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위시대

大空位時代. Interregnum.

한 국가에서 정부의 '공백기'를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정식 왕 내지는 황제의 부재시기이며, 보통은 내란기 내지는 혼란기이다.

이러한 '공백기'는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사실 흔한 일인데, 가령 일본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을 치뤄 새로이 의회를 구성할 경우, 그 사이 기간이 이런 '공백기' 가 된다. 이런 통치의 공백기가 제도화되어있고 행정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다보니 고대~중세처럼 이런 공백기에 국정혼란이 오는 경우도 별로 없긴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공위시대' 는 일반적으로 1254~1273년의 약 20년동안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없던 시기를 뜻하나, 역사를 보면 이런 시기는 의외로 많은 편.

본 항목에서 소개된 이외의 공위기에 대해서는 위키백과 영문판 영문위키 참고. 여기에 따르면 교황이 사망하고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의 기간도 공위기에 해당된다.

1 롬바르드 왕국

동로마 제국의 서지중해 재정복 직후 이탈리아 반도로 밀고 들어와 망했어요를 만들었던 롬바르드 왕국은 어째서인지 건국 후 금방 왕이 없는 '공작들의 통치' 시기를 겪는다.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들은 568년에 이탈리아에 들어와 왕국을 세워 놓고 574년부터 584년까지 왕이 없었다.(...)

이 시기에 이 '왕 없는 왕국'을 다스린 것은 8명의 공작들이였으며, 이들이 다시 왕을 뽑은 것도 프랑크 왕국이 이탈리아를 위협하기 시작했을 때였다[1].

2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 대제가 사망한 후 뒤를 이어받았던 루트비히 1세가 죽은 직후 일어났던 세 자식들의 막장 내전시기. 840~843년.

결국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세 자식들이 프랑크 왕국을 3조각내서 막내 샤를이 서프랑크 왕국, 셋째 루트비히가 동프랑크 왕국, 첫째 로타르가 중프랑크 왕국을 나눠가졌는데 이것은 각각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의 기원이 된다. 870년 로타링기아[2]를 두고 메르센 조약을 맺고 분할하면서 중프랑크 왕국은 멸망하고 영역은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에게 분할되었다.

3 신성로마제국

가장 잘 알려진 대공위시대로, 해외에서도 'The Great Interregnum' 이라고 부른다. 시간대는 1254 ~ 1273년.

그 시작은 교황과 롬바르디아 도시동맹의 증오를 한몸에 받은 '최초의 르네상스인' 프리드리히 2세가 1250년 사망하고, 아들 콘라트 4세가 1254년 사망한 뒤 신성로마제국 황위를 계승할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정통후손이 사라지게 되면서부터이다.[3]

이런 상태에서 아무도 황제 후보로 나서지 않았는데, 교황 역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라고 하면 교황에 대립하는 독일인 지배자 정도로 인식했기 때문인지 황제 추대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렇게 방치된 결과 20년이 유야무야 지나버렸고(...), 시간이 갈수록 독일지역의 상황은 막장이 되어가 마침내 교황조차 황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유력한 귀족들의 등쌀에 시달린 중소 영주들과 여러 도시들에서도 황제 옹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마침내 이런 대세의 흐름 속에 1273년,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代子 godson)이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인 루돌프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추대되었고, 루돌프 1세로 즉위한다. 이로써 대공위시대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는데, 루돌프 1세는 황제의 지위가 유명무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로마까지 가서 교황의 대관식을 받으려 하지 않고 합스부르크 가문 영지를 확장하는 데만 열중했다고 한다(...).

4 오스만 제국

바예지드 1세루즈벨트 이전 세계 최강의 절름발이에게 개발살이 난 이후 약 10년을 '오스만 대공위시대' 라고 한다. 1402 ~1413년.

결국 바예지드 1세의 아들 중 한 명인 메흐메트 1세가 나머지 형제들을 다 죽여버리고 술탄직에 올랐다[4].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저지할 절호의 기회였다고 할 수 있으나 서유럽은 이 시기 동안 오스만을 공격한다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먼저 저 투르크족이 한방에 주저앉았다는 데 충격을 받았기 때문. 즉 '투르크도 저렇게 쎈데 몽골은 대체 얼마나 쎄다는 거야...?!' 라는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유럽인들의 입장에서 투르크에 대한 정보는 가지고 있었어도 티무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었기 때문. 즉 유럽의 입장에서 '얘나 쟤나 강력한 이교도라는 점에서는 똑같다면, 잘 모르는 이교도보다는 잘 아는 이교도가 그래도 낫다' 였던 것이다.

5 러시아

타임 오브 트러블 참고.

6 중국 주나라 때 공화(共和)시기

주의 역대 왕
10대 여왕 희호(공화 시기)11대 선왕 희정

기원전 841~828년. 사기에 의하면 중국 주나라의 여왕(厲王)이 국인폭동(國人暴動)으로 쫓겨나 주정공(周定公)과 소목공(召穆公)이 천자(天子)를 대신해 함께 정무(政務)를 관리하였다고 한다.

이 때 공동으로 통치했다고 해서 공화 시기라 불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죽서기년에는 이와 다른 기록이 있는데 공백(共伯)[5] 화(和)라는 인물이 간왕(干王)을 칭하고 나라를 다스렸는데 공백 화가 다스렸다는 것에서 공화 시기라고도 한다.

어쨌든 이후 공화국(Republic)의 번역어가 되었다.
  1. 프랑크 왕국의 군사적 위협을 받게 되고서야 다시 왕을 선출했다는 것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당시 롬바르드 왕국은 본질적으로 영주와 호족들(8명의 공작)의 연합체로써 매우 분권적인 권력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즉, 왕이란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시에는 지방 세력들의 연합체로 느슨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가 강력한 외침 등 비상사태가 도래하면 위기 극복을 위한 통일된 리더쉽을 발휘할 지도자로써 왕을 선출한 것. 국가가 있는 이상 항상 왕이 있는 것이 정상인 조선 등의 집중적 권력구조를 가진 왕국과 비교하면 곤란하다.
  2. 현재 독일 서부,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
  3. 사실 콘라드 4세의 아들 콘라딘이 있었는데 시칠리아 왕위를 놓고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의 샤를과 싸우다 붙잡혀 처형당했다. 콘라딘은 20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고 거기에 후계자가 없었다. 또 프리드리히 2세에겐 황위 계승권은 없지만 적법한 서자라고 인정받은 아들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시칠리아왕 만프레디와 사르다니아 왕 엔조(후에 폐위)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모두 남계 자손을 남기지 못하고 패사하거나 옥사해 버렸다.
  4. 이후 재위기간은 1413~1421년이지만, 1402년부터 술탄으로 재위한 거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두 가지인데, 먼저 무슨 생각이었던지 티무르가 메메드를 술탄으로 봉했던 사실이 있다. 게다가 내전 동안 네 명의 형제들은 제각기 주화를 발행했는데, 거기에 '술탄' 이라는 칭호를 박아넣었던 사람은 메메드 뿐.
  5. 공나라 백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