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항목 : 참수형
斷頭臺
Just attack tw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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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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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요틴(Guillotine). 처음에는 루이제트(louisette)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가 언젠가부터 기요틴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발명된 희대의 사형기구. 참수형의 발전형으로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두대(斷頭臺)라는 것은 그 용도에 의해 의역(意譯)하여 붙인 이름이고, 서양에서는 조제프-이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박사의 이름을 따서 기요틴(Guillotine)으로 부른다. 그가 발명한 것은 아니고, 단두대를 보고 '그나마 인권이 보장되는 사형기구겠구나' 해서 이걸로 사형시켜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해 이름이 붙은 것. 이때의 주장은, 같은 죄를 지었다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동일한 형벌을 받게 하자는 것. 참수형을 할 때 뇌물을 주고 안 주고에 따라 위력을 달리하는 관행이 있던 것을 생각하면, 단두대는 그런 관행이 거의 적용되기 힘들기 때문에, 평등하다면 평등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본래 대학교 해부학 교수였기 때문에, 인체를 어떻게 잘라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몸을 고정시킨 다음, 떨어지는 칼날의 무게를 이용해 목을 자르기 때문에, 별다른 기술과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며, 필요한 에너지는 칼날을 끌어올리기 위한 약간의 노동과 처형인을 틀에 고정시키는 정도의 수고뿐, 나머지는 간단한 물리법칙으로 끝난다. 작동은 순식간이기 때문에 고통이 없다고 하나, 이는 아직도 논란거리다.
2 목이 잘리면 어찌 되는가?
죽는다 목이 떨어졌을 때 바로 의식을 잃느냐 마느냐에 대한 연구자료가 한 가득 나오는데, 대부분 집행당하는 사람에게 잘린 다음 의식이 있으면 눈을 깜빡여 달라고 부탁하는 등의 원시적 실험에 근거하기에, 신빙성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의학계 소견으로는, 절단되는 순간 혈류가 멎어 뇌 활동이 바로 정지된다는 것이 대세이기는 하지만, 잘린 순간에는 피가 뇌에 남아 있고 천천히 흘러나오기 때문에, 의식이 있을 수도 있다는 모호한 상태이다. 잔류 혈액으로, 산소가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뇌에 공급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앞으로도 밝힐 수 있을지도 의문인 상황.
실험적인 방법으로, 1905년에 발표된 논문으로 '의사가 잘린 목에 대고 그의 이름을 불렀더니 잠시 눈을 뜨더라'라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의식적으로 움직인 것인지 사후경련인지 밝히는 데는 역부족인 방법이라 지지받고 있지는 못 하다. 말해 보라는 것이 제일 확실하지만, 발성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폐와 목근육이 없으면 불가능하므로 잘린 상태에서는 불가능.
자세히 설명해보면, 1905년, 보리오라는 의학박사에게 한 사형수의 처형 직후에 목을 조사할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의사의 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목은 절단된 경부(頸部)의 평면을 바닥으로 하여 직립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목을 세우기 위해 손을 쓸 필요가 없었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사나이의 눈썹과 입술은 5, 6초 동안 불규칙적으로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이윽고 얼굴이 이완되고 눈이 반쯤 열리더니 백안(白眼)이 보였다. 큰소리로 상대 이름을 불러 보았다. 눈두덩이 조금씩 열렸으나, 수축되지 않았으며 — 이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 잠을 자거나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 흔히 볼 수 있듯이 조용하고 정확하게 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인(囚人)의 눈은 나를 응시하며 동공이 좁아졌으나, 죽은 자에게서 볼 수 있는, 표정 없는 흐릿한 눈은 아니었다. 나를 응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살아있는 인간의 눈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은 점점 닫혔다. 다시 한 번 크게 이름을 불러보았다. 또 눈두덩이 뜨이며 나를 응시하다가 다시 감았다. 세 번째 불렀을 때는 반응이 없었다. 눈두덩을 펼쳐 보았더니 눈은 움직이지 않는 유리알과 같았다. 목이 잘린 지 약 30초 후였다.[1]
물론 동체에서 절단된 머리에 잠시 의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건 현대의 의학전문가들의 의견은 일치되지 않는다. 다만 산소가 통하지 않은 뇌가 1분 후, 늦어도 2분 후에 죽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잘린 머리가 자신의 참상을 인식하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그리고 실험 등을 통해 이를 확인할 방법은 있긴 있겠지만, 여러 여건 상 그럴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따라서 도시전설이고 뭐고 간에 이에 대한 정답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목 잘린 당사자는 알겠지만 곧 죽는다는 게 함정
때문에 별별 희한한 괴담이 나오기도 했다. 잘린 머리가 움직이거나 말을 했다는 것부터, 심지어는 잘린 몸통이 일어나기도 했다는 것. 물론 닭#s10 문서에 나오듯 닭이라면 완전히 불가능은 아니다.(...) 읍읍 물론 닭이 아닌 사람은 불가능에 가깝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잘린 몸통이 일어나 몇 걸음 걸어가기까지 했다는, 영웅담일지 괴담일지 모를 호걸들에 대한 전승이 있긴 하다.[2] 하지만 몸이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말을 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발작 정도면 모를까 몸은 척수반응 정도를 제외하곤 뇌의 명령이 있어야만 움직인다. 또 목소리는 성대가 있어야 하니 잘려나간 머리가 말을 하는 것도 불가능.
3 왜 발명되었는가?
기요틴이 발명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사형수의 인권과 평등을 위해서 발명되었다. [3] 프랑스 혁명을 전후로 범죄자의 인권과 처벌의 평등이 중요한 논쟁이 되었는데, 특히 그 중 논란이 된 것은 혁명 당시 '범죄자를 교수형에 처해야 하느냐, 아니면 참수형에 처해야 하느냐?' 였다.목졸려 죽을래, 목잘려 죽을래? 지금이라면 예송논쟁급 개소리로 들리겠지만, 이는 유럽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논쟁인 것이, 숙련된 기술자(참수인)가 한번에 "고통없이" 보내주는 참수형은 나무에 매달려서 온갖 모욕이란 모욕은 다 받으면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십자가형보다 더 나은, 그나마 명예를 지킬 수 있는처형으로 보던 로마시대의 인식[4] 이 중세를 거치며 그대로 이어져 "참수형은 귀족, 교수형은 평민"이라는 처형법의 전통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물론 '왜 범죄자를 끌어올리는 것이냐?', 혹은 '귀족을 인정하라는 거냐? 전원 교수에 처해 모두 평등하게 끌어내려야 한다!'는 반론도 있었지만 기요탱 박사 등이 범죄자에 대한 인도적이고 고통이 적은 처형을 주장했고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형수에 대한 참수형이 결정되었는데, 이 참수형을 대체할 목적으로 발명된 게 바로 단두대이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유교의 신체발부 수지부모 사상 때문에 참수형이나 거열형 같은 신체를 분리하는 신체훼손형벌이 교수형이나 사약 같은 정적인 사형보다 더 잔인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현대에도 교수형 이나 총 등으로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
기요틴 도입을 두고 프랑스 혁명 때문에 사형 수요가 많다거나 참수가 어렵기 때문에 도입되었다고 알려진 경우도 많은데, 이 논리는 도입목적이 아니라 단두대 도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논리였다. 위 논쟁이 "전부 참수"로 결정난 후에도 기요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도입 당시 시민들은 기요틴으로 처형하면 참수형보다 고통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 이유는 유럽을 비롯한 많은 전근대 국가에서 사형집행은 참수든 교수든 마을 사람들에게 오랜 오락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사형을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특히나 참수형이 진행되면 사람들은 사형수의 피와 기름 등을 가져가려고 노력했다. 참수형이 처형 방법이 된 것은 이 때문도 있었다. 그런데 참수형을 기요틴으로 바꾼다니까 불만이 심했던 것. 한 마디로 그 시절 사람들에게는 마치 우리 시대에서 연극이나 영화를 중단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걸 설득하기 위해 동원된 것이 당시 파리의 사형집행인들로, 이들은 소수의 사형집행인들로는 처형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시민들을 설득했고, 실제로도 참수형은 물리적으로는 고도의 전문 기술 + 전문 도구 + 집행 시간이 필요하고, 집행인이 직접 목숨을 빼앗아야 한다는 점에서 사형집행인에게 정신적 고통을 동반하는 처형법이며, 당연히 집행비용과 실패할 확률이 높은 비효율적인 처형수단이였다. 때문에 시민들은 단두대의 도입이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단두대는 당시 시민들의 의식과 사형도구의 도입 명분의 합의가 이뤄진 결과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이후 기요틴의 용도를 봤을 때를 생각하면 매우 아이러니한 사실로 보이나, 그 당시에는 실제로 수레바퀴형, 능지처참형, 기타 고문을 동반한 처형에서 단두대 참수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 역시 매우 급진적인 진보였다. 때문인지 프랑스에서는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단두대형이 사용되었는데 1977년에 프랑스의 마지막 사형집행인 Hamida Djandoubi의 사형집행도 단두대형으로 집행했다. 그뒤 1981년에 프랑스에서 사형제 자체가 폐지되었고 결국 프랑스는 사형제가 사라질 때까지 단두대형을 폐지하지 않았다.
4 해외로 수출된 단두대
이렇게 도입은 나름 인권과 관련되어 이뤄졌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당대 사회적 변화와 함께 급증하던 범죄와 엄벌 분위기가 결합해 난무하던 사형을 최대한 신속하게, 대량으로 집행할 목적으로 확산됐다. 어차피 죄수들의 고통을 보며 재미있다고 열광하는 것은 전근대 사회가 아니라면 소위 사이코나 인터넷의 찌질이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고, 현대 사회로 넘어오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형을 찬성하더라도, 신속하고 고통이 적은 사형집행을 원하게 마련인데, 그런 대중의 요구와 여전히 남발되던 사형의 현실 등과 맞아떨어졌던 것.[5]
프랑스 외에는 인접국들이었던 벨기에와 독일에도 도입되었는데, 독일어로는 팔바일(Fallbeil-떨어지는 칼날)이라고 한다. 독일에서 원래 정치범에게는 주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단두대형은 일반 흉악범에게 사용되었으나, 히틀러 치하의 제3제국에서는 즉결재판으로 사형을 언도받은 정치범의 처형에도 엄청나게 많이 사용되었다. 유명한 반나치 비밀결사였던 하얀 장미의 단원들도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았고, 패전 후에도 사형이 폐지되는 1949년까지 중범죄자 처형에 그대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나치의 경우 피형자를 엎드리게 해서 얼굴을 밑으로 가게 하는 프랑스식이 아닌, 피형자가 칼날을 똑바로 보도록 눕히는 방식으로 집행해서 죽음의 공포를 극대화 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부터 나치시절까지 단두대 처형을 전문적으로 도맡아 집행하던 사람으로 요한 라이히하르트(Johann Reichhart,1893~1972)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자신이 처형한 3,165명의 이름과 처형 시기를 기록해 놓았다. 처형된 죄수들 중 대부분(2,876명)은 1939-1945년 동안 나치가 2차대전을 일으키고 막장으로 치달을 때 처형당한 자들로, 흉악범도 있지만 상당수는 정치범이나 저항 세력 구성원들이다. 하얀 장미 단원들의 처형도 이 사람이 집행하였고, 나치가 유럽을 점령하자 유럽 각지에 단두대를 트럭으로 싣고 다니면서 (주로 나치에 반항하다가 체포된 자들의) 처형을 집행했다. 물론 정치범만이 아니라 연쇄살인, 유괴살인 등을 저지른 중범죄자의 사형도 집행했다.
라이히하르트는 종전 직후 나치 부역 혐의로 란츠베르크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애당초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사형을 집행하는 임무만 맡은 사람[6]이라, 엄한 처벌이 사실상 불가능했으므로 얼마 후 석방된다. 풀려난 뒤에도 계속 그 교도소에 상주하며, 연합군 측 사형 집행관들을 도와 156명의 나치 전범들을 처형했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은 피고인들의 처형에도 협력했다(다만 나치 전범들은 교수형). 이 사람은 처형을 집행할 때 꼭 전통적인 집행관의 복장[7]을 갖추고 사형장에 나타났다고 한다.[8]
왠지 종전 후에도 계속 애용되었다. 단 서독에서는 나치가 무너진 뒤에는 사형제도 자체가 이전처럼 흉악범만 처형하는 용도로 돌아가, 1949년, 살인범 리하르트 슈흐(Richard Schuh)의 처형을 마지막으로[9] 사형제도 폐지와 함께 그대로 사라졌지만[10], 동독에서는 소리도 없고 좋다는 이유로 1965년까지 슈타지가 애용하였다. 물론 여기도 대부분 살인범만 집행됐는데,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아우슈비츠의 군의관이자 SS 단원이자 인간같이 생긴 악마인 호르스트 피셔(Horst Fischer)이다. 다만 동독의 사형제도가 1981년에 없어졌고, 다른 공산권 국가들은 단두대를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소련의 압력이 중간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교황령에서도 1816년부터 이걸 도입해서 썼다. 특히 '마스트로 티타'라고도 불렸던 사형 집행인 조반니 부가티(Giovanni Bugatti)가 이것의 대가로 명이 높았다. 훗날 마짜텔로(Mazzatello)라는 형법과 병행되는데, 이 마짜텔로라는 게 긴 나무망치로 죄수의 머리를 세게 쳐서 죽이는, 19세기에 존재하기엔 매우 야만적이고 효용도 안 좋은 정신 나간 형벌이었다. 심지어는 잘 죽지도 않아서, 나이프로 쓱싹쓱싹(…)하는 과정이 따로 필요했다고[11]. 때문에 이 단두대가 훨씬 더 많이 쓰였다.
벨기에에서는 앤트워프에서 도입하여 쓰였다. 1798년 수입(?)한 이후 1856년까지 19번의 단두대 처형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처형된 사람은 살인범 프란시스 콜(Francis Kol)이었다. 룩셈부르크에도 도입되었다.
의외로 스위스에서도 도입하였다. 참수검이 너무 잔혹하다고 폐지한 뒤 단두대를 들여온 것인데, 마지막 처형은 1940년에 살인범 한스 폴렌바이더(Hans Vollenweider)가 옵발덴에서 처형된 것이다. 참고로 스위스는 참수검을 마지막으로 처형에 사용했던 동네이기도 하다.
스웨덴에서는 딱 한번(…) 사용된 적이 있다. 1910년, 살인죄로 사형된 요한 알프레드 안데르손 안더(Johan Alfred Andersson Ander)[1]라는 사람이 그 주인공이다. 근대화되는 유럽 속에서 도끼 참수형을 유지하기 어려워지자 프랑스에서 도입한 건데, 마침 딱 한번 사용하고 그해 스웨덴에서 사형제가 없어졌다.(…) 참고로 이 안더라는 사람이 참 비범하기 짝이 없는 인물인데 사형 날 아침이 되자마자 동료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전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마치 기쁘다는 듯이 "굿 모닝 에브리바디!"하고 외쳤다고 한다(…).
아시아에서도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사형 집행에 쓰였는데, 이후 베트남이 독립하게 되면서 북베트남에서는 단두대형 대신 총살형이 도입되었고, 현재의 베트남에서는 약물주사형을 사용하고 있다(다만, 남베트남에서는 1975년 패망 당시까지 단두대형으로 사형 집행). 알제리에서도 알제리 전쟁 때 프랑스가 알제리 독립군을 처형하는 데 썼지만,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면서 역시 사라졌다. 종주국 프랑스에서도 시대 변화에 따라 이것조차 너무 잔인하다는 비판 여론이 많았는지, 단두대를 이용한 공개처형은 독일 출신의 연쇄살인범 오이겐 바이트만에게 집행한 1939년 이후 사라지게 되었다. 단두대형은 이후 교도소 내의 처형장에서 비공개로 집행되었는데, 이것도 1977년에 튀니지 출신 강도살인범 아미두 자누비에게 마지막으로 집행한 뒤, 집행 방법으로 존속하긴 했으나 추가 시행은 없었고 1981년 사형제가 없어짐에 따라 같이 사라졌다.
중국에서는 판관 포청천에서 보듯이, 단두대 대신 커다란 작두로 죄인의 목을 자르는 것 같지만, 이는 드라마상에서 처형 장면을 얼버무려 생긴 착각이며, 작두는 실제로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항목 참조. 역시 흔히 쓰인 편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1996년 더그 테퍼(Doug Teper) 조지아 주대표가 전기의자를 이 물건으로 바꾸자는 계획을 제안했는데,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무산되었다. 다만 전기의자나 약물주사형, 교수형, 총살형 등도 그다지 인간적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사형이라…[12]
5 오해
기요탱 박사(1738~1814)는 위에서 말했듯이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이 아니며, 단두대에 사형을 당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기요탱은 귀족임에도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지 않았는데, 혁명의 시작인 '테니스 코트의 맹세' 당시 삼부회 의원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직접 마련해주는 등 혁명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무사했으며, 나폴레옹 정권 시절에도 고위직으로 잘 살다가 당시로선 장수한 76살까지 살다 갔다.
하지만 오류와 망상으로 가득한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이 잘못된 설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성이 기요탱인 다른 사람이 단두대에서 사형당한 적이 있어서 1861년에 쓰인 영국 소설 《필립의 모험》(윌리엄 M. 새커리 지음)에서도 기요탱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걸로 보아 오래전부터 이런 설이 전해져 옴을 알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나 유럽에선 그가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소문이 워낙에 정설로 전해져서 불쾌해하던 기요탱 집안은 기요틴이란 이름을 바꿔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실패하면서 성을 아예 갈아버렸다고 한다.
사실 단두대를 발명한 사람은 외과의사인 앙투안 루이(Antoine Louis, 1751~1825)이다. 처음에 불리던 단두대의 이름인 루이제트(louisette)는 바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던 이름이다. 루이는 아이디어를 생각했고 다른 6명이나 되는 기술자들이 여러 번에 걸쳐 만들고 개량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독일인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루이를 비롯하여 7명 그 누구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하지 않고 다들 제 명대로 살다가 갔다. 발명자가 토비아스 슈미트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수정바람.
6 잡다한 사항
단두대의 발명자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이것 말고도 있다. 처음 개발된 단두대는 날이 반월 모앙이었는데, 기요탱 박사는 이것을 국왕의 측근들에게 보여주면서, 앞으로 힘 안 들이고 사형을 집행할 시대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루이 16세가 직접 그 축소모델을 시찰하게 되었는데, 반월형 칼날을 보고 루이 16세는 "이렇게 반월형이면 중간에 목뼈가 걸려서 쉽게 안 죽어. 그러니까 이렇게 약간 기울어진 칼날로 바꿔보는 게 어떤가?"라 말했다고. 오랜 기간 열쇠와 자물쇠 칼날 쪽으로 취미를 두고 있던 루이 16세의 전문가적 조언이었다.
쉽게 말해서 단두대의 최종 디자인 감수자는 루이 16세였던 것이다. 잘 알려진 소문인 '단두대의 발명자는 단두대에서 사형당했다'는 말의 주인공은 사실 루이 16세일 수도 있는 것. 하지만 이것은 여러 이야기들 중 하나일 뿐, 공식적인 역사적 진실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다.
놀라운 사실은 프랑스 왕과 왕비가 이걸로 목이 베어진 게 소문나면서, 유럽 전역에서 장난감까지 나왔다는 것. 그것도 놀랍게도 진짜 칼날을 넣은 작은 단두대 미니어처였다. 미쳤냐 이 정신 나간 물건은 인기리에 팔렸는데, 당시 아이들이 벌레를 잡아 이걸로 베어 죽이거나, 심지어 손가락을 넣고 놀다가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까지 벌어진 탓에, 반발도 커서 허겁지겁 제조 및 판매를 금지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아들에게 선물할 단두대 장난감을 사주려고 했더니 제조가 금지되어서 찾기 어렵자, 어머니에게 어찌 구할 수 있느냐는 편지를 보냈다가, 어머니에게 호되게 꾸짖는 편지를 받고 사과편지로 답장해야 했다고 한다.요즘처럼 중고시장이 활발한것도 아니고...
단두대에 사용되는 날은 그 무게가 수십Kg에 달하며 100kg가 넘는 것도 존재한다. 날을 이렇게 무겁게 하는 이유는 이게 사람이 내리쳐서 참수하는 게 아니라 중력의 힘을 빌어서 날이 낙하하면서 참수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날이 너무 가벼우면 사형수를 참수하지 못하고 목에 찰과상만 입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두대의 날은 상당히 무겁다.
단두대는 크게 두 종류로 하나는 목만 집어넣는 단두대가 있고 다른 하나는 목과 손을 같이 넣는 단두대가 있다. 목만 잡어넣는 단두대는 받침대에 구멍이 하나만 있고 손도 같이 집어넣는 단두대는 받침대에 구멍이 3개 있다. 후자로 참수당하면 목만 아니라 손도 같이 잘린다. 아마 후자가 나온 이유는 사형수가 살고 싶어서 자꾸 단두대를 열고 단두대에서 목을 꺼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Heads will roll"라는 어떤 실수로 여러 명이 잘리는 걸 뜻하는 영어 표현은 단두대 밑에 있는 바구니가 꽉 차서, 말 그대로 머리가 굴러다니는 장기자랑스런 상황에서 나왔다.
한국에서는 절박한 경기를 두고 단두대 매치라는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목메달항목 참고
기동전사 V건담의 잔스칼 제국이 사용하는 형벌이다. 애초에 광기에 미쳐 날뛰는 작품이긴 하지만 우주세기에…. 우주세기라고 잉여연료나 잉여동력이 남아도는 건 아니잖아.
길로틴 항목에서 관련된 사항들을 볼 수 있다.
- ↑ 출처: Kershaw, Alister, 《Die Guillotine》 1959, S. 104.
- ↑ 여기에 얽힌 괴담으로 어떤 해적 선장이 처형될 때의 이야기가 있다. 해적들이 잡혀서 전원 처형을 받는데 제일 먼저 단두대에 올라간 선장에게 죽기 전에 소원을 말하라 하니 자신이 목이 잘리고 나서 달려간다면 자신이 지나친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한 다음 목을 잘랐는데 몸통이 벌떡 일어나 몇 사람을 지나쳐 달려가다 쓰러졌고, 놀라워하며 정말로 지나간 사람들은 살려줬다나... 물론 진실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선장이 닭 - ↑ 물론 이 때는 참수형이 존재했기 때문에 참수형에 비하면 인권과 평등에 기여하기는 했다. 문제는 교수형과 비교했을 때는 글쎄... 기요틴 자체가 인권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처형법이기 때문에.
- ↑ 실제로 로마에선 자신들이 정복한 피지배 민족을 처형할 땐 십자가형으로, 로마인은 참수형으로 처형했다
- ↑ 살인죄나 아동 성범죄 같은 중범죄가 아닌 다른 범죄에 대해서 사형이 적용되지 않게 된 건 유럽에서도 19세기 말 이후의 일이었다.
- ↑ 공무원인 교도관이 아니라 일종의 면허를 가진 외주업자였다.
- ↑ 연미복, 나비넥타이, 신사용 모자, 흰 셔츠.
- ↑ 사람 죽이는 일이라도 엄연히 직업 의식을 갖고 하는 프로 업자의 일인 만큼,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 것이다.
- ↑ 전쟁범죄자는 단두대가 아니라 교수형을 받았다.
- ↑ 대신 종신형이 채택되었다. 다만 사형의 대안으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 논의되기 전의 일인지, 현재도 독일은 한국과 같은 무기징역 제도만 운영한다.
- ↑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백작과 알베르 드 모르세르가 사형 장면을 구경하는 장면에서 잠시 등장한다. 민음사에서 출간한 한국어판에서는 '박살형'으로 번역.
- ↑ 전기의자는 사람을 구워 죽이기 십상이고, 약물주사도 길게는 한 시간 이상 지옥을 본다. 교수형은 애당초 목 척추를 날려버리는 점에서, 목을 완전히 분리하지만 않음을 빼면 참수와 다를 게 별로 없고, 총살형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 즉 참수형이 특별히 비인간적이고 더 고통스러우며 잔인하다는 근거는 없는 셈이다. 오히려 집행자의 정신적 고충 때문에 참수형을 없앤 나라가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