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 르블랑

1 개요

1742년 12월 6일, 이부아 르 프레(셰르)~1806년 1월 16일, 생 드니(센 생 드니)

프랑스화학자이자 외과의사. 그는 염전과 바닷물에서 소다 혹은 탄산나트륨을 추출하는 방식을 고안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르블랑 법은 화학산업 시대의 주춧돌을 마련한 것으로 간주된다.

2 생애

외과학을 마친 후, 이수뒨 출신의 이 베리 토박이는 화학자 장 다르세의 아버지이다. 아직도 장 다르세라 불리우는, 그의 제자이다. 르블랑은 1780년에 오를레앙의 집에서 일하는 외과의사가 되었다. 공작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조제프는 그의 화학 스승의 지휘(관리)하에 염전으로부터 소다를 얻으려는 그의 연구(들)에 자금을 대어주고, 그 과정을 운용하기 위해서, 그와 더불어 오를레앙의 집 기금의 관리자인 앙리 세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화학 조교로 있는 디제와 교제하였다.

1789년, 니콜라 르블랑은 탄산 나트륨을 얻었다. 메종 드 센에 만들어진 공장은(생 드니 항구옆에 센느강가에) 1791년엔 인공 소다를 제조하는 곳이었다. 르블랑은 1791년에 특허발명을 받으면서 자신의 발명을 보장했다. 공장에서 1년에 200~300kg의 소다를 만들기 위해서는 오를레앙 공작의 재정지원이 필요했으나,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오를레앙 공작의 재산은 매우 빠르게 격리되었다. 소다 제조에 대해서 생산을 저지당한 것이다. 그 후 1793년, 오를레앙 공작이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자 공장은 문을 닫고 파멸의 길로 치닫게 되었다. 그는 강제적으로 과정을 공개해야 했고 대중은 그의 손실 과정 등을 보고 보상을 강요했다. 그 시점에 상황은 여러가지로 나눠질 수 있다. 그 일을 계속하려면, 르블랑은 공공 구원위원회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라를 위해 모든 비밀을 누설하는 희생. 그는 비밀의 공개를 허용했다.

공장에 자금을 넣는 일은 항상 장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이상한 직업들을 많이 보았다. 1794년에 그는 라부아지에의 실험실에서 그의 물건을 팔기위해 인벤토리 만들기를 강요당했다.

산업생산의 위험은 르블랑을 망쳐놓는데 원인이 되었다. 그는 1806년에 자살하였다.

르블랑 공정은 1830년부터 1870년까지 진일보했다가, 솔베이 공정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인공탄산수를 르블랑 과정을 이용해서 만드는 큰 공장들은 특별히 장 다르세의 아들이자 파리 낭테르에 위치해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장 피에르 조제프 아르세가 관리하고 있다.

미술과 공예를 전공한 선생이자 기계 디자이너인 니콜라 르블랑은 세자르의 아버지이기도한 니콜라 루이 르블랑(1787~183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