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투안 라부아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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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toine-Laurent de Lavoisier 앙투안-로랑 드 라부아지에
1743년 8월 26일 ~ 1794년 5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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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와 부인 마리

1 개요

프랑스가 배출해낸 근대 화학의 아버지인 동시에 악덕 세리

과학자로서는 화학을 진정한 독립학문으로 분리해낸(화학 혁명) 아버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개인을 평가하자면, 순진한 건지 개념이 없는건지 막대한 징세를 통하여 프랑스 대혁명 직전의 양극화에 의한 불만을 가속화시켰다는 비판이 있다. 결국 화학이란 새로운 학문은 물론, 프랑스 대혁명에도 불을 붙이는 등 (...) 워낙 쇼킹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지라, 죽은 이후에도 이래저래 논쟁의 대상이였던 사람이다.

2 생애

과학계의 엄친아로 그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변호사였고 집안은 부유하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처음에는 변호사를 지망하여 법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산소를 발견하여 기존의 패러다임인 플로지스톤 이론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했다. 참고로 다른 학자들도 비슷한 시기에, 혹은 더 빠른 시기에 발견한 학자들도 많지만 나중에 프랑스 대혁명과 아내인 마리의 홍보활동으로 명성이 더욱 커진 점도 있다.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혁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혁명 정부로부터도 존중을 받았으며 혁명 때문에 위험에 처한 동료들을 구해내는 공헌을 하기도 했지만, 공포정치 시대에 체포된다. 죄목은 당연히 불법 징세, 그외에도 혐의 중에는 담배에 해로운 물질을 첨가하여 사람들을 아프게 했다는 것도 있었다. 원래 해롭잖아 다만 이건 증거가 없어 무죄 판결. 아무튼 징세청부업자로 악명으로도 라부아지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당시는 개념박힌 당원들이 혁명 진행에 대해서 싸우던 상황이었고, 걸핏하면 시민군 사령관이 의회에 들어가서 총으로 협박하던 상황이었으니 더욱...

결국 이런 이유 때문에 1794년 5월 8일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졌다. [1] 그의 죽음에 수학자 라그랑주는 "그들이 이 머리를 베어 버리기에는 일순간으로 족하지만, 같은 두뇌를 만들려면 100년도 더 걸릴 것이다."[2]라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리가 앙투안 라부아지에의 구명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는 외면했고 결국 마리는 그와 관계를 끊었다. 하지만 라그랑주는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프랑스에서 활동한 수학자이다. 그는 프랑스 혁명으로 민족주의가 끓어오르는 시점에서 외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프랑스에서 쫓겨날 뻔하기도 했는데, 이 때 다름 아닌 라부아지에의 비호로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은인인 라부아지에를 외면한 셈이지만 사실 라그랑주는 보호자인 셈이었던 라부아지에까지 처형당하는 상황에서 남을 구명하거나 하는 활동을 할 처지가 못 되었기에 그를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만일 그가 영국이나 프로이센 국민이었다면 혁명 정부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강대국의 주민이니 구명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 배은망덕이겠으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어도 딱히 막아줄 수도 없는 이탈리아 출신이니 더욱 그렇다.

3 악덕 세리 라부아지에

아니... 아무리 해 먹어도 이정도나 해먹냐?

-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가 라부아지에의 부당수입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3]

넌, 단두대도 아까워.

- 조제프 몽골피에[4]가 피고석에서 비아냥대며

라부아지에는 분명 과학자로서의 업적은 출중했지만, 행실은 그리 깨끗하다고 보기 힘들었는데, 부친의 의도로 신분 상승을 노려 세금 징수 조합에 가입해서 징세청부업자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세리라고 더 잘 알려져있는 징세청부업자는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고대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 구체제(앙시앵 레짐) 당시의 징세청부업이 얼마나 중세적인 직위였는지를 설명하자면, 일단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고 대신에 일정지역 일정기간에 대한 세금 징수권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심지어 세금을 얼마나 거두느냐는 거의 자유 재량이나 마찬가지였고, 일반적으로 이들이 거두는 세금은 국왕 직할지에 비해서 적어도 2배가 넘었다. 국왕보다 더한 놈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이야말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 있게 해준 1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라부아지에는 징세수입으로 매년 15만 리브르, 21세기의 시점에서 보면 약 1500만 유로(약 220억원)에 해당하는 말도 안되는 거액을 벌었는데, 이것이 그가 다이아몬드를 사서 돋보기로 태워본다든가 돈지랄[6] 개인 실험실을 구입하는 등의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근간이었다.

특히 자신의 징세활동에 질량 보존의 법칙을 응용하여, 파리 전체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통행세를 걷으면 확실하게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이론을 실천에 옮겼다.[7] 대한민국에 비유하면 웬 재벌회장이 서울특별시 전체, 혹은 특정 구나 동 등의 주위에 담벼락으로 둘러쳐놓고, 차를 타건 걷건 간에 빠져나가는 사람에게 강제로 통행세를 걷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8] 오죽하면 쟈크 샤를(샤를의 법칙을 만든 과학자)이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라고 반발할 지경이었다. 당시 라부아지에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통행세 사례는 그가 저지른 가렴주구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당연히 이 징세청부업자들은 프랑스 혁명 기간에 1차로 처형대에 오르기 시작한다. 라부아지에는 그 중에서도 악질로 이름을 날렸다. 혁명정부도 세금을 거두는 것 자체는 범죄가 아니었기에 정말 필요한 액수만 세금을 거둔걸로는 죄를 묻지 않았지만 그런 징세청부업자는 없었고, 라부아지에도 징세청부업을 해서 처형당한 게 아니라, 원래 거둬야 할 세금의 3배나 거둬서 처형당한 것이다. 혁명 재판소에서 라부아지에의 연수입 15만 리브르 중 10만 리브르, 즉 전체 수입의 2/3가 부당이익이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가 얼마나 악랄하게 빨아먹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초창기 과학원리를 세금에 그대로 대입하다니 사회에 입힌 타격이 대체 얼마일지(...)

이를 두고 야사에서는 혁명 지도자인 장 폴 마라가 원래 과학계에 진출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심혈을 기울여 쓴 논문이 라부아지에에게 까여서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마라는 의학 쪽으로 라부아지에와 계통이 달랐고 아무리 혁명재판 시절이라지만 혁명가의 개인적인 원한을 갚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처형하는 것은 마라에게도 큰 부담이였다. 그리고 징세업자들은 애초에 프랑스 민중들의 공적이였고, 라부아지에는 그중에서도 불필요한 개인세금을 남발해 프랑스 국민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데 앞장선 시점에서 혁명에 직접적으로 불을 붙였으니 죽을 이유는 차고도 넘쳤던 셈. 참고로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등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재판관 중 수석 재판관인 코피나르만 봐도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혁명은 신속한 재판을 원하고 있다!"(또는 "우리에겐 과학자가 필요하지, 탐관오리는 필요없다!"라고 바뀌기도 한다.)고 말하며 결국 사형선고를 내렸다.

4 아내 마리 안느 라부아지에

여담으로 라부아지에 사후 그의 부인인 마리 안느 라부아지에가 남편의 유고를 정리했고, 지금 그의 업적이 알려진 것은 그녀의 공로가 컸다. 금슬이 원체 좋아서 같이 실험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 라부아지에가 27살때 결혼했는데 그때 마리의 나이는 14살.이 로리콘 놈들!! 함께 세금 징수일을 하던(나중에 같이 처형된다) 자크 폴즈의 딸로 결혼 전 이름은 마리 안느 피에레트 폴즈였다. 50살(!) 먹은 남자 다메르발(d'Amerval) 백작의 신부가 되게 생기자 이를 막으려던 자크가 동료들에게 딸과 결혼해줄 걸 요청해 이를 받아들인 라부아지에가 신부로 맞이했다. 일종의 정략 결혼이었던 셈이지만, 같이 생활한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상적인 부부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실험실에서 같이 실험하는게 연애질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내인 마리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남편의 사형을 반대하는 데 가담하지 않은 남편의 친구, 동료 들과는 평생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고 한다.[9] 참고로 위의 라그랑주도 라부아지에가 사형판결을 받을 때 쥐죽은 듯 있었던지라 저 말을 하고도 마리에게 백안시당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사회 분위기에서는 해외에서 거주하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프랑스 국내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용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라부아지에의 죽음을 결사반대하고 자비를 요청한 사람은 대부분 해외에 있거나 외국인. 그것도 영국이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출신이라서 혁명 정부조차도 최소한의 개념 덕분에 쉽게 잡아들이거나 죽일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영국 화학자 헨리 캐번디시는 라부아지에를 살려주면 거액으로 보상하겠다는 요청을 했었다. 물론 이 요청은 무시당했지만 부유한 귀족이자 화학자로 명성이 자자한 캐번디시는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라부아지에를 영국으로 망명시키는 방안까지 기획했었다고 한다. 참고로 캐번디시는 후작 집안 태생이었고 외할아버지는 켄트 공작가로부터 재산까지 물려받았다. 그러다보니 권력과 재산은 상당했지만, 그는 독신으로 살면서 자식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 대신 화학자들에 대한 교류와 투자, 도움을 엄청 줬기에[10] 라부아지에를 그가 맡았더라면 영국 과학계의 역사가 달라졌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죽은 뒤 모든 재산에서 자료까지 혁명정부가 압수하여 다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몇 달 안 가서 자코뱅 정권이 무너지면서 인류사에 고맙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리도 남편처럼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남편이 죽고 한 달도 안 돼 6월에 구속되어 교도소에 갇혔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코피나르와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무죄 판결을 받아 두 달 만인 8월 17일에 풀려났다. 다만 혁명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과격했던 자코뱅당만 자른 것이었기에 라부아지에의 유죄는 뒤집어지지 않아 결국 부당이득으로 취득한 재산은 전부 몰수됐고, 다만 기록과 자료만 1796년 마리에게 다시 돌려줬다. 그리고 이걸 평생에 걸쳐 세상에 알렸다. 공동 장례식으로 아무렇게나 묻혀진 남편 유해도 다시 찾아서 제대로 장례식을 치뤘는데 이때 3천 명이 넘는 전 세계 화학자들이 참석했다. 물론 이 자리에 라그랑주와 푸르크루아를 비롯한 이들도 참석했지만 앞서 말한대로 그녀는 대꾸도 하지 않고 무시했으며 그들의 남편에 대한 연구자료 및 기록에 대한 공동 연구 제의를 분노어린 얼굴로 즉각 거부했다. 이때, 더 이상 남편의 자료를 욕심내지 말라는 말을 한 것이 이들에게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 유일하게 한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던 게 미국 출신으로 특이하게 유럽으로 와서 독일에서 백작 작위를 받은 미국 화학, 이공학자인 벤저민 톰슨(1753~1814)[11]이었다. 결국 그와 1804년에 재혼하게 되었지만 4년 만에 이혼한다. 톰슨은 그녀는 여전히 전 남편을 잊을 수 없었기에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마리는 이전처럼 그대로 전 남편 라부아지에에 대한 걸 알리면서 살아가다가 1836년 80살로 라부아지에를 따라갔다. 이런 기록을 보면 정말이지 라부아지에를 사랑했던 모양이다. 성공한 로리콘

이렇게 뒤늦게 아내에 의하여 세상에 알려진 라부아지에. 화학자에서 정해진 용량으로 실험한 최초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예전에는 그냥 눈짐작으로 대충 실험하는 물질 용량을 때려맞춰서 실험했는데 라부아지에는 정확하게 무게를 재면서 실험을 했고 그걸 기록하였다. 세금을 좀 정량적으로 거두지 즉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징세청부업을 맡아 말도 안 되는 세금을 거둬 프랑스 국민들의 고혈을 쥐어짠 과오는 별도로 평가되어 비판받아야 할 것이며, 현재로 라부아지에는 과학자이자 범죄자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5 기타

한편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후원자였던 혹은 직접 과학연구를 하던 귀족들[12]프랑스 혁명때 줄줄이 처형당하자 스폰서가 끊긴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후원자들을 찾아서 영국오스트리아 등지로 넘어가거나, 연구자금이 없어서 그냥 조용히 지내게 된다. 라부아지에의 제자 중 하나인 뒤퐁이 대표적으로 미국으로 망명길에 오른 후 엄청난 화학 회사를 차려 버리는데, 그게 바로 세계에서 2번째로 큰 화학 회사이자 합성고무, 나일론, 테플론 등을 개발한 듀폰 그룹.

본인뿐만 아니라 후대에 끼친 영향 등을 생각해볼 때 엄청난 과학자 중 하나. 거꾸로 산소나 화학 비슷한 이론을 발견한 다른 나라의 학자들은 묻히고 라부아지에의 이름만 남았으니, 허무한 최후를 제외한다면 시대의 덕을 봤던 과학자라는 평가도 가능하다.

게다가 징세청부업에 종사하면서 프랑스 혁명의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고, 죽음이 자업자득이며 자코뱅당이 몰락한 뒤에도 복권되지 못했기 때문에[13] 현대 사회에서는 평이 좋은 것만은 아니며, 업적과 과오가 모두 존재하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화학계의 마오쩌둥이라고 할 수 있을 듯.

1756년에 니콜라 루이 드 라카유라는 프랑스의 천문학자가 화학실험로를 발명한 라부아지에의 업적을 기리며 자신이 발견한 별자리화로자리(화학로자리라고도 한다)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 덕분에 화로자리는 주로 그리스 로마 신화등에서 유래된 다른 별자리와 다르게 비교적 근대의 인물과 관련된 별자리가 되었다.

학습만화 Why?의 화학 편에선 악덕 세리였던 라부아지에의 모습은 언급 안 하고 단순히 프랑스 혁명의 물결 속에 귀족이란 이유로 처형당한 안타까운 과학자로 미화되었다(...).[14]
  1. 그와 같이 일했던 세금 징수원들과 같이 죽었는데 그는 죽을 때 조용하게 유언은 아내에게 편지로 남겼다면서 차분하게 죽었다고 한다. 죽기전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로 아직도 못다한 실험이 있는데... 하는 아쉬움과 같이 자길 외면한 동료들에 대한 원망, 그리고 잘 살라면서 아내를 걱정하며 사랑한다는 모든 마음을 정리하여 편지로 남겼다.
  2. 하지만 자크 샤를과 몽골피에 형제(열기구로 유명한 과학자)는 오히려 혁명정부에서 대접했다.
  3. 참고로 이 양반은 오히려 세금제도를 개혁해서 빈농들의 부담을 덜어줄 것을 시도했다. 더불어 왕실의 분식회계를 폭로하고 이를 공개하여 왕가와 귀족계에서 찍혀 장관 자리에서 쫓겨났다. 그래서 당연히 살아남았고 천수를 누렸다.
  4. 열기구를 만든 발명가.
  5. 성경에 등장해서 모든 이들에게 욕먹는 직업 세리가 바로 이 징세청부업자이다.
  6. 물론 아무 의미없는 실험은 아니다. 매연 같이 오염물질에 태우려는 물질이 오염되지 않게 하면서 태우는 실험이다. 그래도 돈지랄인 건 부정 못 한다(...)(출처 : 비주얼박물관, 웅진미디어)
  7. 돈은 소멸하거나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파리를 나가거나 들어오는 사람이 없다면 파리 내부의 돈 양은 일정하다. 그러므로 파리로 들어오는 돈의 양이 파리 전체의 수입, 파리에서 빠져나가는 돈의 양이 파리 전체의 지출로 볼 수 있다. 이런 논리는 물리에서 널리 쓰이는 연속방정식(continuity equation)이나 가우스 법칙과 상통한다. 이걸 세금에 쓰지 말란 말이야 사실 당대의 과학이 어디까지나 높으신 분들의 취미생활 취급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훌륭한 덕업일치다. 또한 파리 전체를 감시하는 것보다는 파리 경계만 감시하는 것이 월등히 간편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만 좋은 것이 아니라 실용적(...)이기도 하다.
  8. 지금도 받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지금 걷는 것은 도시 출입에 대한 통행세가 아니라 도로 이용료다. 즉, 세금이 아니라 엄연히 물건을 사용하고 내는 돈이다.
  9. 뒤늦게 그의 시신을 다시 묻으면서 당시 참석한 화학자 앙투안 푸르크루아(1755~1809)는 라부아지에는 화학의 신이었다며 뒤늦게 애도를 표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아내 마리는 말 그대로 무시하고 대꾸도 안했다. 그도 라그랑주처럼 외면했기 때문.
  10. 캐번디시는 산소를 발견(다만 그보다 먼저 산소를 발견하고도 스웨덴인이라고 하여 잘 알려지지 못한 비운의 스웨덴 과학자 칼 셸레(1742~1786)가 있었다...)하고 지우개를 발명한 과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프랑스 혁명을 지지하다가 왕당파에게 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를 미국으로 망명시킨 적도 있었다. 이를 볼 때 캐번디시가 라부아지에를 구하려고 한 것은 딱히 정치적인 의도가 없이 정말 동료 과학자를 구하겠다는 순수한 의도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캐번디시는 말 그대로 정치나 사교에는 거의 관심 없이 그냥 과학 연구에 환장한(?) 인물이었다.
  11. 간첩 혐의를 받아서 유럽으로 망명했다 한다. 백작작위 받은 이름이 "럼퍼드 백작" 이라서 럼퍼드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마찰로 열이 만들어지는 것을 증명한 "럼퍼드의 대포 실험" 처럼. 참고로 이 사람이 남긴 유산으로 만든 학교 중에 하나가 웨스트포인트(...)
  12. 그 당시 과학자들은 라부아지에처럼 부유한 부업을 갖고 있지 않는 이상 과학자 후원을 취미삼는 귀족들 밑에서 일하는 게 보통이었다.
  13. 자코뱅당이 숙청된 뒤 과도 정부 하에서는 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처형되는 등, 무차별 숙청을 당한 사람들의 상당수나 처벌 대상자의 가족으로 연좌되면서 처벌 대기중이던 사람들이 사면 및 복권되어 풀려났지만, 라부아지에는 가렴주구로 프랑스 국민들의 고혈을 쥐어짠 죄가 너무 명백해서 용서를 받을 수가 없었다. 위의 연구 결과를 돌려주는 데만 2년이 걸렸다는 건 온건파 인사들 사이에서조차 라부아지에는 죄인이라는 인식이 명백했음을 의미한다.
  14. 사실 이 학습만화뿐만 아니라 라부아지에를 소개하는 대부분의 국내 문서들은 다 저런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