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역대국왕 | ||||
카롤루스 대제 | ← | 루트비히 1세 | → | 로타르 1세 |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카롤루스 대제 | ← | 루트비히 1세 | → | 로타르 1세 |
이름 | 경건왕 루트비히 "Ludwig der Fromme", 사근사근한 루이 "Louis le Debonaire", 아키텐의 루이 "Louis the Aquitania" |
생몰년도 | 778년 ~ 840년 8월 28일 |
재위기간 | 814년 1월 ~ 840년 8월 28일 |
출생지 | 푸아티에 샤스뇌유 |
사망지 | 페터사우에 |
1 개요
프랑크 왕국 카롤링거 왕조의 3대 국왕이자, 서로마 제국 카롤링거 왕조의 2대 황제다.
2 제위계승
778년 카롤루스 대제의 쌍둥이 아들로 태어났으며, 태어났을 당시 이복 형 피핀 4세와 친형으로 피피노 카를로만, 소 샤를이 있었다. 쌍둥이 친형은 2세 때 죽게 된다. 즉 그는 막내아들이었다.
그런데 형인 피핀 4세는 곱사등이었고 그로 인해 피핀 4세의 어머니는 카롤루스 대제와 이혼하고, 피핀 4세 역시 사생아로 격하되었다. 결국 이에 불만을 품고 792년 피핀 4세는 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를 죽이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수도원에 유폐당했다.
카롤루스 대제가 806년 제국의 후계를 정할 때 루트비히 1세는 아키텐의 국왕이 된다. 하지만 810년 피피노 카를로만을 시작으로 811년 소 샤를과 피핀 4세 모두 죽게 되자 그는 카롤루스 대제의 유일하게 남은 아들이 되었고[1] 813년 아버지와 함께 서로마 제국의 공동통치자가 되었고, 814년 아버지가 죽자 단독통치자가 되었다.
3 막장 아들들
이렇게 힘겹게 제위에 오른 그는 조카 베른하르트 1세의 반란 등 각종 반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는 그의 제위계승이 상당히 정통성이 떨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그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곧바로 제국 상속령을 발표해서 그의 세 아들 로타르 1세, 페펭, 루트비히 2세에게 제국의 영지를 상속하고 그들의 아들이 그들의 사후 상속하게 해서 자신의 전처를 밟지 않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내아들 카를 2세가 태어나자 카를 2세에게 이미 세 아들에게 나누어졌던 영토의 일부를 떼어내서 상속하게 하려고 했고 그로 인해 830년 장남 로타르 1세를 중심으로 페펭, 루트비히 2세가 합심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첫 반란은 진압당했고, 831년에 재차 반란이 일어났으나 역시 진압당했다.
하지만 833년 3차 반란 때 결국 그는 폐위당하고 수도원에 감금되게 된다. 하지만 834년 교황의 적극적인 지지로 기적적으로 제위에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이후 그는 강력해진 자신의 왕권을 이용해 막내 아들 카를 2세에게 많은 영토를 상속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838년 차남 페펭이 죽자 그 상속지를 장남인 로타르 1세와 막내 카를 2세에게만 나눠주는 바람에 삼남 루트비히 2세의 반발이 일어났고 그 반란 도중에 바이킹의 침공이 있어서 제국은 혼란에 빠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4 신앙정책
경건왕이라는 별칭에서 보이다시피 그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부활절,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기념일을 국가적인 행사로 치루게 하였고, 교회와 수도원을 새로 건립하였으며, 성직자들을 요직에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정책으로 인해 그가 세 아들에 의해 폐위당했을 때 교황의 지지로 다시금 복위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5 사후
루트비히 1세는 840년 아들들의 반란과 바이킹의 침공으로 점철된 제위 후반기를 지내고 죽음을 맞게 되는데 결국 아들들의 반란으로 말미암은 상속권 분쟁은 그의 사후 더 심화가 되었다.
제위를 물려받은 장남 로타르 1세는 단독으로 제국을 통치하려고 하다가 두 동생 즉 루트비히 2세와 카를 2세의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고 결국 두 동생이 반기를 들게 된다. 이 와중에 페펭의 아들인 조카 아키텐의 피핀 2세의 도움을 받게 되지만 역부족이었고, 843년 두 동생에게 굴복하여 베르됭 조약을 체결하게 되고 프랑크 왕국은 삼분할 당하게 된다.- ↑ 피피노 카를로만의 아들인 조카 베른하르트 1세가 있었지만 나이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