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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造寺隆信 (りゅうぞうじ たかのぶ)
1529년 3월 24일 ~ 1584년 5월 4일
1 개요
일본 전국시대 큐슈 다이묘, 류조지 가문의 19대 당주.
'류조지가 부흥의 시조'라고 불리운 류조지 이에카네(龍造寺家兼)의 증손자로서, 그 기량을 꿰뚫어본 이에카네가 죽기 전, 직접 대를 잇도록 유언을 남겼다.
북큐슈의 유력 다이묘였다. 남큐슈의 유력다이묘였던 시마즈 가와 자웅을 겨룰만한 세력을 구축하여, 류조지를 오토모(大友), 시마즈(島津)와 함께 큐슈 3강(九州三强)으로 키워냈다.
최초 가독을 승계받은 직후에는 불만을 가지고 있는 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당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오우치 요시타카를 등에 업었으나, 1551년에 스에 하루카타의 반란으로 요시타카가 사망하자 일시 도망, 2년 뒤에 복귀하였다.
다카노부는 당시나 후세에나 '냉혹한 성격에 의심이 많다'는 공통된 평이 있는데, 이는 어려서부터 수 차례나 쫓겨났다가 돌아오는 등, 고난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복귀하여서부터는 본격적인 류조지 가의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이 때, 쇼니(少弐) 가문, 치바(千葉) 가문 등의 여러 세력을 멸망시키면서 계속하에 세력을 키워나갔다. 너무도 급하고 강력하게 커가는 류조지 가문에 위협을 느낀 아리마(有馬), 오무라(大村) 등의 주변 세력이 연합을 형성하여 대항하였으나,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타카노부의 활약으로 류조지 가문은 근거지 히젠과 치쿠코, 히고를 넘어 치쿠젠과 부젠의 일부까지 차지하며 큐슈 3강중 한 세력인 오토모가와도 밀리지 않는(오히려 우세한)힘을 보였다. 하지만 영지 지배력에 있어선 다른 두 가문에 비해 취약한 편이었고[2] 근거지인 히젠 외의 지역은 반란이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때마다 출병해서 진압해야 했고 경고를 남겨두기 위해 가혹한 처분 등을 행했는데 이는 아리마씨가 반기를 들게된 원인이기도 하다.
1584년에 아리마 씨가 반란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주변 호족들이 술렁거리게 되자, 다카노부가 직접 6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이를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아리마-시마즈 연합군과 싸운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대패하면서 결국 자신도 5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아리마-시마즈 연합군은 8,000 정도로, 6만(실제로는 2만 정도라는 설도 있음)의 류조지군에 비해 수적 열세였으나 좁은 지형적 특성을 이용한 시마즈가 4형제의 막내인 시마즈 이에히사에게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다카노부를 위시한 류조지 사천왕등, 류조지가의 우수한 무장 들이 다수 사망하면서 결국 향후의 세력판도를 시마즈가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오키타나와테에서의 패전은 류조지 군의 장병이 진창에 발이 묶여 몸을 움직일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카노부가 무모한 공격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병사들이 자포자기해서 졌다고도 전해진다. 그리고 평소부터 가신들을 차갑게 대했기 때문에 다카노부의 가마를 드는 것에 질린 측근들은 가마를 버리고 도망쳐서, 다카노부는 도망칠 틈도 없이 끔살당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바로 앞에 나타난 시마즈의 무사를 향해
홍로위의 눈 한송이.(紅炉上一点の雪)
라는 말을 하고 죽음을 당하는데 이것이 사세구로 전해진다.[3] 곰같은 양반이 뭐이리 간결하고 서정적인 표현을 다 생각해내나...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겠지만 타카노부는 7살때부터 18살때까지 승려로 살았었다.[4]그러니깐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
그 후 시마즈 군이 베어간 다카노부의 목은 후에 류조지 가에 반환되었지만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반환을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어머니가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아버지인 키요후사의 아내가 됐기 때문에 나오시게와는 형제뻘. 그의 어머니는 대단한 여장부로 그가 죽고 난 후 나오시게와 함께 류조지가를 다스렸다고 한다.
2 기타 창작물
2.1 노부나가의 야망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전형적인 맹장형 무장으로 등장. 규슈 3강 중 류조지가만 가문기술이 없기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였으나, 최근작인 창조 PK에서는 드디어 가문 고유 정책이 추가되었다!- ↑ 곰처럼 음흉하고 냉혹한 성격과 무략으로 류조지 가를 큐슈 3강으로 불릴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형성했다.
- ↑ 오랜세월 큐슈에서 슈고 다이묘로 정착해왔던 오토모, 시마즈와는 달리 류조지는 쇼니의 가신이었다가 쇠퇴한 주가를 추방하고 그자리를 차지한 센고쿠 다이묘였다. 때문에 전통적 권위가 부족했고 스스로 주가를 밀어내고 올라온 입장에서 충의를 요구해봐야 설득력도 별로 없었다.
- ↑ 뜨거운 화로위의 눈 한송이가 눈깜짝할새에 사라지는것처럼 인생도 한순간뿐이었다는 의미
- ↑ 허구헌날 전쟁터에 나가야 하는 무사들과는 달리 승려는 당대의 지식인 계층이었고 절간은 불도를 닦는것 외에 학문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환속시키는것 외에도 웬만큼 여유가 있는 무사들은 자식들을 근처 절간에 보내서 공부시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