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마모루

毛利 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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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우주 비행사. 홋카이도 출신으로 1948년 1월 29일 생.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 우주환경이용시스템본부 유인우주활동추진실장, 일본과학미래관관장, 재단법인 일본우주소년단 단장, 도쿄공대 대학원 통합이공연구과 제휴교수를 역임. 전문 분야는 진공표면과학, 핵융합로벽재료, 우주실험. 화학자이기도 하다.

본래는 홋카이도대학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플린더즈 대학을 거쳐 화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일본의 연구소에서 근무하였다.

1970년대부터 미국은 일본에 우주왕복선내의 과학실험실을 만들어 각종 실험을 하는 스페이스랩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일본은 기술개발의 견인차로서 우주개발에 관심이 많은 상태였던데다가 무엇보다도 경제호황기여서 예산에 여유가 많았기에 미국의 요구에 응하였다. 미국 역시 일본이 함께 참여해준다면 우주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예산상의 부담을 덜 수 있었기에 누이좋고 매부좋은 상태였던 셈.

이렇게 시작된 일본의 우주인 배출 프로젝트로서, 모리 마모루는 1985년 도이 다카오, 무카이 치아키(여성)과 함께 일본 우주비행사 제 1기생으로 선발되어 NASA에 파견되어 7년간 우주비행 준비 및 우주 연구에 종사하다가 1992년 9월 12일부터 9월 20일까지 STS-47 엔데버에 페이로드 스페셜리스트(탑승과학기술자)로 탑승하였다. 덕분에 아키야마 토요히로에 이어 2번째로 일본인 우주비행사가 되었다.[1] 또 일본 국적 보유자로는 처음으로 우주왕복선을 탄 우주비행사이기도 하다. 귀환직후 카메라 앞에서 "우주에서는 국경선이 보이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후 1996년 NASA 우주 비행단 16기 과정에서 미션 스페셜리스트(탑승운용기술자) 교육을 수료하고 2000년 2월 12일부터 2월 23일까지 2번째 우주비행 STS-99[2]에 참가. 미션 스페셜리스트로서 레이더로 지구의 지형을 정밀히 관측(SRTM)했다.

당시 우주개발에 관심이 많던 일본 내에서는 국민영웅급으로 떠올랐고, 장관직도 역임하는 등, 이후 일본내 우주개발과 과학기술 영향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덕분에 일본내 우주관련 미디어에도 종종 이름이 언급된다(우주형제라든지..).

AC 재팬의 공익광고에 나온 적도 있다.

한국에는 고생물 다큐멘터리생명, 그 영원한 신비의 진행자로서 얼굴이 알려졌다.

한국우주인배출사업은 어느정도 모리 마모루의 활동을 참고한 것이기도 하다. 다만 모리 마모루의 경우와 달리 한국우주인배출사업은 지나치게 쇼 형태로 나가버리는데다가 NASA의 '우주관광객' 디스질까지 더해서 김이 새버린탓에...
  1. 아키야마 토요히로는 일본내 TBS에 근무하던 기자로서 1990년 12월에 국가 프로젝트가 아니라 민간차원에서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다녀왔다. 이는 이미 경제적 문제로 극심한 예산 부족을 겪던 소련 우주개발 프로젝트의 예산확보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정식 우주인으로서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해서 아키야마 토요히로 대신 최초의 우주인을 그냥 모리 마모루로 치는 경우도 많다.
  2. 이 미션은 엔데버의 마지막 솔로 비행이었다. 이후 엔데버는 오로지 ISS 전용 셔틀로만 쓰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