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르드러

Deidre.

켈트 신화의 등장인물. 렌스터의 12세기 책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 가운데 한 가지로 기록되었으며, 투이렌의 아들들, 리르의 아이들과 함께 에린의 슬픈 세 이야기 중 하나로 손꼽힌다.

얼스터의 코노르 왕이 신하인 음유시인 페들리미드(Fedlimid)의 집에서 축제를 벌이고 있을 때, 페들리미드의 아내가 딸을 낳았다. 이때 사제인 카스바드는 갓난아기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할 것이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많은 영웅들에게 죽음을, 얼스터에는 위험과 슬픔을 가져올 것이라 예언했다.

얼스터의 붉은 가지의 전사들은 아기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코노르 왕은 아기를 하녀에게 주면서 호젓한 산중에서 자기 아내가 될 나이가 될 때까지 키우라고 했다. 명백한 키잡.[1]

데르드러는 산 속 깊은 곳에서 수양 아버지와 유모와 선생의 손에 길러졌다. 그 외에는 어떤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양아버지가 식용으로 쓰기 위해 송아지를 잡았는데, 그 피가 눈 덮힌 땅 위에 흐르고 까마귀가 그 곳에 내려왔다. 데르드러는 "저 까마귀처럼 까만 머리와 저 눈처럼 흰 피부와 저 송아지 피 처럼 붉은 뺨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고, 선생은 코노르 왕과 같은 종족의 영웅인 우스나(Usnach)의 아들 가운데 하나인 나이시(Naoise)가 그런 남자라고 대답했다.

데르드러는 선생을 졸라 나이시를 만나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코노르에게서 자신을 빼돌려 달라고 간청했다. 나이시는 형제 아르탄(Ardan)과 안러(Ainle)와 종자들을 거느리고 데르드러를 데리고 알바로 도망쳐버렸다. 알바에서 나이시는 그곳의 왕 가운데 한 사람과 동맹을 맺고, 그 나라를 방랑하면서 사냥을 하고 왕을 위해 전쟁을 했다.

복수를 결심한 코노르는 이멘 마하에서 잔치를 벌이면서, 추방된 신세인 우스나의 세 아들들을 귀향시켜 환영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코노르는 대표자 한 명을 보내기로 하면서 승리자 코날, 수알탐의 아들 쿠 쿨린, 로이의 아들 퍼거스 가운데 누가 자신에게 가장 충성하는지 알아보려 했다.

코노르는 세 명에게 우스나의 아들들에게 안전보장을 해주었는데 얼스터에게 와서 살해당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다.

코날은 그 일에 가담한 누구도 얼스터에서 살아날 수 없을 것이라 했고, 쿠 쿨린은 만일 왕이 그 일에 동의한다면 왕의 머리 이외에는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퍼거스는 왕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복수하겠다고 하여 코노르는 퍼거스를 선택했다.

퍼거스는 두 아들, 금발의 일란(Illan)과 빨간 머리 부인네(Buinne)를 거느리고 갤리선으로 알바를 향해 떠나 우스나의 아들들이 살고 있는 로호 에티브(Loch Etive)에 도착해 우스나의 아들들에게 돌아오라고 말했다. 예지력을 가진 데르드러는 그들이 알바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했지만 추방자들은 고향이 보고 싶어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퍼거스가 보라하(Borrach)의 언덕에 도착하자, 코노르 왕은 그곳에서 잔치를 베풀게 했다. 잔치를 거절해서는 안되는 기아스를 가지고 있었던 퍼거스는 보라하에 머물고, 데르드러와 우스나를 자신의 아들인 금발의 일란과 빨간 머리 부인네의 보호 아래 이멘 마하로 보내게 되었다.

비극을 예지한 데르드러는 퍼거스가 잔치를 마치고 올 때까지 안전한 곳에 숨어 있자고 했으나 남자들은 듣지 않았다. 그리고 이멘 마하의 붉은 가지 궁전에 도착했다.

코노르는 데르드러의 옛 선생 레바르함(Levarcham)을 불러서 데르드러를 만나보고, 그 아름다움이 여전한지 알아보라고 했다. 레브라함은 우스나의 세 아들들에게 경고를 하고 돌아와서는 데르드러가 알바에서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여 외모가 망가졌으며 이미 왕의 은총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코노르는 질투심이 감소하여 우스나의 아들들을 공격해야 할지 그만두어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두 번째 사자를 보내서 알아보게 했다. 두 번째 사자는 창문으로 데르드러를 들여다보았다가 나이시가 던진 장기말에 맞아 눈이 망가졌다. 그러나 사자는 돌아와서 데르드러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뛰어나 한 쪽 눈을 잃었음에도 다른 한 쪽 눈으로 그녀를 보고 싶었다고 코노르에게 고했다.

화가 난 코노르는 얼스터의 전사들을 모아 붉은 가지 궁전에서 데르드러를 제외한 모든 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퍼거스의 아들들 중 빨간 머리 부인네는 처음에는 습격자들을 막았으나, 100개의 땅을 주겠다는 코노르의 제안에 넘어가 배신했다. 그러나 땅은 배신자의 소유가 된 것에 분개하여 하루 밤 만에 황무지가 되었다.

하지만 퍼거스의 또 다른 아들인 일란은 용맹하게 싸웠으며, 코노르는 아들 피아하에게 주인이 위급해지면 소리치는 방패 모너(Moaner)를 주어서 일란과 싸우러 보냈다. 피아하는 싸우다가 위급해지자 방패 밑에 쭈그리고 앉아 방패가 소리치도록 했다. 승리자 코날은 그곳으로 달려가 일란의 몸에 '녹청색' 창을 던져 관통시켰다. 일란이 코날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코날은 사태를 보상하기 위해 피아하 또한 죽였다.

우스나의 아들들은 밤새도록 요새를 지키고, 날이 밝자 데르드러를 가운데 놓고 방패로 보호하며 도망치려 했다. 코노르는 드루이드 사제 카스바드에게 그들의 목숨을 살려줄테니, 마법으로 그들을 잡게 했다.

폭풍이 치는 바다의 환영을 본 우스나의 아들들은 땅 위에서 헤엄을 치다가 붙잡히고 말았고, 코노르는 카스바드와의 약속을 어기고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얼스터의 전사들 중 누구도 그들을 죽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에 나이시의 칼에 아버지를 잃었던 노르웨이에서 온 외국인이 그들의 집행인으로 나섯다.

형제들은 서로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먼저 죽겠다고 다퉜고, 나이시는 마나난 맥 리르가 자신에게 준 '복수자'를 집행인에게 줘서 이 다툼을 해결했다. 그들은 일격에 모두 함께 목숨을 잃었다.

데르드러는 우스나의 아들들이 그들을 애도하는 시를 남긴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보라하의 향연에서 돌아온 퍼거스는 사태를 파악하고, 자신의 부하들을 모아 코노르의 아들들과 전사들을 여러 명 죽이고 얼스터의 숙적인 코나트의 알릴과 메이브에게 도망쳤다. 카스바드는 왕과 왕국을 모두 저주하여 코노르의 족속은 어느 누구도 이멘 마하에서 다시 통치하지 못하도록 기도했다.

얼마동안 이멘 마하는 쿠 쿨린의 용맹으로 폐허가 될 위기를 모면했지만 그가 죽자 수도도 함락되어버렸다.

결국에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많은 영웅들에게 죽음을, 얼스터에는 위험과 슬픔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언은 코노르 왕 본인의 병크 때문이 실현된 셈. 한마디로 데르드러의 아름다움이 예언의 주체였던 것이 아니라 코노르 왕 본인의 혼군성이 예언의 주체가 되었던 셈이다. 코노르 왕이 얼마나 혼군인지 알게 해주는 일화인 셈.
  1. 사실 동서고금의 신화 속에 나오는 파멸적 예언이란 이러든 저러든 신이든 인간이든 못 피하는 이중의 함정이니 코노르가 무조건 이뤄질 예언을 막겠다고 무고한 갓난아기를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것을 택한 것은 그나마 잘한 짓이다. 코노르가 나이시랑 눈 맞은 데르드러를 취하고자 학살까지 저지르지만 않았으면 최소한 데르드러는 불행하지 않았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