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의 왕조.
1 개요
두카스 가문의 기원은 다른 동로마 제국의 귀족 가문들과 마찬가지로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스스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둑스(Dux)를 맡아온 가문이며 이 때문에 '두카스(Δούκας)'라는 성을 가지게 됐다고 주장했지만 가능성은 없다. 옛 로마 제국 시대의 귀족 가문들은 7~8세기의 위기 시대에 전부 사라졌고[1], 동로마 시대의 귀족가문들은 가장 오래된 이들도 9세기 경에야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카스 가문은 소아시아 북동부 파플라고니아의 해안지대에서 성장한 군벌 귀족인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건 동로마 제국에서 알려진 귀족 가문 중에서는 가장 오래 된 편으로, AD 842~855년에 재위한 섭정 황후 테오도라 시대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11세기에는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콤니노스 왕조의 이사키오스 1세가 병으로 인하여 1059년 두카스 가문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에게 제위를 물려줌으로써 드디어 황제를 배출하여 왕조로 등극한다. 그러나 이 왕조는 업적보다는 실정으로 유명한데, 몇 가지를 나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왕조의 초대 황제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셀주크 제국과 동로마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하던 아르메니아의 가히크 2세를 폐위시키고 그 지역을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영토가 늘어난건 좋은데 하필이면 셀주크 제국과 영토를 맞대게 되었고 지역민들의 극심한 반발도 초래하였다. 결국 얼마 후에 있을 셀주크 제국의 러쉬에 GG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장남 미하일 7세[2]는 아버지를 능가하는 희대의 암군으로써, 아버지가 죽은 후 과부가 된 그의 어머니와 결혼하여 황제위에 오른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한 후 간신히 셀주크 제국의 알프 아르슬란과 맺어놓은 평화협정을 깨버리는 실책을 저지른다. 이로 인해 광대한 아나톨리아를 전부 말아먹게 되고 동로마 제국은 멸망 직전에 내몰린다. 미하일 7세는 얼마 후에 니키포로스 3세에 의해 퇴위당하고 아내도 빼앗긴 채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이렇게 잘한 일이라고는 딱히 찾아볼수 없는 암군들의 왕조이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꿋꿋이 살아남아 명문가 지위를 유지했다. 콘스탄티노스 10세의 형제이자 부제(카이사르)였던 요안니스 두카스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딸인 이리니 두케나가 콤니노스 왕조의 알렉시오스 1세와 결혼함으로써 이 두카스 가문의 지지가 알렉시오스 1세의 즉위와 이후의 위기 돌파에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이들의 위세는 두 명의 두카스 황제들이 11세기에 나라를 대차게 말아드셨음에도 불구하고 4차 십자군 이후 난립한 대립 황제들이 너나할 것 없이 두카스와 콤니노스를 자칭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알렉시오스 1세 이후의 황제들이 대부분 그의 후손인 것으로 익히 알려져있지만, 그 알렉시오스의 아내가 두카스이며 심지어 콤니의 피가 안 섞인 요안니스 3세조차 어머니가 두카스이다. 마지막 왕조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주요한 시조인 게오르기오스 팔레올로고스의 아내도 두카스로, 게오르기오스는 알렉시오스의 동서가 된다. 어떻게 보면 콤니노스 왕조를 뛰어넘는 황제들의 시조.
동로마 멸망 이후의 가계도는 확실하지 않지만 오스만 제국 통치 시기에 두카스 성을 가진 인물들이 간간히 등장하기도 한다. 예컨대 몰도바와 왈라키아의 공작 게오르게 두카스와 그 아들 콘스탄틴 두카스 등이 있다. 현대에도 그리스에서는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성씨 중 하나이며, 미국 이민자들의 성씨 중에도 가끔씩 찾아볼 수 있다. 현대의 인물로는 메사추세츠 주지사를 지냈던 마이클 두카키스(Michael Dukakis, 1933~) 등이 있다.[3]
2 변명?
사실 이 왕조의 정책방향 자체는 크게 틀리지 않았다. 특히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쿠데타를 최초로 성공시켜 제위에 오른 군인황제 이사키오스 1세로부터 평화적으로 제위를 이양받고, 과대팽창되어 있던 군대를 감축했다는 점에서는 좋게 평가 할 수 있다. 아르메니아의 테마군을 해체시키고 군대의 전반적인 질적 저하를 불러온 점이 지탄받지만, 정작 테마군들이 전투에 못 써먹을 지경인데 반해 지방 분견군이나 군사 귀족의 사병들이 늘어나 군비가 국가 재정의 절반이상을 집어먹고 있던 것을 생각하면 군축 자체는 타당했다. 실제로 이후 등장한 콤니노스 왕조가 중앙야전군인 타그마타의 규모를 크게 늘리고 지방에는 수비대 정도만을 두는 대신 도로를 정비하고 해군을 증강해 기동력을 높이는 군제를 택한 것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문제는 기존의 주적이었던 파티마 왕조가 망조가 들어 남쪽으로부터의 안보위협이 줄어든 대신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과 페르시아의 셀주크 튀르크가 새로이 부상하여 결과적으로 안보위협이 증대되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혹은, 이를 예측했음에도 지나친 군축을 밀어붙였거나 말이다.
내부 갈등도 제대로 봉합하지 못했다. 군축에 반발하여 비협조적으로 나오던 군사귀족들을 달래지도 못했고, 덕분에 폭발 직전이던 모순들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도 못했다. 결국 남이탈리아 제국령이 함몰되고 아나톨리아 중부까지 튀르크가 진출하자 입지가 약해진 두카스 가문은 콤니노스 가문의 지지로 로마노스 4세가 등극하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그 이후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국가적 위기가 도래했음해도 권력욕을 버리지 못한 부제 요안니스 두카스는 로마노스 4세에게 비협조적이었으며, 아예 만지케르트 전투에서는 아들 안드로니코스 두카스가 결정적인 순간에 전장에서 병력을 빼돌리도록 했다. 때문에 전투는 파멸로 끝났고 귀중한 타그마타군이 괴멸되었으며 로마노스 4세가는750년만에 로마 황제로서 포로로 잡혔다.
미하일 7세는 말할 것도 없다. 학자로서 뛰어나다는 평도 있었고 문신(文臣)들의 호감을 산 황제였지만, 실제 정책 수립과 수행에서는 아마추어였으며 대외정책은 파멸적이었다. 튀르크와의 전쟁을 재개했으면서 비협조적이던 군사귀족들이 만지케르트 전투를 지켜보고 더더욱 불신의 눈초리를 보내는 가운데 국방을 내던지듯 맡겨버렸다. 그들의 수장인 로마노스 4세가 뜻밖에 살아돌아오자 처참한 말년을 선물해서 이러한 경향은 심화되었는데도.
결과는 대파멸이었다. 탁시스(Taxis)로 상징되는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외침과 물가폭등 등의 당면한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국경을 지킬 군사령관들이 수도로 진군하는 것을 손놓고 지켜봐야했다.
분명 암군들의 왕조가 맞지만, 무작정 비난하기보다는 정책을 실시한 시기가 나빴고 대내외적인 안목이 부족했으며 정치적 수완이 처참했다는 것으로 비판해야 할 것이다.이 쯤만 되어도 욕먹을 이유는 충분하긴 하다. 변명인지 욕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