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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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px-Rembrandt_van_Rijn_-_Self-Portrait_-_Google_Art_Project.jpg 1659년에 그린 자화상.

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1]

1606년 7월 15일 ~ 1669년 10월 4일
네덜란드화가. 바로크 시대의 거장이자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1 생애

제분업자의 9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는 개신교도였다.[2] 본래는 레이덴대학교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일찌감치 예술에 두각을 보이기 시작해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1624년에 고향인 레이덴으로 돌아와서 아틀리에를 열었다. 한동안은 독학으로 친척이나 이웃노인, 성서 등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다가,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협회에게 의뢰받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La leçon d'anatomie du docteur Nicolaes Tulp)>가 호평을 받으면서 암스테르담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10년간은 렘브란트의 생활이 가장 빛나던 때였다. 명문가문의 딸이었던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와 결혼했고,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이 높아 많은 의뢰를 받았고 제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렘브란트 자신의 화풍이 성숙하면서 평면적인 초상화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점차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지면서 종교적/신화적인 소재를 따서 그리거나, 자화상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이 때부터 세속적인 성공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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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정타는 바로 1642년에 완성한 명작인 '야경'[3]
이었다. 이는 암스테르담 자경단 협회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렘브란트는 당시의 기념사진 같은 단체초상화에 만족하지 못해, 명암효과를 주는 식으로 대담한 구성을 시도했으나 혹평을 면치 못했다. 그 이유는 같은 돈을 냈는데 누구는 주인공처럼, 누구는 배경처럼 묘사되어서 당대의 그림 구조와 크게 어긋났기 때문.[4] 모사도를 보면 원래 이 작품은 더 컸었는데 이 그림이 걸려있던 건물이 개축되면서 놓을 장소가 없어 그림 일부를 잘라냈다고 한다. 당시 이 그림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졌는지 알 수 있다. 물론 현대에는 불멸의 걸작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더군다나 같은 해에 아내인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났다. 다행히도 두번째 아내인 헨드리키의 내조를 받아 작품세계가 더욱 발전을 거듭하여, 렘브란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은 1640년대 이후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생활이 가면 갈수록 어려워져서 1656년에는 파산선고를 받고 그나마 가지고 있었던 저택과 미술품마저도 전부 팔아야 했다. 하지만 사후 네덜란드 정부가 발벗고 나서 렘브란트가 팔아치워야했던 미술작품 120점가량의 대부분을 사들여 렘브란트의 생가에 전시해놓는다.그중에는 루벤스와 같은 거장의 작품들도 많다고. 한때는 정말 잘나갔다보다. 1662년에는 헨드리키도 세상을 뜨고, 1668년에는 사스키아의 사이에서 본 아들인 티투스마저 세상을 뜨면서 렘브란트도 1669년, 유대인 구역의 허름한 집에서 눈을 감았다.(참고로 그는 유대인이 아니다. 다만 유대인 친구가 많고 유대인들과 친하게 지낸 편).

렘브란트는 명암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화가로, '빛과 어둠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붙었고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자화상을 무척 많이 그린 화가였는데, 100점 이상을 남겼다고 한다.[5]

2 종교관

409px-Rembrandt_Harmensz._van_Rijn_048.jpg 《청년 예수의 얼굴》1648년

종교화를 그릴때는 다른 화가들과 달리[6] 성경인물 혹은 순교자들의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나약한 듯한 모습으로 그릴때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위에서 말했다시피 렘브란트 자신이 개신교 신자였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묘사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위 그림도 일반적인 예수 초상화와는 좀 미묘하게 다른 분위기인데 당시 지인이던 세파르딤 유대인 청년을 모델로 해서 그렸기 때문이다.[7]

다만 어머니가 가톨릭이었다는데서 알 수 있듯 단순히 화풍을 갖고 렘브란트를 독실한 개신교 신자라 확신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안재경 목사가 쓴 렘브란트의 하나님이란 책에서는 그가 확실하게 개신교 신자인것처럼 서술해 놓았지만 어디까지나 개신교 신자들에게 흥미거리를 주기 위한 책이라 신빙성은 좀 낮다. 반면 김학철 교수가 쓴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라는 책에서는 좀 더 객관적이고 학술적으로 서술되어 있으니 이쪽을 추천한다. 이 책에서는 그의 신앙관이 주류 칼뱅주의와는 좀 거리가 있다고 서술되어 있다.

3 기타

인공지능에게 렘브란트의 그림을 학습시켜 렘브란트풍의 그림을 그리게 하는 프로젝트가 진행중이다. 이름하여 넥스트 렘브란트.

  1. 풀네임을 해석하면 라인 강 근처(레이던)에 사는 하르먼의 아들 렘브란트란 뜻이 된다. 네덜란드도 과거에는 이렇게 '~의 아들/딸'식의 이름을 사용한 듯 하다
  2. 단, 확실하게 개신교도였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복잡한(?) 가족력 때문인지 그는 자기 아들인 티튀스에게 수도승 옷을 입힌 코스프레 그림도 그렸었다.
  3. 원제목은 따로 있는데 프란스 배닝 코크 대위의 민간 경비대 ( The Company of Frans Banning Cocq Preparing to March) 아니면 줄여서 야경이라고 부른다.
  4. 이건 요즘 단체사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는 얼굴이나 그림자에 가려져 안나오고 누구만 부각된다면 잘 찍은 단체사진이라 보기 어려울 것이다. 이 그림이 현재 소장된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 가보면 이 그림의 인물들이 누구누구인지도 다 조사해서 안내판에 적어놓고 있다.
  5. 지식채널 e에서 렘브란트를 주제로 한 에피소드 에서는 세월이 지날수록 파멸되어간 렘브란트의 삶을 묘사하는 연출로 이용되었는데, 실제 초상화속 렘브란트는 젊었을적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치는 청년의 모습이였다가 늙어가면서 재산을 탕진하고 자식이 죽고, 부인들과 사별하면서 희망을 잃어가는 얼굴로 바뀌어 간다.
  6. 다빈치, 미켈란젤로같은 화가들은 위풍당당한 모습에 백인의 외모, 거기에 후광(헤일로)까지 그려넣어서 일반인과 다르다는 걸 강조하는 경향이 많았다
  7. 참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