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7월 26일 당시의 모스크바)
Raids over Moscow
※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월까지 모스크바 외곽에서 벌어진 지상전은 모스크바 공방전 항목 참조.
1 개요
독소전쟁이 시작된 1941년 7월 21일부터 벌어진, 독일 공군이 모스크바에 행한 폭격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의 엄청난 전공들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독소전쟁이 발발한 이후 독일 공군이 사실상 최초로 패배한 전투이다.
2 작전 배경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동하면서 독소전쟁이 시작하였다. 당시 독일 공군은 개전 당일부터 소련 공군을 제압하면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독일 지상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공군과 육군의 합동 작전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 육군의 엄청난 진공 속도에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독일 공군의 총수인 헤르만 괴링은 공군이 육군의 보조 역할을 수행하는 것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1940~41년 동안 벌어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사실상 독일 공군이 패배한 이후 그는 보다 큰 전공을 탐냈다. 그런 괴링에게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소련의 수도인 모스크바였다. 그는 모스크바를 대대적으로 폭격하여 파괴하면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 및 의지가 크게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괴링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경험으로 인해 소련군의 대공 전력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고, 전투력도 크게 떨어져 있어서 폭격 작전은 수월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3 독일 공군의 작전 준비
괴링의 계획을 들은 아돌프 히틀러는 이에 찬성했고, 1941년 7월 19일 모스크바에 대한 폭격 명령을 정식으로 하달했다. 이를 위해 동부전선의 폭격기대와 함께 서부전선에 있던 3개 비행대가 차출되었다.
하지만 독일 공군의 일선 지휘관들은 이 작전에 불만이 많았다. 동부전선의 규모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공군이 육군을 지원해야 할 구역도 급속도로 넓어졌고 이는 갈수록 공군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었다. 게다가 아무리 소련군의 전력이 약하다고 해도 수도인 모스크바의 대공 전력이 빈약할 리는 없다고 예상했다.
그리고 독일군은 제대로 빅엿을 먹었다.
4 소련군의 대응
소련군 측은 괴링의 예상과는 달리 도시 곳곳에 괴악한 대공 방어망을 깔아놓고 있었다. 전선이 모스크바 쪽으로 급속히 이동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모스크바를 수호하라는 스탈린의 닥달로 소련군은 모스크바의 방위 준비에 박차를 가했고 이는 대공 전력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폭격 직전 이미 1000여문의 대공포와 총 585기의 공군 전투기들이 배치되었고, 이중 절반 이상은 Yak-1 등 이제 막 소련 공군에 배치되기 시작한 신형 전투기들이었다.
5 폭격 작전의 진행
1941년 7월 21일 저녁, 독일 공군의 폭격기 185대가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모스크바 시내의 주요 철도역 및 공업시설, 그리고 크렘린이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상공에 도달하기도 전에 폭격기대는 약 170여 대의 소련 공군 전투기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 지상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 포화로 인해 폭격기대는 목표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마구잡이로 폭탄을 투하한 뒤 도망쳐야 했다. 이 날 모스크바 시내엔 산발적으로 폭탄이 떨어져 일부 민간인 거주 지역과 크렘린 및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관 건물이 약간 파손되는 피해만이 났다. 폭격기 중 격추된 폭격기는 12대였다.
다음날인 7월 22일 폭격기 115대가 다시 모스크바를 공격했으나 역시 유의미한 피해를 입히지 못한 채 8대가 격추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도 모스크바에 대한 산발적인 공격이 있었으나 큰 의미가 없는 미약한 공격이었다.
6 폭격 작전의 종결
2일간의 폭격전으로 독일 공군 지휘부는 작전 자체를 전면 검토해야 했다. 모스크바 시에 별다른 피해를 입히지도 못하면서 격추 피해만 누적되어 가자 작전 자체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지상전이 모스크바가 아닌 키예프에 대한 대규모 포위 섬멸전에 집중하는 양상으로 흘러가면서 공군 또한 키예프 방향으로 상당한 전력을 집중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에 대한 폭격전은 크게 축소되었고, 모스크바에 대한 대규모 폭격전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사실상 독일 공군의 패배였지만 얼굴에 철판을 깐 괴링은 이 작전의 책임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작전이 일어나기 전에 벌어진 스몰렌스크 전투 때의 공군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이 패전을 덮었다.
7 의의
전투의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고 이 전투를 전후한 스몰렌스크 포위전과 키예프 포위전의 규모가 매우 커서 묻힌 전투이지만 나름대로 의의가 있는 전투이다. 모든 전선에서 무너지던 소련군이 독일 공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최초의 전투이며, 모스크바의 방어력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 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