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윙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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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ration Red Wings

2005년 6월 27일부터 시작된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졌던 미해군 특수부대 네이비 씰의 작전이다. 미 특수전사에서 가장 최악의 피해를 입은 작전으로 특수부대원이 무려 19명이 전사하는 전무후무할 피해를 입었다.

1 개요

2002년 아나콘다 작전 이후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대규모 작전은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유는 다들 알고 있듯이 03년 이라크전에 대한 이슈가 쏠리면서 미군 병력이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미국측의 아프간에 대한 작전도 소극적으로 일관하게 되면서 탈레반은 당시 파키스탄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급격하게 확장하며 전에 없는 공격적인 작전을 펼치면서 국경에 근겁해 있던 자불(Zabul)에서만 1000여명의 탈레반 게릴라들이 집결하는등 세를 과시하며 다국적군과 미군을 향한 과감한 공격이 벌어졌다. 덕분에 2003년말까지 미군 피해는 220여명으로 늘어났고 미군은 고가치목표(HVT) 즉 게릴라 지휘부나 보급거점을 타격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동원한 타격으로 작전을 전환하여 대응하게 된다.

작전에 동원되는 씰 10팀은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인 아흐마드 샤흐(Ahmad Shah, 또는 모하마드 이스마일(Mohammad Ismail)) 체포 또는 제거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 아흐마드 샤흐는 직할 부하만 200여명가량을 운영하고 있는 매우 큰 활동과 세를 과시하고 있었으며 쿠나르(Kunar) 주의 수도인 아사다바드(Asadabad) 서쪽 지역이 근거지를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CIA에서부터 첩보가 입수되자 2005년 6월 27일 씰 10팀의 작전이 시작되게 된다.

2 정찰조 투입과 작전 현황

6월 27일 야간에 MH-47을 통해서 침투한 4명의 정찰조가 투입되는데..

마이클 P. 머피(Michael P. Murphy) 대위(1계급 추서)
매슈 G. 액셀슨(Matthew G. Axelson) 하사(1계급 추서)
대니 P. 디츠(Danny P. Dietz) 하사(1계급 추서)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 중사(당시 병장)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아마드 샤(Ahmad Shah)가 은거해 있다는 마을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LZ에서부터 7시간이 넘게 강행군을 하여 6월 28일에 목표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목표지점을 관측하면서 이들은 위치선정을 하고 그들의 움직임을 정찰하며 아마드 샤를 최종적으로 타격하기 위한 증원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1]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작전은 통신장애를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순조롭게 되고 있었다.

3 발각 그리고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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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대기하고 있는 비트(은신)지역으로 마을 주민 성인남성 2명과 어린이 1명이 나무를 베기 위해서 올라왔다가 이들과 접촉하게 된다.(6월 28일 12시 20분) 즉 적성지역의 적대 민간인에게 발각된 것은 특수전 부대에게 매우 치명적인 일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상황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본대와의 교신이 두절되어있는 상황이었다. 특수전 교리에 따르면 접촉 민간인을 본대로 이송시키거나 민간인은 풀어주는 것이 원칙적이긴 하지만 이들의 존재는 그들이 오랫동안 노려왔던 아흐마드 샤흐(Ahmad Shah)의 체포 혹은 제거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자 더욱이 자신들의 생존유지과 기도비닉을 위해서라도 이들은 그들에게 매우 불편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정찰조 대원들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인권적 측면 그리고 교전수칙적 문제 그리고 자신들의 현재 처한 상황 종합적인 고민에 빠질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놓여있었고 대원들은 갑론을박을 펼치게 된다.( 영화에서 그 모습이 잘 나온다.) 아무리 특수전 혹은 비정규전이 잔혹하다는 평가를 받으나 특수부대원들이 이런 문제에서 딜레마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이다.[2] 이는 흔히 ~ 인권이 뭔가요? ~ 하는 모습을 보이는 공산권 특수부대나 북한군에게서도 볼 문제이기도 했다.[3][4] 결국 투표로 하게 되었는데 2명이 풀어주는 쪽으로 가고 1명은 사살 그리고 한명은 기권을 함으로서 접촉한 민간인들을 풀어주게 된다. [5] 그리고 대원들은 다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노출을 피하게 된다.

그때가서 인권적 측면에서 매우 훌륭한 평가를 받을만 했지만.. 그 이후의 상황들과 결과를 본다면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리고 당연하게 탈레반 치하의 협조지역의 민간인이였기 때문에 1시간도 안되어서 아마드 샤(Ahmad Shah)와 그 탈레반 일당들에게 정보와 위치가 노출되게 된다.

4 교전과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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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 발생과 퇴각로

즉각 탈레반은 이들의 추적에 나섰고 그들이 은거한 산을 포위해버렸다. 동시에 정찰조의 퇴로에서 접촉하게 되면서 교전이 시작되는데 현재 이 탈레반 병력 규모를 두고 논란이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병력에 대한 규모가 처음 언급보다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위작전을 보듯이 차단-타격등에 편성되어서 동원되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으로 당시 탈레반 병력은 최소 100여명 최대 200~250여명까지 추정가능하다고 할수 있었고 1시간도 채 안되는 13시 20분에 그렇게 접촉한 것에 대해서 정찰조는 매우 당황하게 된다. 더욱이 그들은 정찰목적이었기 때문에 공용화기와 같은 지원화기도 매우 부재한 상황이었다. 이때까지도 더 심각한건 본대와의 교신이 아무것도 안되고 있었다.

정찰조는 초기 첨병들을 손쉽게 제압하며 산악지형에서 퇴각을 했지만 점차 불어나는 탈레반 병력때문에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치열한 총격전속에서 정찰조원들 대부분이 경상을 입는 와중에 마이클 P. 머피 중위가 공격받을 것을 무릅쓰고 개활지까지 나가 위성전화를 통해 자신이 전사하면서까지 본대와의 교신이 가까스로 연결되면서 본대에 상황을 긴급상황을 알리게 된다.[6] 하지만 2개 중대 규모가 넘는 적과 정면으로 맞서기에는 정찰조의 병력과 화력이 열세인 상황이었고 결국 교전 2시간이 지나자 대정찰조의 절반이 사망했고 한명은 출혈과다로 사망중이었으며 탈레반도 수십명의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정찰조의 긴급구조 요청에 씰 10팀의 팀장 에릭 크리스텐슨 소령이 긴급출동을 하게 된다. 씰팀은 16명의 병력이 각각 MH-47 2대에 나뉘어 탑승하였고 이들을 호위하기 위해서 AH-64D 아파치 2대와 블랙호크 4대(호위병력 탑승)가 동원되어있는 상황이었다. [7]
하지만 샤흐는 미군이 동료들을 구하러 올 것이라는걸 알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이 동료가 다치면 도와주러 온다는 사실을 알고있다, 그리고 그건 전장의 규칙이다"

이라고 나중에 이야기했을 정도로 이미 탈레반은 미군이 구조작전을 시작하자마자 산중에서 RPG를 이용한 대공사격을 실시하게 된다. 이 화망에 하필이면 패스트 로프(Fast Rope)을 하던 네이비씰 10팀이 탑승한 후방램프를 통해서 조종석으로 탄두가 날아왔고 덕분에 조종석에서부터 폭발한 이 한방이 최악의 참사를 만들게 된다.

이 사고로 호출명 -터빈 33- 치누크에 탑승해있던 16명(8명의 해군 특수부대원과 8명의 제160특수작전항공연대 대원)의 특수부대원과 파일럿 2명 승무원 2명이 전원 사망하게 된다. 한꺼번에 20여명이 넘는 병력과 그 대다수가 특수전부대라는 사실에 경악한 지휘부는 즉각 구조작전을 취소하고 퇴각함으로서 생존자인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을 남겨둔채 미군이 퇴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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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은 당시 탈레반들이 찍은 씰 10팀으로부터 노획한 노획품 이미지라고 한다. 전사자들 사진은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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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 러트렐

당시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은 다리에 총상을 입는등 각종 부상에도 불구하고 12km를 강행군하였지만 절벽에서 떨어져서 사실상 움직일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덕분에 그는 회고한대로 누워 죽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5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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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하마드 굴랍

생존자인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를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민간인에게 속아서 이 상황이 된 마커스 러트렐는 그를 매우 경계했다. 하지만 그는 마커스 러트렐를 안심시키고 자신의 마을인 사브레이(Sabray)로 데려오는데 그가 바로 모하마드 굴랍 칸(Mohammad Gulab Khan)이다.[8] 굴랍은 탈레반으로부터 은신처와 치료등을 위한 지원을 해주게 된다. 그리고 교전 반발 4일차인 7월 2일. 사브레이 마을의 장로가 인근의 미 해병대기지 캠프 블레싱(Camp Blessing)을 찾아갔다. 그는 러트렐의 메모를 전달함으로서 그의 생존이 확인되게 된다.

물론 그의 마을 역시 어느 아프간 마을과 다르지 않게 탈레반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없었고 마을내에서도 탈레반 동조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탈레반이 당연히 이 마을로 오게된다. 당연히 탈레반들은 사브레이(Sabray) 마을 사람들을 협박했지만 이 사람들은 탈레반을 싫어한터라[9] 마을의 규율대로 마을 사람들이 탈레반으로부터 그를 보호함으로서 탈레반과 마을의 충돌은 불가피해진다.

6 구출작전과 전장수습

당연히 최악의 참사에 침통한 상황이었지만 생존자를 찾는데 미군은 혈안이 되어있었다. 며칠동안 수색이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MH-47은 탈레반 대공무기의 표적이 된다는 위험 때문에 제대로 항공탐색을 할수가 없었다. 하지만 미 육군 특전단 그린베레(Green Beret)가 이미 마을 주변에 거의 다 와서 수색작전을 펼치고 있었고 기동성이 우수한 HH-60 페이브 호크 헬리콥터[10]와 구조전문가인 미 공군 파라레스큐를 투입하면서 대규모 구출작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아프간군 특수부대의 유도를 받아서 미 육군 그린베레 팀원들이 마을외곽에서 차단선을 펼치는 과정에서 마커스 러트렐의 존재를 역시 파악한 탈레반 역시 마을을 공격하게 되고 22시경에 미육군 그린베레 + 마을 민병대와 탈레반의 교전이 시작된다. 마을 민병대는 필사적으로 탈레반과 싸웠고 AH-64 아파치들과 AC-130H 건쉽의 막강한 항공화력과 그린베레의 화력에 탈레반이 밀리는 상황이 되어 결국엔 탈레반은 패배하여 퇴각하고 만다. 이 교전 때문에 구조헬기가 지연되어서 23시 05분에 기지를 출발하여 23시 38분에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주민들로부터 안내를 받아 마커스 러트렐에 대해 신분확인절차[11]후 그와 모하마드 굴랍이 함께 헬기에 탑승하여 이송함으로서 생존자 구출이 그렇게 끝나게 된다.

그리고 당연하게 전사자 영헌과 현장을 수습하기 위해서 추가적인 작전을 벌이게 된다.
이 작전은 네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에어파이터 -출동! 블랙호크'(러트웰 구출과정)에서도 다뤄지고 있다.

7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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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6월 27일~ 7월 초까지 벌어졌던 이 레드 윙 작전은 최악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미 특수전사에서 유례없는 피해를 남긴것은 두말할 것 없는 실패였다. 19명의 특수전 부대가 전사한 것은 이란 미 대사관 인질사건에 대한 구출작전인 독수리 발톱 작전 (Operation Eagle Claw) (델타포스 8명 사망) 이후 최대 피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6년 뒤인 2011년 8월 6일 새벽,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의 공격으로 미군 31명이 탄 치누크 헬리콥터가 격추되어 탑승인원 전원이 전사했고, 이들 31명 중 대다수가 네이비 씰 내에서도 최고의 정예인 DEVGRU[12] 소속의 대원들이었기에 레드 윙 작전은 미 특수전 사상 두번째로 피해가 큰 작전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이후 미군은 고가치표적에 대한 작전 수행에 있어 좀 더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을 추구하게 되었다. CIA가 운용하는 프레데터(Predator) 무인기(UAV)에 의한 헬파이어 미사일 공격과 같은 공격형 무인기와 항공타격으로 작전을 전환하게 되지만.. 이것이 또 항공오폭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씰 10팀등 미군 특수부대를 몰살시켰던 아흐마드 샤흐(Ahmad Shah)는 2008년 4월 파키스탄 북서부 국경지대에서 파키스탄 경찰과의 총격전으로 사망함으로서 복수는 할수 없었다. 물론 미군은 아흐마드 샤흐가 죽은 것만으로 만족하지만.

여담이지만 정찰조를 구출하기 위해서 투입된 터번33기에는 한국계 제임스 서(한국명: 서성갑, 당시 28세) 하사가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이 일화는 영화 론 서바이버를 통해서 다시 영화로 만들어져서 전사한 그들을 기리고 있으며 영화속에는 실제 생존자였던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에 까메오로 출현하여 전사한 동료들을 기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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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유일한 생존자인 러트렐은 자신을 구해준 모하마드 굴랍과 재회했다. 러트렐은 굴랍에게 감사를 표하며 식사대접을 했다.
  1. 영화속에서도 보여주지만 실제로도 산악지형에서의 통신이 매우 불안정했다고 한다.
  2. 91년 걸프전때 영국 SAS도 유사한 상황을 겪었고 민간인을 놓아줬다가 발각되어서 곤경에 처했던 적이 있다.
  3. 1968년의 북한군 특수부대는 청와대 침투 작전 중에 산길에서 만난 나무꾼 형제를 민간인이라며 살려줬고, 그래서 발각되는 바람에 전멸당했다.
  4. 하지만 김신조 사건으로도 유명한 1·21 사태는 살짝 다른점이, 북한 특작부대의 경우, 나무꾼 형제가 단순히 민간인이라 인권 문제 때문에 살려준 것이 아니라, 당시 한겨울의 꽁꽁 얼어붙은 설산에서 마주쳤으므로 나무꾼 형제들을 죽이고 묻기 힘들고 귀찮아서 (꽁꽁 얼어붙은 땅을 깊이 파기 매우 힘들기에) 놓아줬다고 김신조 소위가 이후 밝힌 바 있다. 더욱이 이들은 이미 민족보위성으로부터 마주치는 민간인은 모두 사살하라는 명령까지 받은 상태였지만 때가 한겨울이였던것 + 북한에서 받은 세뇌교육(무산계급이 무슨 신고를 하겠냐는 안일한 생각이였다고 한다.) 때문에 죽음을 자초하게 된것이다.
  5. 실제 생존자인 마커스 러트렐(Marcus Luttrell)는 자신의 결정에 매우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그를 구해준 사람도 결국 민간인이었으니 그 결정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렇게 특수부대원들이 민간인을 살려준 사례는 의외로 많은 편이며 어차피 100% 누군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들키지 않는 쪽으로 가는 게 최선이다.
  6. 이 희생으로 그는 명예 훈장이 추서되었다.
  7. 달랑 치누크 2대만 오고 호위 헬리콥터가 아예 없던 영화 론 서바이버와 다르게 호위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8. 다른 소스에서는 마을 양치기 소년들과 접촉하여 데려오게 되었다고도 한다.
  9. 아프간인들이라고 무조건 탈레반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을 무척 싫어하여 싸우는 사람들도 많다.
  10. 현역으로 소집된 공군 예비역 조종사들이 투입되었다.
  11. 그 사람만의 개인 취미등을 물어보면서 확인을 거친다. 이는 실제로 상호간 피아식별을 위해서 하는 당연한 조치이다. 러트렐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은 "가장 좋아하는 슈퍼히어로는?"
  12. 오사마 빈라덴을 사살한 전과를 올린 그 부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