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문의 문장. 여섯 개의 알약이 중심 상징이다.

1400년대에 메디치가는 피렌체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이었다. 이 가문의 뿌리는 잠부오노 데 메디치의 장남이자 시의회 의원인 키아리시모가 베키오 시장의 여러 가옥과 탑들의 소유자로 알려진 1201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 찾을 수 있다.

메디치 가의 성씨인 'medici'가 당대 이탈리아어로 의사 혹은 약제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흔히들 메디치 가문이 본래 의사가문이라고들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확실하지 않다. 메디치 가문은 1230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행적을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설이 발생한 연원은 크게 두가지로 추측된다. 첫째, 조반니 데 비치의 장남 코시모가 언어유희를 즐기던 중세의 풍을 따라 자기와 자기 가문의 수호성인들을 의사 성인들인 성 코스모(Saint Cosmo)와 성 다미아누스(Saint Damian)으로 정했고 이들이 코시모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그림에 등장했기 때문. 둘째로는 카트린 데 메디치 시대에 파리의 지식인들이 그녀를 깎아내릴 의도로 메디치 가문이 원래 약제사(medici)들이었고, 그 가문의 문장에 존재하는 구형이 그들이 만든 환약을 상징한다는 설을 유포했기 때문이다. 이들 설은 완전히 날조된 것으로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보다 2백년 더 거슬러 올라가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내내 의사들(혹은 약제사들)이 아니라 상인들과 은행가들이었다. 일례로 메디치 가문은 약제사 길드와 전혀 관련이 없으며 상인 조합에 속한 가문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근거지인 피렌체에는 대략 21가지의 길드가 존재했는데 피렌체 내에서 이들 길드 혹은 조합에 속하지 않은 채 경제활동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했다. 또한 약제사 길드와 상인 조합 모두 21가지 길드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큰 7가지 길드에 해당했으므로 이들 길드의 기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무튼 메디치 가문이 유력한 은행업자 가문에서 유럽의 귀족 사회로 진입하게 된 이후,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가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단순히 환약 다섯 개라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1465년 백합 문장을 수여하게 되어 위와 같은 문장이 완성되었다.

15세기에서 18세기까지 피렌체의 정계에 진출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르네상스 예술의 대표적인 후원자였으며, 그리고 세 명의 교황(레오 10세클레멘스 7세 그리고 레오 11세)와 두 명의 프랑스 왕비(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그리고 마리 드 메디시스)를 배출하는 등 유럽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귀족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로렌조 디 메디치는 보티첼리의 유명한 역작인 비너스의 탄생을 후원하였으며, 코시모 디 메디치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하여 피렌체 대성당을 디자인하게 하였다.

16세기 코시모 1세가 토스카나 대공으로 즉위하면서 대공가로 도약하였으나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1737년 메디치 가의 마지막 토스카나 대공 지안 가스토네가 사망하고 그의 누나이자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도 끝내 자식을 낳지 못 한 채 1743년 메디치 가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피렌체에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자, 메디치 가는 피렌체 인들의 열렬한 애도 속에 긴 역사의 막을 내린다.

항목이 개설된 메디치 가문 출신 인물

그 외에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마지막 남편 조반니 데 메디치도 메디치 가문 방계(로렌초 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의 후손) 출신이다. 그들의 아들 '검은 깃발의 조반니'의 아들이 스페인 왕으로부터 정식으로 토스카나 대공으로 책봉받은 코지모 1세이며, 그 자손들이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피렌체를 지배한 토스카나 대공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