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엘 플레이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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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 Brujo

이름마누엘 아구스틴 플레이타스 솔리흐
(Manuel Agustín Fleitas Solich)
생년월일1900년 12월 30일
사망년월일1984년 3월 24일
국적파라과이
출신지아순시온
포지션하프
신체조건190cm / 83kg
등번호-[1]
소속팀클루브 나시오날 (1918-1926)
CA 보카 주니어스 (1927-1931)
라싱 클루브 데 아베야네다 (1931)
플라텐세 (1932-1933)
CA 타예레스 (1933)
CA 보카 주니어스 (1933-1936)
국가대표32경기 / 6골 (1919-1926)
감독파라과이 (1922-1929)
라누스 (1932)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33)
킬메스 AC (1933-1935)
CA 타예레스 (1936)
라누스 (1937)
클루브 나시오날 (1937-1938)
파라과이 (1939)
CA 리베르 플라테 데 아순시온[2] (1940-1941)
올림피아 (1942)
파라과이 (1942)
리베르타드 (1943-1944)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1944-1945)
파라과이 (1945-1946)
라누스 (1946)
킬메스 AC (1947)
파라과이 (1947-1953)
CR 플라멩구 (1953-1957)
CR 플라멩구 (1958-1959)
레알 마드리드 CF (1959-1960)
CR 플라멩구 (1960-1962)
파라과이[3] (1962-1965)
SC 코린치안스 (1962-1963)
플루미넨시 FC (1963)
SE 파우메이라스 (1966)
클루비 아틀레치쿠 미네이루 (1967-1968)
EC 바이아 (1970-1971)
CR 플라멩구 (1971)
길다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감독
루이스 카니글리아
(1959)
마누엘 플레이타스
(1959~1960)
미겔 무뇨스
(1960~1974)

1 생애

1.1 클럽

기자의 아들로 태어난 플레이타스는 아순시온을 연고로 하는 클루브 나시오날에서 17살에 데뷔하였다. 그리고 특유의 외유내강적인 보스 기질로 어린 나이에 주장의 자리를 꿰찼다. 플레이타스가 주장이 된 후 팀은 성적을 끌어올리기 시작해 1924년, 13년만에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활약에 힘입어 플레이타스는 아르헨티나의 명문 CA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하였다. 여기에서도 그는 주장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고 1931년 시즌 중까지 보카에 머물렀다. 하지만 1930년에 입은 다리 골절로 인해 그는 선수로서는 전성기 때의 기량을 다시는 발휘할 수 없었다. 그 이후에는 아르헨티나의 몇 팀을 돌아다녔고 1936년에 선수 생활을 접었다.

1.2 국가대표

플레이타스는 1919년 파라과이 대표팀이 처음 결성되었을 때부터 핵심 멤버였다. 비록 당시 파라과이가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기존 강호들을 넘지는 못했지만 플레이타스는 대표팀의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1.3 감독 생활

플레이타스는 선수 시절부터 국가대표팀을 선수 겸 감독으로 뛴 특이 케이스였고, 한 팀에 오래 있지는 못했지만 그는 꾸준히 여러 팀들을 감독해왔다. 그의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1953년의 코파 아메리카에서 조국 파라과이를 우승시킨 때였다. 이것은 파라과이의 코파 아메리카 첫 우승이었고 이 활약으로 플레이타스는 브라질 클럽들의 영입제의를 받았다. 1959년에는 잠시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을 맡기도 했고 그 이후에는 브라질에서 시간을 보냈다.

1.4 사망

1984년 브라질의 히우지자네이루에서 사망했는데 상속인을 결국 찾지 못할 정도로 파라과이에서는 거의 잊혀진 이름이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당시 포지션으로는 하프, 요즘 포지션으로 따지면 미드필더에서 뛰었다. 그는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술적으로 뛰어났고 공을 빠르게 다룰 수 있었다. 또한 리더의 기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3 뒷 이야기

4 수상

4.1 클럽

4.2 국가대표

4.3 감독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아르헨티나의 팀이 아닌 파라과이의 팀이다.
  3. 이 시기에 SC 코린치안스플루미넨시 FC의 감독을 겸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