛰어난 업적에 대해 한 번 언급이라도 해준 반면, 스탈린, 몰로토프, 즈다노프, 칼리닌, 보로실로프, 미코얀은 예조프와 그의 부하들에 대한 공치사를 한 마디도 던지지 않았다. 예조프에게는 매우 불길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더 불길한 징조가 하나 더 있었다. 그의 연설 중 일부가 검열당해 출판되었던 것이다. NKVD 20주년 행사는 그 얼마 뒤에 있던 일이었고, 이때 스탈린은 그의 치밀한 정치술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일단 행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NKVD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 아나스타스 미코얀으로 박아놓은 것이 1타였고, 더 중요한 2타는 참석을 안 해버린 것이었다. 사실 참석을 하기는 했다. 행사 다 끝나고 음악 콘서트할 때(...). 프라브다는 스탈린이 음악 들으러 왔다는 식으로 의미심장하게 이를 보도했는데, 프라브다의 편집을 감독하는 사람이 누구일지 생각하면... 스탈린이 그 이전에 집단농장의 여성 노동자들을 축하하는 자리나 최고 소비에트 투표장 등의 행사에도 참석한 걸 생각하면, NKVD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고 중간에 음악 들으러 왔다고 둘러댄 이 행보는 후에 있을 토사구팽을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다분히 의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도 예조프의 팔을 잘라놓는 행보는 계속되었다. 그의 부관들은 임업인민위원회나 우편통신인민위원회 등으로 전출되었고, 그의 부하들을 따라 그도 몰락하게 된다.

예조프는 이런 움직임에 위기를 느끼면서 자신을 방어하고자 갖은 노력을 다 하게 된다. 특히 숙청에 대해 처음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즈다노프를 비롯한 당 내 스탈린의 측근들이 공개적으로 당원에 대한 과도한 숙청을 비판하자 더욱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들이 이끄는 기관들도 과도한 숙청으로 조직력에 타격을 심대하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예조프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숙청을 더욱 심하게 진행하는 자충수를 두었으나, 내부 단속에 실패하였다. NKVD 극동 지부에서 예조프가 일본 파시스트들과 연계 되어 있다는 증언이 나와버린 것. 예조프는 더욱 초조해져서 최고 소비에트에서 모스크바를 스탈리노다르라고 바꿔야 한다!라는 제안을 하게 된다. 스탈린은 이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 그냥 한 큐에 거부해버렸으며 예조프의 입지는 더욱 위태로워지게 된다.

특히 결정타는 몰로토프와의 갈등이었다. 위에서 몰로토프-오르조니키제 갈등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숙청 막바지에도 여전히 소브나르콤 의장이었던 몰로토프는 산하 기관의 장이었던 예조프에 대해 또 질책을 가했다. 정보기관이 왜 장관회의 의장 밑인지 의아해할 수도 있는데, 사실 NKVD의 정식 명칭은 '내무인민위원회'였다. NKVD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정식 정부부처였고 예조프는 장관급이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NKVD 또한 각 인민위원회들을 통제하고 조율하는 인민위원회 회의(소브나르콤)의 산하기관이었고 일단은 예조프도 오르조니키제도 서열상으로는 몰로토프의 아래였다. 여하튼 그걸 듣고 예조프는 그동안 느껴왔던 위기의식이 폭발해서 폭탄 발언을 던지는데...

"내가 당신 자리에 있다면 말입니다,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나는 유능한 기관에 그런 종류의 질문은 하지도 않을 겁니다. 소브나르콤의 전 의장이었던 알렉세이 릐코프도, 내 집무실을 거쳐갔다는 걸 잊지 마시지요. 그리로 향하는 길은, 심지어 당신일지라도 닫혀있지는 않습니다."[42]

몰로토프는 이걸 듣고 "저 새끼가 돌았나"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어쨌든 몰로토프는 그의 상관이었고 스탈린의 둘도 없는 최측근이나 다름없었다. 상관에게 "너도 나한테 깝치면 숙청시켜버린다!"라는 엄포를 질러놓은 것을 스탈린이 묵과할 사람은 아니었다. 몰로토프가 이를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여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스탈린은 예조프를 불러서 몰로토프에게 당장 사과하라고 명령했다. 예조프는 묵묵히 사과하였고 다른 데서 계속 숙청을 진행하였으나 이제 스탈린의 강철 빗자루를 휘두르는 무소불위의 예조프의 기세는 한 풀 꺾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다 1938년 1월, 예조프는 NKVD 자리를 유지하는 한편 수로운송인민위원회라는 아주 중요한 직책(...)을 겸임하게 된다. 그리고 일반 당원들에 의한 무자비한 너 고소를 억제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잠재적 반대파들을 살려두고자 했던 안일한 일은 하지 않았다. 곧이어 니콜라이 부하린의 재판이 뒤따랐고, 1937년 2월에 그가 "한쪽 극단에서 벗어나서 다른쪽 극단으로 벗어나는 일을 여러분들은 해선 안 된다"라고 말했듯이, NKVD의 영향력을 완전히 제약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조프만큼은 철저히 찍어눌렀다. 1939년 1월 이후, 그의 이름은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언급되는 일이 없었다. 예조프의 심복들도 제거되었고 그들은 베리야의 심복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1939년 3월, 18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이 모든 이야기를 그의 정치적 의도하에 정리하는 연설을 한다. 제1차 5개년 계획 이래로 너무나 많은 당원들이 들어와 조직이 혼란스러워졌으며, 그들이 관리가 안 된 상태였고, 그 이후에 일어난 키로프 암살 사건과 이를 바로잡기 위한 1935년의 당 문서 확인 작업, 1936년의 당 문서 교체 작업의 지연, 그리고 예조프시나까지 포괄하는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그 연설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지금 우리의 당에서, 당원의 수는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질적으로는 더 좋습니다. 이것은 큰 성취입니다.

"당원 교육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숙청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이유로 애초부터 예조프의 노선을 지지하지 않았던 즈다노프는 너무나 많은 불필요한 희생이 있었다며 탄식하나, 스탈린은 당대회에서 즈다노프에게 '분명 무고한 희생이 우리 예상보다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이 작업은 어차피 했어야 하는 일이고 결과적으로는 유익했다'는 식으로 그를 다독여주었다. 마침내 소련 전 지역에 대해 강철같은 규율을 부과하려던 스탈린의 시도는, 심지어 그 자신조차도 완벽히 통제할 수 없었던 대혼란으로 종결되었던 것이다.

결국 수정주의적 시각에서의 대숙청은 (적어도 '대숙청의 기원'을 쓴 존 게티의 입장에서는) 제1차 5개년 계획을 거치면서 영향력이 확대된 지역당을 제압하고 중앙당의 관료제적 상하관계에 입각한 통제를 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소련 공산당이 스탈린 개인의 휘하에서 찍소리도 못하고 그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조직이 아니라 혼란스럽고 규율 같은 것도 없는 개판의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앙-지역의 갈등 뿐만 아니라 중앙당 내부에서의 몇몇 명망가들 사이에서의 갈등도 사태를 혼란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즉, 당 내부의 불협화음을 없애기 위해 기획된 숙청을 집행하는 자들 사이에서도 불협화음이 존재했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증거들은 모두 스탈린 시대마저도 일사불란한 규율로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수정주의측에서는 키로프 암살부터 예조프시나와 예조프의 숙청으로 이어지는 스탈린의 엄청나게 기나긴 계획이 과연 있었는가, 그리고 그 본질적인 목표가 과연 스탈린의 정치-사상적 반대파들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또한 아래의 문단에서 언급되는, "스탈린의 권력 유지를 위한 필요성"으로 대숙청이 진행되었는가에 대한 의문도 던진다. 물론 대숙청은 스탈린 개인의 권력을 인류 역사에 그 전례가 없을 정도로 드높여주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목적이었을까? 흔히 대숙청하면 언급되는 키로프 암살과 이어지는 카메네프-지노비예프에 대한 재판은 아주 자극적이고, 과거의 혁명동지들을 암살 혹은 처형하여 스탈린 본인의 절대 권력을 수립한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좀 더 거시적으로 시야를 넓히면, 관료제 기율의 전국적 확립과 중앙당과 지역당의 위계설정이 스탈린에게는 더 중요한 이야기였음을 알 수 있다. 베버가 말한 "폭력의 독점체"로서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스탈린의 시도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스탈린 개인의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대숙청은 소련 사회의 거대한 정치적, 제도적, 사회적, 경제적 문제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 있는 문제로, 단순히 권력에 미친 독재자의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숙청에 대한 스탈린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를테면 단순히 젊은 세대들이 윗 세대를 쳐내고자 한 운동에 스탈린이 편승한 것이라고 하는 주장이 그렇다. 몰로토프, 즈다노프, 예조프를 조종해서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끝내는 팽해버리는 모든 과정을 지휘한 자가 스탈린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보자면 그가 인간이 아니라 마왕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 사실 대숙청의 키 플레이어이자 당내 급진파의 양대 노선의 대표라고 할만한 즈다노프와 예조프 모두 스탈린과 목표를 공유하는 측면은 분명 있었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뒤를 돌아봤을 때 다들 스탈린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셈이 되어버렸다. 예조프는 말할 필요도 없이 토사구팽 당한 거로 이를 보여주었고, 즈다노프는 살아남긴 했으며 예조프의 노선에 줄곧 반대했으나 결국 예조프의 사업에 엄청난 버프를 걸어준 셈이 되었다. 키로프 암살 이후 즈다노프와 함께 당원 정치교육 사업을 같이 맡아서 그를 핵심 지도부에 끌어온 것도 스탈린이었고, 1937년 2월에 다분히 지역당 지도부를 공격하는 연설로 이 혼란을 촉발시킨 것도 스탈린이었으며, 야고다를 경질하고 예조프를 올린 것도 스탈린이었고, 끝내는 예조프를 죽인 것도 결국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제한된 자료로 인하여 스탈린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어디까지였는가를 파악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참고문헌:
The Great Urals: Regionalism and the Evolution of the Soviet System
Origins of the Great Purges: The Soviet Communist Party Reconsidered, 1933-1938
The Anatomy of Terror: Political Violence under Stalin

Stalinist Terror: New Perspectives
  1. 베를린에서 동명수가 리학수에게 한 말이다.
  2. 참고로 크룹스카야는 스탈린과는 죽을때까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크룹스카야가 1939년 사망했을 당시 스탈린이 그녀를 독살한 게 아니냐는 음모론도 나돌았다.
  3. 식사 도중 스탈린이 보로실로프에게 겨울전쟁의 졸전에 대해 비판하자 이렇게 항의하며 그릇들을 내동댕이쳤다고 한다.
  4. 위 사진에 보이는 서명은 스탈린, 몰로토프의 것이다.
  5. 러시아어에서 '~시나' 라는 어미는 '~의 범죄'라는 의미이다.
  6. 420만 명을 처형했다며, 1991년 연합뉴스 기사 를 근거로 들기도 하는데 이 당시는 소련 해체파(옐친파)들이 소련 국가체제를 디스하기 위해서 엄청난 프로파간다를 일삼던 시절이다. 그 때문에 결국 1991년말 소련은 "만악의 근원" 소리를 들으며 해체되었지만, 현재 그런 프로파간다에 상당히 과장이 들어갔음은 러시아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7. 다만 스탈린은 단신이라고 하기 힘들다. 당시 동유럽의 평균키에 근접한 수치.
  8. 사실 이것조차 생략한 경우가 많다.
  9. 1934년의 제17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했던 1827명의 대표들 중에서 1939년의 제18차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던 생존자는 37명이었다고 한다.
  10. 여기에 대해 무고한 고려인들을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유배했다고 알려졌으나, 조사를 통해 좀 더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실제로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 중에서 친일 부역자들이 꽤 되었다고 한다. 민생단 사건 참조. 그렇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자유시 참변 같은 것을 고려한다면 소련은 변명할 말이 없는 입장이다.
  11. 주세죽은 그래도 처형은 모면했지만 '반혁명적 분자'로 몰려 카자흐스탄 지방으로 유배당했다.
  12. 나치 독일과 스탈린 소련을 전체주의 사회라는 맥락에서 비슷한 류로 보는 입장이다.
  13. 스탈린의 경우 반대표가 292표를 넘었다.
  14. 진격해오는 정규군에 호응하여 적국 내에서 각종 모략 활동을 하는 조직적인 무력집단.
  15. 대숙청과 전혀 무관한 부됸늬나 볼로쇼프, 혹은 자신의 아들들에 대한 보안 문제 간섭이나 숙청과 무관한 병사 내지는 사고사에 대한 보안 문제를 봐서 이 설을 의심하는 의견도 있다.
  16. 10월 혁명으로 자유롭게 허용되었던 동성애낙태는 스탈린 집권 후 다시 범죄가 되었다. 스탈린 체제는 사실 차르 체제와 다름없는 보수적인 체제였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 공산당의 공식 입장은 동성애건 뭐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 어떤 자유도 제한해선 안 된다는 것이였다.
  17. 어떤 식으로 당했냐고? 스페인 내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등으로 단련되고 임무형 지휘체계 등의 우수한 시스템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된 독일 육군, 루프트바페 등의 공격으로 흩어져 있던 소련 육군은 각개격파를 당해 분쇄되고, 공군은 수천기의 비행기가 박살나 버려 제공권을 장악당해 초반에 수백만이 갈려나가 버렸다.
  18. 동일한 내용을, 도·감청이 가능한(= 암호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회선을 통해, 평문과 암호문 모두로 송신하는 행위. 다들 눈치챘겠지만 사실상 적군에게 암호를 알아서 갖다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위이므로 대한민국 국군을 포함한 대부분의 군대에서 금지하고 있는 심각한 보안위규 행위이다.
  19. 우라돌격은 단순 돌격보다는 포병, 공군, 전차등이 동반된 공격이었다. 반자이 어택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또한 위에 나온 상황같은 독소전 초기에는 우라돌격보다는 참호, 대전차포등을 사용한 방어전이 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전쟁 중반기가 되어가며 제대로된 우라돌격 교리가 완성되어 독일을 밀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소련군이 반자이어택 수준의 돌격을 한것은 정치장교의 선동으로 인한것이 주류였고, 그 이외 상황에서는 진지에서 죽거나 도망칠 지언정 반자이어택 수준의 막장까지는 가지 않았다.
  20. 투하체프스키의 경우는 실제로 반(反) 스탈린 음모를 꾸몄다는 설도 있다. 실제로 투하체프스키와 스탈린은 적백내전 당시 사령관-정치장교의 관계 때문에 이후에도 사이가 매우 안 좋았으며, 투하체프스키가 러시아 제국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공산당 내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21. 예고로프는 1939년 2월 22일 감옥에서 옥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재판 직후 즉결 처형당한 투하체프스키나 블류헤르에 비하면 낫겠다 싶기도 하지만 그 기간에 당연히 극심한 고문이 있었으리라고 예측해볼 수 있다. 하여간 옥사로 끝난 것으로 보아 투하체프스키보다는 죄가 덜하다고 판단되었던 모양. 참고로 투하체프스키는 1937년 8월에 처형당했다.
  22. 보로실로프는 스탈린과 굉장히 친해서 그와 접시를 던지며 싸웠다고도 하고 같이 뱃놀이를 갔는데 스탈린이 "너 독일(or 영국) 스파이지!" 하니까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뺨을 때렸다고도 한다. 추가로 니키타 흐루쇼프는 그들이 접시 싸움을 하는 걸 구경했다고 한다. 물론 개인적으로 싸워도 보로실로프는 열심히 스탈린 앞잡이를 했다.
  23. 영어로 Major라고 쓰니 소령으로 번역하는 게 맞지만 당시 소련군의 계급 분류로는 대위부터가 영관급을 가리키는 선임장교에 속했고 Major는 대령의 바로 아래 계급에 해당했다. 소련군에 중령 계급이 분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이다.
  24. 당시 소련 장성 계급은 지휘 가능한 부대 수준으로 표기되어 여단장, 사단장, 군단장, 야전군 사령관(2급 군사령관, 대장급), 전선군 사령관(1급 군사령관, 원수급)으로 구분되었다.
  25. 모스크바 재판의 수석검찰관.
  26. 물론 그 염려라는 게 진짜 트로츠키를 염려한 것인지, 자신들의 후견인이니 지도자가 실각하면 자신들도 피해를 볼 것을 염려한 것인지야 알 수 없지만... 트로츠키가 저 제안을 거절한 것을 볼 때 자발적으로 제안했다는 것은 맞다.
  27. 정확히 따진다면 이후 트로츠키가 대거 영입한 구 제정 러시아군 출신 장교들과는 달리 투하체프스키는 미리 제 발로 입대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제정 러시아군 출신자를 군대에서 배재해야 한다는 레닌이나 다른 혁명가들의 주장에 트로츠키가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28. 혁명 이후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하고 볼셰비키에 맨셰비키 또는 사회혁명당원들을 받아들여줬던 것이나, 과거 부하린과 레닌 사이의 논쟁에 비추어보면 변증법적 유물론을 따르는 레닌으로선 논쟁을 통한 비판에 대해 자유롭게 받아들였다.(단지 혁명 이전에 혁명에 대한 비관론등은 철저하게 비판했지만은) 그리고, 레닌은 소비에트 연방 가입 공화국에게 전면적인 자치권과 독립권을 보장해야한다고 했고 가입 공화국이 탈퇴를 원한다면 자유롭게 탈퇴 해야한다고 본 반면 스탈린은 중앙집권적으로 접근하여 제한된 자치권을 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의 폭에 대한 인식이 스탈린과 차이를 보였다. 게다가 레닌과 스탈린의 "비판에 대한 입장"에 대한 일화로 당 회의때 당원이 스탈린을 비판하자 스탈린이 한 말은 "전 레닌 동지와 다릅니다."였을 정도니...
  29. 러시아어에서 숙청을 뜻하는 Chistka는 정기적으로 질이 안 좋은 당원을 솎아내는 개념에 가깝다 . 방식은 굳이 처형이 아닐 수도 있다.
  30. 1929년 숙청 때 출당 대상자들의 37%가 과음이 사유였다. 역시 보드카국답다.
  31. 공식적으로 스탈린은 당시 1,059표 중에서 3표의 반대표를 받았다.
  32. 사실 변명거리가 없지는 않다. 5개년 계획으로 다들 맡아야 했던 업무의 양이 엄청 무거웠던 건 분명한 사실. 게다가 이때 중앙당에서는 생산량을 맞추라고 맨날 닦달하고 있었으니... 사실 그래서 사라토프와 같은 지역에서는 아예 제대로 하지도 않고 금방 끝내고 치워버렸으며 후에 즈다노프가 이를 보고 매우 어이없어한다.
  33. 이는 간부가 결정권을 독점한다는 의미는 아니고, 이제 산업화 열심히 해서 최신 기술 많이 들여놨는데 기술을 쓰는 간부들의 상태가 노답이다. 그러니 이제 간부의 숙련도가 소련이라는 국가를 다스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규율을 철통같이 강조해야 할 사관학교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여러모로 스탈린이 이 말을 한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내준다.
  34. 소련 장관회의의 전신.
  35. 몰로토프가 오르조니키제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 있다. 바로 오르조니키제의 장례식. 이 날 얄궂게도 몰로토프가 장례식 연설을 맡게 되었는데, 처음엔 오르조니키제를 엄청 칭찬하다가 그가 퍄타코프와 같은 불순분자를 중용한 건 매우 큰 실수였다고 디스(...). 오죽 서로 안 좋았으면 장례식에서까지 그런 말을 하겠는가. 여담으로 오르조니키제가 죽기 직전 중공업인민위원회는 몇 개의 소위원회로 차츰 분리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오르조니키제가 죽자 완전히 공중분해되어버린다.
  36. 이를테면 스베르들롭스크 주의 당 제1서기인 카바코프는 숙청 당할 때 NKVD가 진행한 심문에서 "지역 NKVD 대표 레셰토프가 교체되고 새로운 대표인 드미트리예프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소. 우리 발 밑의 땅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어서 나는 곧바로 나와 나의 동료들의 일들이 밝혀지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라는 것을 이해했소"라고 털어놓았다.
  37. 이를테면 벨라루스 군관구장인 우보레비치는 스몰렌스크가 수도인 자파드나야 주의 당회의에 참여하였다.
  38. 재밌는 건 카가노비치는 우크라이나 출신, 베리야도 조지아 출신, 미코얀도 아르메니아 출신이다.
  39. 다만 이 문단에서 상당부분 참고한 '대숙청의 기원'은 소련의 문서고가 개방되기 이전에 쓰여진 80년대 말의 책이라는 걸 감안하면 지금은 관련한 연구의 진척도가 상당히 높을 것이다. 최신의 논의들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40. 스탈린 본인의 성격이 모든 것을 통제 하에 두고 불확실성을 최대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 사람이었다. 모든 관료제가 예조프시나로 파괴되는 것은 그도 원치 않았을 것이다.
  41. 아마 스탈린 사후 권력투쟁에서 최초로 목이 날아간 사람이 라브렌티 베리야인 것도 마찬가지의 이유일 것이다. "야, 그래도 우리들끼리는 같이 스탈린 밑에서 개고생했으니 죽이지는 않겠는데, 쟤는 안 될 것 같지 않냐?"하는 심리가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흐루쇼프의 승리 이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불가닌, 말렌코프는 한직으로 밀려나 여생을 보내다 죽었지만 베리야는 짤없이 죽었다.
  42. 릐코프는 부하린파의 일원으로 예조프가 그의 숙청을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