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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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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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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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라(모데나),파르마,몬페라토,루카,등등




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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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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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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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변경백국
오스트리아 공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













2




















바벤베르크
가문
프르셰미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신성 로마 제국
Sacrum Romanum Imperium(라틴어)
Heiliges Römisches Reich(독일어)
Saint-Empire romain(프랑스어)
Sacro Romano Impero(이탈리아어)
Svatá říše římská(체코어)
Sveto rimsko cesarstvo(슬로베니아어)

국기 / 문장

(서기 1600년경의 강역)[2][3]
800년(/962년) ~ 1806년
국가황제찬가
위치중부유럽
수도없음[4]
정치체제전제군주제
국가원수황제
언어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체코어, 슬로베니아어 많다.
종교가톨릭
주요사건800년 교황으로부터의 제관수여(건국)
1273년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 첫 선출
1618년~1648년 30년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체결
1806년 레겐스부르크 제국회의->제국 해체
성립 이전프랑크 왕국 / 독일 왕국
멸망 이후옛 스위스 맹방
네덜란드 공화국
라인 동맹
합스부르크 군주국
프랑스 제국
프랑스 제국령 이탈리아 왕국
벨기에 합중국
리히틴슈타인 대공국

[5]

1 개요

중부유럽에 존재하였던 제국. 그 성립 연도에 대해서는 800년 프랑크 왕국카롤루스 대제교황 레오 3세에게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받은 것을 기원으로 보기도 하고, 962년 독일 왕국오토 1세가 교황 요한 12세에게 대관식을 받은 962년을 본격적 출발로 보기도 한다.

후에 정착된 정식 명칭은 도이치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6] 나라 이름에 '신성하다'가 붙다니 의아할 수 있겠지만 영어를 보면 진짜 그 신성하다는 '신성'이 맞다. 국내에서는 애칭(?) 비슷하게 줄여서 신롬이라고 많이 불린다.


2 역사

2.1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의 '서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에 대해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의 제위를 계승하는 정통 황제는 자신뿐 이라며 강하게 항의했고, 정작 카롤루스 자신도 교황의 대관으로 황제가 되는 것을 내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덕분에 카롤루스는 카롤루스 대제가 되고, 프랑크 왕국도 제국이 되었다. 당대의 비잔티움 황제였던 여제 이레네와 카롤루스가 혼인을 할 뻔한 일도 있었지만 무산되었고, 812년 미카일 1세가 카롤루스를 '황제'로 승인하면서 유럽에는 두 명의 황제가 공존하게 되었다. 이것을 니케포루스의 평화(Pax Nicephori)라고 부른다.

이 '서로마' 제국은 카롤루스 대제가 죽은 뒤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점차 유명무실해졌지만 그 정통성이 962년 동프랑크오토 1세가 세운 제국으로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센 왕조부터를 신성로마제국으로 치는 경우가 많지만, "서양에서는 아예 '서로마제국'이 아니라 '신성로마제국'으로 보고 신성로마제국의 시작을 카롤루스의 대관식"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애초에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도 오토 1세 때부터 확립된 명칭이 아니라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그 이름을 확립한 것이며, 오토 1세의 대관도 카롤루스 대제 이후 흐지부지 되었던 프랑크 왕국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800년의 서로마 제국과 926년의 신성 로마 제국을 굳이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476년 망한 서로마 제국과는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겠지만.시즌 2


2.2 독일 왕국

ottopope.jpg

프랑크 왕국카롤링거 왕조가 3분할되어 쪼개진 후에 생긴 동프랑크 왕국에서 대가 끊기자,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911~918)와 뒤를 이은 작센의 영주 하인리히 공이 독일 국왕(하인리히 1세, 919~936)에 선출되었다. 이들은 자신을 '독일의 왕'(rex Teutonicorum)이라고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콘라트 1세부터를 독일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 '독일 왕'이란 표현이 사용된 것은 자그마치 600년 뒤인 막시밀리안 1세(1508년 즉위)의 일이다. 이는 그가 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황제로서의 대관을 받지 못하고 단지 교황 사절이 교황을 대리해 수여한 로마 황제 칭호로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성립 후 얼마 안 가 분열 수순을 밟은 서로마 제국이 재수립된 계기는 하인리히의 아들인 오토 1세(936~973)에 의해 작센 왕조 하의 서로마 황제 제위가 수립되면서부터이다. 오토 1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슬라브족과 마자르족의 침입을 격퇴했으며 북이탈리아(롬바르디아)를 정벌해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게 되었다(962년). 교황 입장에서는 명목상으로나마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를 자처하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권위로써 누군가를 내세워야 하는 판이었는데, 이때 큰 활약을 보이는 오토 대제를 (서)로마의 황제(정확히는, '로마인의 왕')로 내세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토 1세 때만 해도 신성 로마 제국, 혹은 로마 제국이라는 칭호보다는 그냥 "제국(Imperium)"으로 불렸다. 이후 오토 1세의 뒤를 이은 오토 2세(973~983. 사실 967부터 아버지와 공동황제)때부터 로마 제국이라 칭했고, 로마 제국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고 왕위를 받아낸 오토 3세(왕위 983~1002, 제위 996~1002)에 의해서 일반적으로 로마 제국이라 불리게 된다. 오토 1세가 황제의 대관을 받은 후 제위는 (중간에 끊긴 적도 많았지만) 대대로 계승되어갔다. 하인리히 공에 의해서 시작된 작센 왕조는 오토 1세부터 이어지다 잘리어(Salian) 왕조로 계승되었고, 잘리어 왕조는 잘리어 다시 호엔슈타우펜 왕조로 계승되었다.


2.3 교황과의 갈등

오토 1세는 늘 분열의 위험성을 안고 있던 제국을 안정시키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성직자를 영주로 임명하는 소위 "제국교회정책"을 시행하였다. 황제가 임명하는 고위 성직자가 각 지역의 영주를 겸하는 구조로서 이는 황제가 성직자를 임명할 수 있는 서임권을 전제로 한 구조였다. 오토 1세의 이러한 정책으로 황권이 강화되고 동시에 교황권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황권 강화에 반발한 영주들의 불만에, 황제의 성직자 임명을 성직매매의 일종으로 간주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교회 개혁정책으로 하인리히 4세(독일 왕위 : 1056~1084, 제위 1084~1105)와 그레고리오 7세 사이에 저 유명한 서임권 논쟁과 카노사의 굴욕(1077) 사건이 일어난다. 황제 즉위에 성공한 것에서 보듯이 불과 7년만에 교황은 역관광을 당한다(그리고 이후 두 당사자 모두 망한다). 서임권 논쟁으로 촉발된 내전은 보름스 협약(1122)으로 수습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의 각 지역 영주들과 도시들이 각자의 영지의 지배권을 강화하여 분열의 길로 나아갔다. 이를 영방국가체제라 부른다.


2.4 대공위시대와 황권의 약화

수십년간 단절되었던 제위를 계승한 호엔슈타우펜 왕조(슈타우펜 왕조)의 프리드리히 1세(1152년 즉위, 제위 1155~1190)는 이에 맞서서 "신성 제국"을 칭하며, 황제이면서 동시에 남독일을 중심으로 영지를 확장하는 황제영방국가 정책을 취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프리드리히 1세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낳아 도리어 황권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254년 프리드리히 2세(왕위 1112~1220, 제위 1220~1225)의 죽음으로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단절되고, 1256년 대립왕 홀란트 백작 빌헬름(재위 1247~1256)이 죽자 제국의 정세가 불안해지게 된다. 이에 라인 지방의 영주들은 영국왕 헨리 3세의 영향으로 핸리 3세의 동생인 콘월 공작 리처드(재위 1257~1272)를 황제로 추대하고, 다른 세력은 프랑스왕의 지지 아래 카스티야알폰소(재위 1257~1275)를 옹립하여, 제위가 비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를 대공위시대(1254~1273)라고 부른다. 대공위시대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의 요청으로 열린 프랑크푸르트 선제회의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루돌프 1세(제위 1273~1291)를 황제로 뽑음으로써 종식된다.

대공위시대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영주들의 투표에 의해 뽑히게 되었고 황제는 자기 영지 외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돼버린다. 특히 1356년 카를 4세(1346년 즉위, 제위 1355~1378)에 의해 공포된 "금인칙서(Goldene Bulle, 금인장으로 내린 칙서)"는 황제를 투표에 의해 선출하고, 선제후(選帝侯. 쾰른 대주교, 마인츠 대주교, 트리어 대주교, 라인 궁중백, 작센 공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카를 4세의 것이었다)들에게 사실상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가처럼 다스릴 수 있도록 특권을 부여했는데, 선제후들에게 부여된 특권은 나중에 가서는 모든 영주들과 도시들에게 적용되어 결정적으로 독일의 분열을 가져오게 된다.


2.5 합스부르크 왕조

15세기 중반에 가서는 여러 행운들이 겹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위를 계속 이어받는다. 막시밀리안 1세의 혼인동맹정책과 그 손자 카를 5세의 경이적인 군사활동의 결과, 최전성기인 16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의 판도는 스페인이탈리아까지 포괄하며 역대 최대를 자랑하였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이건 신성 로마 제국의 영역이 넓어진 건 아니다. 그냥 카를 5세랑 합스부르크의 땅이 늘었을 뿐, 카를 5세는 황제위 외에도 엄청나게 많은 작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 그래서 카를 5세 사후에 황제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해외 식민지나 스페인 왕위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찢어진다. 하여튼 카를 5세 시절 황제의 권위는 대단해서 사코 디 로마 등의 수난으로 인해 교황조차 그 권위 밑에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였다. 동시에 이때부터 독일 정체성이 성립되었다.[7]

하지만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제국은 대내적 분열과 대외적 충돌로 홍역을 치르게 됐으며 그 결정판인 30년전쟁 이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각 지역의 영방들이 독립국가에 가까운 자립이 허용됨에 따라 합스부르크 왕조는 남독일과 오스트리아 외에는 영향력을 거의 행사하지 못했다.

17세기 이후 이렇듯 부침을 겪는 모습에 볼테르는 형식밖에 없는 이 제국을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라고 평할 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다. 16세기만 해도 프랑수아 1세가 신롬 황제 선거에 출마한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 볼테르가 살았던 18세기의 독일 지역내 영방국가들은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하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세계국가적인 분위기가 자신들의 존속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제국을 지탱한 것은 제국대법원(라이히스카머게리히트). 제국대법원은 권한의 행사에 일부 제한이 있긴 했지만, 제국의 유지 및 로마법의 확산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2.6 제국의 해체

그렇게 명맥을 이어오던 중, 오스트리아의 약화를 노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대(對)프랑스 동맹국들이 패전하고 1803년 뤼네빌 평화조약으로 라인강 서안 제국 영토를 몽땅 잃고 라인강 우안에서는 나폴레옹에 줄선 군소국가들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우군이나 다름없는 교회령과 기사령들을 거의 전부 합병해버린다. 그결과 프란츠 황제는 제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은데다가 1804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역시 나폴레옹에 충성하는 군소 위성국들을 선제후로 임명하여 유사시 황제 선거는 나폴레옹이 찬탈하거나 나폴레옹의 하수인에게 넘어갈 위험이 생겨버린다.

이에 프란츠 2세는 자신의 유고시 후계자가 황제 선거에서 당선될 가망이 전혀 없어지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는 법적인 국가도 아니고 대표 작위인 오스트리아는 '대공국'에 불과 하기 때문에 나폴레옹이나 프랑스의 괴뢰인 독일듣보잡 제후의 신하가 될 위험에 쳐했다. 이에 합스부르크 여러 영지의 작위를 아우를 수 있는 대표 타이틀이 필요했고,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해서 보험으로 삼은것. 1806년 남독일의 16개 영방들이 "라인 동맹"을 결성하고 신성 로마 제국에서 탈퇴를 선언하여 제국은 회원국이라곤 오스트리아 앞마당의 합스부르크 방계가문 잘츠부르크 공국과 프로이센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라 회장 부회장 총무 3명이 전원 이미 해체한다고 선언하기 전에 와해 되었고 1806년 6월 프랑스 황제 겸 라인동맹의 보호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라인동맹이 성립한 마당에 제국을 유지하는것은 자신 독일내 영향력에 대한 방해물로 여겼기에 오스트리아에 3개월 안에 '제국 해체를 하지않으면 선전포고한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이에 굴복한 프란츠 2세는 8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서 840여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던 신성 로마 제국은 공식으로 소멸하게 된다. 프랑스 황제 선포에 자존심이나 열등감 타령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후일담으로 이 시기 제국의 해체를 두고 괴테는 "나의 마부가 언쟁을 벌이는 일보다 더 관심 없는 일이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전직 판사이자 프로이센의 총리였던 카를 폼 슈타인은 빈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부활을 제안할 정도로, 무늬만 제국이었던 체제에 대한 독일인들의 애착은 대단했던 듯하다. 훗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재통합을 완수한 후 이를 계승한 독일 제국을 선포하였을 정도였다.


3 국호

신성 로마 제국은 제국이기는 하지만 독특하게도 전신이었던 동프랑크 왕국의 국명 'königreich Deutschland', 즉 독일 왕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작센 왕조 당시 국명은 독일 왕국 이외에는 그저 알레만 왕국이였다. 800년대 프랑크의 카롤링거의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서 교황에 의해 서로마 황제의 대관을 받았다가 동로마 제국의 항의로 인해 타협의 결실로 임페라토르바실레우스의 칭호를 받고 서로마 제국이 아닌 서유럽의 최고자로 인정해준 예가 있기에 그저 '독일인과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오토 3세때 잠시나마 로마 제국과 로마 황제를 자처했으나 오토 3세의 사망으로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잘리어 왕가 이후 동로마 제국과의 공수관계가 역전되었다. 동로마 제국이 서유럽에 끼칠 수 있는 영향은 이탈리아로 배타고 넘어가서 교황을 협박하는 정도 밖에는 없게 되었다.(...) 독일 영토에 영향을 미치고 싶어도 결국 불가리아 왕국도 넘어가지 못할 정도로 안습이 되고 오히려 독일 제국이 심심치 않게 동로마를 겁박한 현시창된 상황에서야(...) 로마 제국"(Römisches Reich[8])"의 국명을 사용하게 되었다. 1157년 이후 호엔슈타우펜 왕가 이후로는 프리드리히 1세 바바롯사가 공식적으로 국명에서 로마를 빼고 신성을 대신 넣어 "신성 제국(Heiliges Reich)"이라 명명했다. 그러다가 1254년이였던 대공위시대 때 대립 왕 중 한명이었던 홀란트 백작 빌헬름(빌렘) 3세가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을 사용해 비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가 1442년 합스부르크 왕가 때 "독일 국민의 로마 제국"을 사용하다가 1512년 쾰른의 제국 의회에서 최종적으로 "독일(도이치)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4 정치

혼돈의 카오스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는 대대로 황제와 제후들간의 대립, 대외적으로 타국의 국왕이나 아니면 교황과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있다. 신성 로마 제국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는 제국 의회와 국가교회정책, 작센 왕조 시기의 동유럽 및 이탈리아 반도로의 진출, 황제 선출과 선제후,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많은 작위와 영방국가들이 특징이다.


5 영향력

탄생 배경에서 보다시피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에게 인정받은 서로마 제국의 정통 후계자였으며, 그에 따라 서로마의 모든 땅을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이라고 주장했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못한 명분상의 권위에 불과했다. 구 서로마 영토에 있는 국가들 모두가 이를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치부해 버렸다. 뒤이어 영국프랑스, 에스파냐에서는 종교법 학자들을 동원해서 "왕은 그의 왕국에서는 황제다", 즉 동양 버전으로는 외왕내제 식의 이론을 펼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되, 자신들의 나라에 그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 것도 막아버렸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도 이런 무리한 개드립 발언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권역은 아주 자연스럽게 독일플랑드르, 북부 이탈리아로 좁혀졌다.

동로마 제국의 경우, 이 국가의 군주를 '서방(인)의 황제'로서는 인정하였으나 '로마인의 황제'로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동로마 제국은 스스로를 (당연히) 로마로 부르고 있으며 다른 국가도 이를 인정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 접수 후 로마의 후계라 자칭한 것에서 이슬람이 로마의 존재를 인식,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종교

골수 가톨릭 국가
신성 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가톨릭은 단순히 국교 '따위'의 레벨이 아니며, 국가 정체성의 한 축을 이루는 핵심 요소이다. 애초에 나라의 시작부터가 교황이 로마 황제관을 준 것이 계기이기에, 이는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시각이야 어떻든, 당시 유럽인의 인식속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서로마의 후계자이며, 동방의 정교회 제국인 비잔티움과 대비되는 서방의 가톨릭 제국이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혹은 필연적으로) 개신교가 출현하여 제국의 신앙이 분열되는 순간, 제국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9]


7 오해와 반박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
----
볼테르
볼테르가 한 이 유명한 디스 때문에 뭔가 안습한 나라로 잘못 인식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엄밀히 말하면 볼테르의 평가는 신성 로마 제국 입장에서는 매우 부당하기 짝이 없는 평가이다. 말기에는 개신교의 출현과 교회의 분열 등으로 빈사 상태에 이르러 볼테르에게 이 디스를 먹기는 했지만, 말기를 제외하면 '교황이 로마 황제관을 주었다'는 정통성 때문에 서유럽인들의 인식에서는 신성한 것도 맞았고 로마의 후손인 것도 (명목상이나마) 맞았고 또한 당연히 제국이었다.

사실 볼테르의 디스는 어디까지나 18세기의 껍데기만 남아 다 쓰러져가던 신성로마제국을 가리키고 한 조롱이었으며 볼테르뿐만이 아니더라도 근세의 안습한 신성로마제국 때문에 중세의 초기 신성로마제국과 건국정통성 자체의 이미지까지 나빠지고 근대학자들에게 조롱받은 경향이 있다.

신성 로마 제국/오해 참조.


8 역대 황제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 참조.


9 각종 매체에서

이름 자체가 '신성'이 붙은게 왠지 간지를 더해줘서(...) 그런지 보통 서브컬처 주로 판타지물에서 신성 ○○ 제국이 주구장창 나오는 것(...)은 신성 로마 제국을 패러디한 명칭이 아닐까 한다.


예)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5의 '신성 그리핀 제국', 코드 기아스신성 브리타니아 제국, '신성 중고 제국', '신성 삼도 제국'
  1. 독일 제국나치 독일이 각각 제2제국, 제3제국으로 불리는 것처럼 신성 로마 제국도 제1제국(제1라이히)으로 불리기도 한다. 다만 이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이후의 분류로, 본토에서는 잘 쓰지 않는다.
  2. [최대영역] (서기 814년경의 강역)
  3. 이미지 출처: [[1]], 이미지 라이선스: CC BY-SA 3.0(나무위키 이미지 라이선스와 비호환하므로 이미지 공유시 주의.)
  4. 공식적인 통치기구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공식적인 수도도 있을 수가 없었다. 다만 본래 선거제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감안하면, 굳이 '수도와 가장 가까웠던 도시' 를 들라면 황제 선거와 대관식이 열린 프랑크푸르트라고 할 수는 있다( 초기 대관식은 아헨이 샤를마뉴의 대관식전통으로 대관식 장소이었으나, 마인츠 주교의 항의로 프랑크푸르트로 변경됨)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는 선제후 회의나 제국대표자회의가 열린적이 없다.
  5. [[2]],[[3]],[[4]]
  6. 독일어 :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라틴어 : Imperium Romanum Sacrum Nationis Germanicæ
  7. 단, 이때가 교황 권위가 추락한 시점이란 것을 잊어선 안된다.
  8. 독일어 reich는 라이히 문서에서도 보듯이 용어의 혼란이 있으나 관습적로 '제국'이라고 번역한다.
  9. 참고로 신성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는, 지금도 가톨릭 신자의 비율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