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괴링

해당 인물의 동생에 대해서는 알베르트 괴링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독일 국방군 원수
육군
(Heer)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게르트 폰 룬트슈테트귄터 폰 클루게발터 폰 브라우히치발터 폰 라이헤나우
빌헬름 카이텔빌헬름 리터 폰 레프빌헬름 리스트에르빈 폰 비츨레벤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게오르크 폰 퀴힐러에리히 폰 만슈타인에른스트 부슈에발트 폰 클라이스트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발터 모델페르디난트 쇠르너에르빈 롬멜프리드리히 파울루스페도어 폰 보크
해군
(Kriegsmarine)
에리히 레더카를 되니츠
공군
(Luftwaffe)
헤르만 괴링알베르트 케셀링에르하르트 밀히
후고 슈페를레볼프람 폰 리히트호펜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이름Hermann Wilhelm Göring
(헤르만 빌헬름 괴링)
출생1893년 1월 12일, 독일 제국 바이에른 로젠하임
사망1946년 10월 15일, 서독 바이에른 뉘른베르크
복무독일 제국군(1912년 ~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군(1918년 ~ 1933년)
나치 독일군(1933년 ~ 1945년)
종교무종교
최종 계급공군 국가원수(Reichsmarschall)[1]
주요 참전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주요 서훈푸르 르 메리트 훈장
가족부모: 父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1838년~1913년)[2]
형제: 弟 알베르트 괴링(1895년~1966년)
배우자: 正妻 카린 폰 로젠(1888년~1931년)[3] /
後妻 에미 괴링(1893년~1973년)[4]
자녀: 딸 에다 괴링[5](1938년~)

1 소개

괴르만 헤링[6]
괴르만 헤링이 더 어울리는데? 게르만 헤링
개명 이후 이름은 헤르만 마이어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 국방군공군(루프트바페) 소속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국가원수(Reichsmarschall)이며 겸 공군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Luftwaffe,OKL)의 최고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Luftwaffe).

민간인 관직으로 국가의회 의원이며 국가의회 의장, 프로이센주(州) 총독겸 내무부 장관[7], 중앙정부 4개년 경제계획부 장관, 산림청장, 항공부 장관[8]도 겸하였고 더군다나 그의 군계급이 그냥 원수가 아닌 국가원수다. 그러나 히틀러는 국가대원수 이를 21세기의 계급체계와 비교를 하자면 6성 장군에 해당된다.[9] 그리고 히틀러가 직접 임명하고 법령으로 선포한 제3제국의 명백한 제2인자.[10]

1차 세계 대전 공군 에이스였으나 보통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비만 약쟁이 이미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권세와 재물에 탐닉한 파시스트 돼지였다. 히틀러와 나치당의 홀로코스트 결정에 관여하고 동의해주었으나, 냉철하게 평가하자면 나치즘과 나치 인종주의, 전체주의에 진지하게 공감했다기보다는 그냥 돈과 명예, 권력을 따르다가 나치스가 된 보신주의자에 해당한다.

밀리터리 매니아들 사이에서의 애칭은 괴돼지, 백돼지, 양돼지, 덕후괴링, 괴링링, 백여돼, 몰핀돼지, 약쟁이돼지, 십덕후, 실크뚱땡이[11], 서양 같은 것이 있다.(...)

2 젊은 시절과 나치당 협력기

아버지는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 초대총독이고 대부(代父)는 에펜슈타인 백작이었기에 소년기를 백작의 성에서 보냈다. 에펜슈타인 백작은 어머니의 불륜상대였다고 한다(...) 심지어 헤르만의 동생인 알베르트 괴링의 진짜 아버지는 에펜슈타인 백작이란게 사실상 정설이다.

일화로 괴링의 어머니가 어린시절 괴링의 행실이 싹수가 노란 것을 보고 헤르만은 위대한 사람이 되거나 범죄자가 될것이다라고 작두탄 예언을 했다. 그리고 둘다 맞았다 독일 공군 에이스인 동시에 위대한 범죄자가 되었지


가운데 흰색 포커 D7기가 그의 전투기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집안 배경이 좋아서 당시 독일에서 가장 선호하는 직업인 군인이 되려고 육군사관학교 졸업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종군하여 1차대전 최고의 에이스집단 "제1전투비행단(JG1)" 3대 지휘관이자 22대 격추의 기록을 수립하여(괴링의 부대 내에서 실제 격추숫자보다 부풀린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1차대전 독일군 격추순위 56위에 등극했다. 이 공적으로 인해 전쟁영웅으로 이름을 날리며 그 공적으로 "푸르 르 메리트"(또는 다른 이름으로 블루 맥스) 훈장을 받았다. 사실 젊었을 때는 훈남엄친아로 사교계 스타로 유명했다. 1차대전 최고 에이스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히트호펜이 전사하고 비행대대를 이어받은 사람이 헤르만 괴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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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 드 메리테 훈장을 단 1차대전 당시의 간지남 괴링. 모두들 나의 괴링은 이러지 않아!!를 외쳐보자.(...)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잔류하도록 인정받은 엘리트 장교 4천명 중 하나였으나 괴링 본인이 이를 고사했고 전시복무한 장교 특혜로 뮌헨대학에 특례입학 허가를 받았으나 진학하지 않았다. [12] 덴마크스웨덴의 민간 항공업계를 전전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스웨덴으로 가서 귀족 남편과 별거중이었던 카린을 만났고, 결혼을 약속했다. 이후 괴링은 뮌헨으로 돌아왔고, 카린도 이를 따라와서 둘은 결혼을 한다.

독일로 귀국한 괴링은 뮌헨 대학에서 경제학과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국수주의로 기울어졌고 이 당시 뮌헨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나치당이 세력을 넓히고 있었고, 관심을 가진 괴링은 1922년 가을에 처음으로 히틀러와 대면하였다. 처음 히틀러를 만난 자리에서 괴링은 히틀러에게 완전히 매료되었고 괴링은 나치당에 곧 가입했고 돌격대의 재편성 임무를 맡았다. 전쟁영웅에다가 타고난 사교성, 히틀러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 뛰어난 통솔력등으로 나치당 내에서 빠른 속도로 상위간부직에 올랐으며, 나치당 초기 노선중 같은 뮌헨 출신이며 약사출신 그레고어 슈트라서[13]가 나치당 좌파의 중심이었다면 괴링은 빌헬름 프리크[14] 등과 함께 나치 우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15] 또한 사교계 연줄을 활용하여 귀족과 기업가들에게서 고액 기부를 얻어내어 히틀러의 주머니를 넉넉하게 하고 사치생활을 가능하게 만들어 깊은 총애를 받는다. 괴링은 이렇듯이 뮌헨의 높으신 어른들이 주축인 초기 나치당 '우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고 슈트라서 형제나 괴벨스 같은 나치당 내부 좌파로부터 하버드 출신 '도련님' 한프슈탱글[16]과 더불어 매번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17]

정치 역량도 뛰어난 편이라 돌격대친위대 창설에 깊이 관여했고 훗날 악명 높은 게슈타포는 자신이 나치 정권 초기 프로이센 정치 경찰[18]을 정비하여 반나치성향의 간부들을 숙청하고 직접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을 맡으며 조직을 정비했다. 이외에도 나치스 집권기에 국회의장, 재무부 장관을 비롯한 요직을 두루 거쳤다(심지어 국가수렵어업청장까지 지냈다.). 특히 히틀러가 정권잡는 초기에는 독일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프로이센주를 맡아서 공산당을 비롯한 정파숙청에 1등 공신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전황이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어 히틀러와 반목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나치 독일의 제 2인자였다. 물론 압도적인 격차로 2인자의 위치에 오른 것이 아니므로 당시 친위대를 거느린 히믈러와 공군을 거느린 괴링, 그리고 당을 장악한 보르만은 히틀러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피튀기는 암투를 벌였다. 그런데 히틀러는 이들을 모두 배제하고 되니츠를 후계자로 임명...지못미...일찌감치 나치 2인자로 후엔 공식 2인자로 자리를 굳혔지만 실제 권력 서열이 정권 기간 동안 영향력이 2인자 였던건 아니다. 1938년 체코위기때는 히틀러한테 찍혀서 1년넘게 만나지도 않았다고한다. [19] 전쟁중엔 잠깐 좋은시절 빼곤 날이면 날마다 남들 다 보는 앞에서 히틀러가 괴링욕을 해대서 역시 불편한 사이였단다(...)

이 시기 괴링은 얄마르 샤흐트를 만나는데, 샤흐트는 독일이 미친 초인플레이션에서 벗어나게한 국가은행 총재였으며,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인플레이션 탈출의 공헌을 인정받아 국내외에서의 인기도 아주 높은 인물로, [20] 이 시기 괴링을 통해 나치당에 협력하게 되고 나치당의 입지도 힘을 얻게 된다. 샤흐트는 괴링을 '겸손하며 영리하다'라고 묘사했으니 확실히 이 때의 괴링은 샤프하고 영리한 모습이 있었던 것 같다. [21] 재밌는 점은 괴링의 소개로 나치당에 입당하여 경제장관 등의 요직을 하게되지만 이후 괴링과의 불화로 요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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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나치 돌격대 지휘관이 된 괴링.

1923년 히틀러의 실패한 뮌헨 폭동 당시 낭심에 심한 부상을 입고 이보시오 의사양반. 아랫쪽에 감각이 없는데 왜 이런 거요? 총알이 영 좋지 못한 곳을 지나갔어요. 내가 괴자라니! 내가 괴자라니이이이! 오스트리아로 도주하게 되었을 무렵 진통제로 맞게된 모르핀에 중독되면서 성격도 변하고(이 무렵 첫 부인이 병사하는 바람에 더 그랬을 것이다.) 체중관리도 안하면서 점차 몸이 불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후 망가지던 괴링은 나치당 집권기에는 이미 잘 알려진 후덕한 이미지로 변모했다. 다만 후처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부인이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면 고자는 되지 않은 듯하다. 아니면 독일의 의학기술이 덕이던가. 어자피 알 한쪽만 있어도 애 낳는데는 지장없다.

부인의 처가가 있던 스웨덴에서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고 그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면령에 의해서 1927년 독일로 귀국해 나치당에서 다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괴링은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행동하여 나치당 간부들이 대부분 상류층이 아니였기 때문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상류층과 재계와 접촉하여 나치당의 인맥을 구축하는 노력을 했다. 괴링의 사교 활동에 의해 같은 대기업들이 나치당에 헌금을 하게 되었고 괴링은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히틀러의 첫 회담도 성사시키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괴링이 없었다면 나치당의 급속한 성장도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연구가의 일치된 견해다. (그 덕에 히틀러가 전쟁 말기까지 '국가원수'의 무능에 치를 떨면서도 괴링을 못내쳤다.)

괴링은 1928년엔 국회의원에 처음으로 당선되었고 1930년엔 히틀러의 공식적인 대변인이 되었다. 나치 당의 핵심인물 중 한명으로 떠오른 괴링은 1931년에 부인이 사망했지만 슬퍼할 틈도 없을 정도로 정치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1932년 7월 31일 선거에서 나치당이 35% 정도의 득표율로 제1당이 되자 괴링은 국회의장으로 취임했다. 그런데 첫 국회가 열린 자리에서 프란츠 폰 파펜이 국회를 해산하는 종이를 가져왔지만 괴링은 파펜을 못 본 척하며 무시했고 화가 난 파펜은 국회 해산 종이를 던져 놓고 나가버렸고 괴링은 파펜 내각의 불신임안을 가결시켰고 이는 파펜 내각을 무너뜨리게 되는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 후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 내각이 세워지자 헤르만 괴링은 프로이센 주의 내무상을 장관 자리를 맡게 되었다. 괴링은 장관이 되자 친위대와 재향군인 조직이던 "철모단"의 멤버들을 보조경찰로 채용하면서 프로이센 주를 나치화 시키는 것을 노력했다. 또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에선 빠르게 사건을 처리하였다, 공산당원이던 루베를 범인으로 단정하고 좌파 세력들의 탄압에 나섰고 이로 인해 돌격대가 자기 맘에 드는 대로 골라서 잡아갔다. 그리고 계엄령을 발동하여 좌파 세력들을 새로 만들었던 다카우 강제수용소로 보내는데 괴링이 그 설립에 지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나치정권 성립 후 대전 발발까지 대외적으로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등과 대비되는 나치당의 온건파로 분류되기도 했다.

1933년 4월 10일에 프로이센 지사로 임명된 괴링은 4월 23일에 프로이센 주 경찰의 정치경찰 부문을 독립시켜서 훗날 엄청난 악명을 떨치게 된 게슈타포를 설립했다. 5월에는 항공상과 임야, 수렵청장을 겸직하며 큰 권력을 거머쥐었고 괴링은 감투를 얻는 것을 굉장히 좋아해서 수십개의 직무를 겸임했다. 1935년 3월, 독일의 재군비로 인해 신설된 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괴링은 4개년 계획을 입안해 스스로 거대 철강재벌의 총수가 되어 군비확장을 추진했다. 1935년 4월 10일에 여배우였던 에미 존네만과 재혼한 괴링은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에게 평소 존경하던 무솔리니의 딸과 같은 이름인 에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시 히틀러를 대신해서 지도적인 역할을 하여 슈슈니크 수상을 협박하여 오스트리아에 독일군의 주둔을 허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뮌헨 협정이 열리게 되자 괴링의 정치적 영향력은 다소 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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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철도 모형, 배 모형을 만들거나 총기를 수집하는 취미등 수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그 수준도 상당하여 철도 모형의 경우 커다란 홀 하나를 디오라마로 만드는 등의 크고 아름다운 행위를 해서 덕후로 몰리게 된다.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의 김괴링은 이런데서 이미지를 따왔다고 할 수 있다.

3 업적

재군비 이후 나치 독일이 타국보다 먼저 공군(루프트바페)를 창설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초대 공군원수가 되었던 것을 보아도 군사적 역량도 처지는 편은 아니었다. 게다가 군인으로서도 괴링은 공군 에이스 출신. 루프트바페는 괴링 덕분에 타국 공군들보다 규모와 예산면에서 월등히 앞섰고 이는 전격전에서 독일군이 유럽을 압도하는 큰 요인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프랑스가 항복하고 영국군이 걸음아 날 살려라고 도망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괴링은 독일의 승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나치스 인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실제로 이 무렵 히틀러는 국회연설을 통해 괴링을 자기 후계자로 거명했을 정도다. [22]

4 실책

1차대전의 영웅은 어떻게 2차대전의 역적이 되었나?
사실 연합군에도 있었다 카더라.

그러나 과거와 달리 괴링 본인의 욕심과 자만심, 과시욕, 부정부패, 약물중독 때문에 후반기로 갈수록 오히려 독일 공군, 나아가 독일군 전체의 발목을 잡고야 말았다. [23]레알 국가원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최정예로 건설한 공군은 나름대로 커버할수 있었다. 문제는 이탈리아의 뻘짓때문에 벌어진 그리스 침공에서부터 공군이 말그대로 망해가기 시작했는데 크레타에서 가장 중요한 야간작전도 아니고 주간작전을 벌인데다 무장을 빈약하게 만들어버리는 낙하산 하나 때문에 팔쉬름예거의 피해가 엄청나게 나온것이다. 정예병이면 뭐합니까 일단 착지를 해야 싸우지

4.1 스페인 내전에서의 양다리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공군은 "콘도르 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전, 프랑코스페인 국민군을 지원했다. 그런데, 그 때 독일 공군의 수장인 괴링은 적군인 스페인 공화군에게도 무기를 팔아 먹었다고 한다. 독일 이름이 바로 뜨면 뭣하니까, 그가 개인적으로 관리하던 라인메탈[24]그리스인 협력자와 짜고쳐서 그리스 육군에 판매하는 척 서류를 꾸미곤 스페인에게 팔아넘겼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국민군의 수장인 프랑코가 이 사실을 알아챘고, 내전이 종결한 다음에 독일과 스페인 관계가 약간씩 껄끄러워지며, 스페인이 공식적으로 추축국으로 들어오지 않은 큰 이유를 제공했다.

4.2 영국 항공전의 패배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괴링은 전격전에서 육군만이 각광을 받은 것에 불만을 가졌고, 영국을 무력화 시키는 데에는 공군만으로 충분하다고 호언하며 영국 폭격을 단행했다. 그러나 공격 부대는 독일 공군이 재건당시 육군을 지원하는 공중포병의 컨셉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가진 것은 항속거리도 짧고 방어력도 탑재량도 충분치 않은 중형 폭격기와 단거리 전투기가 대부분인데다,[25] 중간에 비행장 폭격을 중지하고 런던만 집중 폭격하는 바람에 귀중한 공군 전력의 상당부분을 영불해협과 런던 위에서 잃어버린다. 단순히 유럽 본토에서의 전투만 생각했으면 저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테지만, 문제는 전선이 너무 늘어나서... 그 외에 실책이라고 보기는 애매한것으로는 근접호위를 지시한것이 있는데 폭격기 조종사들이 불안하다고 징징거리고 괴링이 근접호위를 지시하는 트롤링(...)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는 철저하게 전투기 조종사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며 폭격기가 날아가야하는 거리가 멀어지면 선 제압 방식의 호위로는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호위하기가 어렵다. 물론 영국 남동부 정도면 선 제압방식으로도 그럭저럭 호위가 가능하지만 런던쯤 가면 근접호위가 필수적이다. 당연히 공군 전체를 지휘하는 괴링의 입장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입장 뿐 아니라 폭격기 조종사들의 입장도 고려해야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호위할 필요가 있으므로 근접호위를 지시한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보기는 애매하다.근데 결과 그모양이라는게 문제

더욱 희한한건 전투기 숫자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전투기 생산속도조차 신경쓰지 않았다. 그 결과 매월 영국의 전투기 생산 숫자는 독일의 것을 한참 추월해서 마침내는 보유 전투기 대수조차도 영국에 밀려버린다. 이런저런 끝에 공군은 공군대로 날려먹고, 결국 영국 상륙 계획(바다사자 작전)까지 중단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러나 이는 괴링만의 잘못은 아니다. 괴링이 저런 판단을 한것은 조종사들의 격추보고와 초기 영국 전투기 숫자에 의한것인데 조종사들의 격추 전과가 과장되어 있었던 반면에 영국은 전투기를 생산하는것에 사활이 걸려있었기에 동원할 수 있는 역량을 총 동원해서 전투기를 생산해서 전투기 생산량이 독일의 2배에 가까웠고 손실량을 거의 보충하고 있었던 반면에 독일은 전투기 손실 자체는 영국보다 적었으나 손실량을 보충량이 따라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이후 런던 폭격에 집중하면서 전투기 생산 공장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이 격차가 더더욱 벌어진다. 그래도 이런 문제등의 교훈으로 괴링은 보다 엄격한 전과 확인 체계를 갖추라는 지시를 내려서 보다 정확하게 전과를 집계할 수 있었으니 이때까지는 그럭저럭 멀쩡했다고 볼 수 있다.[26]

물론 바다사자 작전은 영국의 월등한 해군력으로 인해 성공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독일 군부에서도 바다사자 작전은 그리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애초에 영국 해군에 의해 영국에 상륙한 독일군이 빠르게 고립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괴링이 폭격만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겠다고 큰소리 칠 때 크릭스마리네의 최고사령관인 에리히 레더 제독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어차피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륙전인데 괴링이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4.3 공중보급에 대한 호언장담

"총통각하!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6군에 대한 보급품의 공수를 제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제 말을 믿으셔도 됩니다."
공군의 최고 지휘자로부터 스탈린그라드에 관한 소식을 거의 또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우리 동료들 사이에서, 괴링에 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이런 말이 나왔다. "뚱땡이는 입이나 닥치고 있어야 한다." - 요하임 마티스

독소전쟁의 분수령이라 할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에도 히틀러가 제6군 철수를 불허하자 거기 호응하려고 항공기 수송만으로 제6군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다가 결국 6군이 철수 시기를 놓치는 데에 일조한다. 결국 스탈린그라드 포위, 전멸의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독일군에겐 수송기 숫자는 커녕 스탈린그라드 근방을 통틀어도 사용가능한 활주로가 단 한개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활주로도 스탈린그라드로부터 800km 이상 떨어져 있는데다가, 소련군의 기습으로 함락되기도 하는 등 제대로 된 보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활주로였다. 즉, 애초에 이 주장 자체가 이미 말이 안되는 허언이었던 셈. 게다가 막상 보급이라도 하면 적 대공포가 노는것도 아니다.

여기엔 스탈린그라드 전투 전에 있었던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분전을 하던 독일육군에게 공군이 필사적으로 물자를 지원해 줘서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낸데 성공한 것도 괴링의 자만심을 부풀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데미얀스크와 스탈린그라드의 상황이 전혀 다른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상식에 가까웠기 때문에 괴링이 바보라는 것만 확실하게 만들어주었다. 당장 데미얀스크 전투 당시 고립되었던 육군 병력은 1개 사단이었고, 스탈린그라드에 비해 활주로 등 항공기 수송에 필요한 시설도 그럭저럭 갖춰진 편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병력은 1개 야전군 25만명이란 대병력이었고, 이 대병력이 필요한 물자를 기후가 나쁜 지역에서 활주로 하나만 갖고 항공 수송으로 보급하겠다는 건 21세기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사실상 불가능이다.[27] 차라리 공중보급대신 대공포와 제공권 확보해서 폭격이라도 해주는게 그나마 6군을 도와주는거였다 여담으로 애초에 공군에서 참모나 부하들이 불가능하다 다안된다고 말렸지만 가뜩이나 연합국 폭격때문에 욕쳐먹고 망신당하던 괴링이 점수좀 따보려고 자원했다고 한다.그리고 더한 개망신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 6군이 항복한 날 국가원수의 개인 수첩엔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라고 적었다.

4.4 헤르만 괴링 강하기갑사단의 창설

공수부대가 걸어서 투입되면서 전무후무한 전차로 무장한 공군 부대인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도 그러한 공명심과 경쟁심의 산물이다. 원래 이 부대는 공수부대였고, 게다가 처음부터 독일군의 공수부대는 육군 소속이었던 것을 공군이 뺏어온 것[28]인데, 이것 역시 괴링의 전공에 대한 욕심 때문. 대외적으로는 '작전상 항공부대와의 원활한 연계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걸 믿을 사람이 어디 있나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대전 초 육군의 눈부신 공적에 침을 흘리던 중, 나름대로 육상전투에서 활약을 하던 공수부대를 더 키워서 휘하에도 '기갑사단을 만들고 싶은' 괴링의 욕심으로 안그래도 걸어서 투입되던 공수부대 덕분에 가뜩이나 부족한 전차 및 각종 기갑장비를 육군에게서 가져와 창설했다. 그리고 창설만도 모자라서 지속적인 지원을 펼친 결과, 창설 당시부터 사단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데다가 전쟁 말기에 가면 2개 사단을 거느린 기갑군단으로 변모하게 된다.

육상으로 투입되는게 공중에서 투입되는 일 보다 많아진 독일 공군은 중전차와 기갑장비로 중무장한 기갑사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공군이 맞기나 한 것인지...현대에도 공군에서 장갑차와 중화기로 무장한 부대를 운용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큰 규모로 운영하지 않는데다가 거의 대부분 기지 방어 임무를 맡는 헌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확실히 도가 지나친것이 맞다. [29]

그나마 모체인 공수부대가 원체 정예인데다 훈련, 장비도 충실하여 이런 괴악한 상황 하에서도 여러 전투에서 상당한 활약을 펼쳤다. 당장 러시아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전선에서 연합군을 떡실신시켰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단위 부대중 연합군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힌 부대라는 수식이 붙어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 존재는 육군공군의 반목을 심화시키는 원인만 된다.

게다가 강하기갑사단은 전공을 잘 세우는 정예병력이라서 육군이 참아넘겼지만, 공군 자체에 인가병력보다 더 많은 잉여병력이 놀고 있는 것을 육군등 여러곳에서 지적하니까 인원을 포기하기 싫어서 무늬만 지상사단인 다수의 공군 야전사단을 창설하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항목참조.

4.5 자만과 허세

괴링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절대 안전하다며 "영국군이 베를린을 폭격할 수 있다면 날 마이어라고 불러도 좋다." [30]라고 큰소리를 뻥뻥 쳤다. 그러나 그말을 한지 채 한달도 되지않아 영국 공군이 베를린을 폭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괴링은 김괴링이 되었다. 물론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기꺼이 마이어 아줌마(혹은 바보)라고 불러주었다.(...)

여기서 하필 성을 마이어로 간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해당 표현이 'Meyer 또는 Meier라고 불러'라는 표현으로, 우리말로 바꿀때 가장 적합한 표현은 '~하면 내 성을 간다'일 듯. 마이어는 오늘날도 그렇지만 아주 평범한 성이다. 위키피디어나 영어 웹 상당수에 의하면 베를린이 아니라 '루르를 폭격할 수 있다면'이라는 조건이었다고. 아무튼 이 말 때문에 나중에 독일에선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마이어의 사냥소리'라고 비웃음을 당하기도 했다.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은 "우리 마이어 아줌마한테 인사나 하러갈까."라고 말하기도... 상황이 이따위다 보니 당시 정계에서는 "괴벨스 박사의 바지가 괴링에게 맞는 날에 전쟁이 끝날 것이다."라는 유머가 떠돌 정도였다.

여기에 증가연료탱크를 탑재한 P-47 선더볼트등의 호위전투기들이 주간 폭격작전의 호위에 등장하자 독일 공군은 더욱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전투기대 총감이던 아돌프 갈란트가 사냥을 나가던 괴링에게 기차역에서 직접 에센 상공에서 격추된 P-47 선더볼트에 대해 보고했으나 괴링의 첫 반응은 "그럴 리가 없다."였다. 갈란트가 "해당 전투기의 잔해는 에센 시에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괴링은 이어서 "프랑스 상공에서 격추당했으나 장거리를 활공해서 에센에 추락한 것이다."장거리 활공 글라이더 P-47라고 현실부정의 망상을 읊어대다가 한 성질하는 갈란트가 계속 맞서자 결국 혼자 빡쳐서 "에센에 연합군 비행기는 없었다! 알아듣겠냐!!"라고 소리지른 후 기차를 타러 나가버렸고, 괴링의 뒤통수에 대고 갈란트는 "명령이라면 알겠습니다. 각하."라고 이죽거렸다고 한다.

후에 P-51 머스탱 전투기가 베를린 상공에 출현하자 "우린 이 전쟁에서 졌다."라고 절망했다고... 그걸 이제야 아셨습니까?

4.6 그라프 체펠린 건조의 방해와 전략적 삽질들

나는 전쟁은 끝났다고 아주 냉정하게 말할 수 있다. 국가원수는 계속 모르핀에 의지하고 있었다. 회의가 길어지고 모르핀 기운이 떨어지자 그가 회의 도중에 잠이 드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게 바로 공군 총사령관의 모습이었다! - 공군 항공대장 헬무트 푀르스터, 1945년 5월

2차 대전 전부터 독일 해군(크릭스마리네)은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 함'을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었고 실제로 어느정도 건조되었다. 그러나 항공모함에는 함재기가 필수적인데, "제3제국의 모든 날개달린것(여기에는 날아다니는 새도 포함[31])은 모두 내 관할"이라고 하던 괴링은 처음에는 선뜻 함재기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종사와 함재기 관련 요원이 전부 공군 소속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는 했어도 Bf109E를 함재기 버전으로 개량한 Bf109T를 해군에게 제시하여 해군이 신형 함재기를 얻을 수 있게 배려했다.[32]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해군원수 에리히 레더 제독은 이 조건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체펠린 건조 자체가 이미 너무 늦어진데다가 크릭스마리네 수상함대의 졸전에 실망한 히틀러는 아예 해군을 해체할 기세로 화를 냈고 결국 완성되지도 못하게 된다. 나중에 그라프 체펠린은 소련 해군에게 멀쩡하게 접수되어 연습용 표적으로 쓰인 뒤 어뢰를 맞고 침몰하게 된다. 그리고 레더 제독이 물러날 때 히틀러에게 "총통에게 제발 충고하겠는데, 해군의 적인 괴링에게서 해군과 제 후임자(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33]

사실, 이 함재기 건 이전부터 전함이나 순양함 등에 탑재되는 정찰 및 연락용 수상기(Ar-196)의 조종사와 승무원, 정비 인력 등도 모두 해군 항공대가 아니라 공군 파견대가 맡는 등 괴링의 집착은 대단했다. 그나마 1942년부터 지상에서 발진하는 장거리 초계기(Fw-200) 등 일부 항공기를 해군에 내어주긴 했다.

그 외에도 자신의 권력을 앞세우며 많은 전략적 실책을 불러와서 연합군의 승리에 아주 많은 도움을 줬다. 숨겨진 영웅 무타구치 렌야의 독일 버전이냐?

대표적으로 몇가지 언급하자면 전쟁 후기 독일 공군의 패배 원인을 자신이 아닌 파일럿들에게 돌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파일럿(특히나 전투기 파일럿들의 정점 아돌프 갈란트 장군)들의 군기를 잡기 위해 각 전투비행단마다 파일럿 한명씩을 차출, 비겁죄로 E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는 10분의 1형스러운 해괴한 방법을 동원하려 했고 이는 곧 갈란트 장군을 필두로 한 전투비행단장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34] 체면만 구기고 말았다.

그러나 괴링은 이때 아돌프 갈란트에게 엿을 먹은 것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었고, 후에 Me-262의 전폭기 전용과 관련하여 갈란트 장군이 또 괴링의 의견에 반대를 표명하자 갈란트를 전투기대 총감직에서 자르고 일선 전투비행단장으로 날려버렸다. 이러자 독일 공군 전체가 들고 일어나는 꼴이 되어버렸고 서부전선 전투기부대를 이끌던 귄터 리초브 공군 항공대령이 선임으로서 총대를 매고 괴링과 담판에 나섰다. 여기서도 리초브 항공대령은 "내가 강력한 독일 공군을 건설한 사실을 부정하는 거냐?"라는 괴링의 말에 "각하는 강력한 독일 공군을 건설하셨으나 이후 낮잠만 주무셨습니다."라고 시원하게 질러버렸다. 이에 빡친 괴링 장군이 이 항명사태에 관련된 사람을 전부 반역죄로 처형하겠다고 길길이 열폭날뛰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고, 이미 중장 계급이었음에도 일선 전투비행단장으로 나간 갈란트는 독일군의 현존 슈퍼에이스들을 죄다 불러모아 독일군의 두번째 제트전투기 운용 전투비행단을 창설하였으니 이것이 전설의 독일공군 론도 벨 JV-44다. 이 비행단의 전설적인 면모는 해당항목을 참조하자.

4.7 부패와 사치생활

모든 뛰어난 연구 자료와 문화자산을 확보해서 독일로 옮겨 오는것이 우리 국가 사회주의에 주어진 당면과제다. -1941년 괴링이 공포한 법령-

예술품에 대하여 소유욕이 굉장했다고 한다. 약탈품중에 히틀러가 점찍은 그림들도 국가원수 전용열차 차떼기로 자기 저택으로 가져가는 용감함도 보여서 히틀러를 격분시키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위작작가 한 판 메이헤런에게 속아서 위조품 명화들도 한가득 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웃긴건 그 사기꾼이 받은 거액이 죄다 위조지폐.(...) 뛰는놈 위에 나는놈 있다더니 YOU JUST ACTIVATED MY TRAP CARD 훼이크다 이 병신들아!!

또 프랑스와 여러 나라 미술관에 있던 많은 문화재 밀반출에 기여했고 악명이 자자했기에 소련이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을 당시 레닌그라드에 위치한 에르미타주 박물관[35] 인사들은 빈정거리며 "괴링이 좋아라 여기로 오겠군!"이라는 말까지 했다.

알베르트 슈페어 회고록에 의하면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명예욕과 감투자리에 집착했고[36] 축재와 미술품 사냥에 열을 올렸는데 전쟁중에 축재한 방법으로 미술품중에 가치가 떨어지는 하품을 나치당 관구장들한테 비싼값에 팔아먹었고[37] 이탈리아를 통해 여성화장품이나 스타킹을 밀수해서 암시장에 팔아먹었다고 한다. 값이 떨어지면 자기수입이 주니깐 가격표까지 정하는 꼼꼼한 '경영' 능력을 선보였다고 한다[38]. 전쟁 전에도 항공부 예산에서 뚝떼서 괴링 호주머니로 들어가도 아무도 항의하지 못하고 괴링 생일인 달엔 나치당 의원들한테 묻지도 않고 세비에서 '선물비'를 공제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생일날엔 선물은 또 따로 받았다고 했다나(...)

이밖에도 회의중에 약에 취해서 쿨쿨 자빠져 자질 않나, '4개년 경제계획'의 책임자임을 내세워서 경제장관 풍크와 토트 슈페어등 군수조직과 충돌까진 그렇다쳐도 독일에 강철이 모자르자 어디서 주워 듣고 '콘크리트로 기차를 만들자[39]라고 슈페어에게 제안했다.

5 전쟁 말기의 행적과 총통자리 요구

전쟁 중후반으로 가면 독일공군이 더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유럽은 커녕 독일 본토의 제공권조차 상실해버리는 막장 전황으로 변하는데 한몫했기에, 점점 히틀러의 신뢰를 잃자 버로우하기 시작한다. 전쟁 말기쯤에는 그래도 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오래 전 철수한 해군 총사령부를 제외한 국방군 최고사령부, 육군 총사령부, 공군 총사령부의 기능을 오버잘츠부르크로 이전할 것을 명했다. 오버잘츠부르크엔 아돌프 히틀러파울 요제프 괴벨스 등의 나치당 고관들의 별장이 많던 곳으로 공군 총사령관이던 괴링도 자신의 별장으로 옮겼다. 이때 괴링은 베를린의 거대한 저택인 "카린하르"를 폭파시킨 후에 막대한 양의 미술품들을 별장으로 옮겼다.

그러다 소련군의 공격으로 베를린이 완전 포위당하기 직전에 "베를린을 탈출하려면 지금 밖에 없다!"는 시점에 이르자 괴링은 갑자기 "남쪽에 급한 공무가 있어서…"라면서 베를린을 떠나려 했고 히틀러도 괴링이 겁나서 둘러대는 거라는 것은 눈치챘겠지만 자포자기했는지 가도록 허가를 내렸다. 괴링은 수천명의 피난민과 함께 독일군이 겨우 확보하고 있는 남쪽의 작은 통로로 베를린을 떠나 남독일 지역으로 도망쳤다.

보어만이 거짓으로 4월 22일에 "총통께서는 현재 신경쇠약상태시니 대신 그대가 지휘를 맡으라"라고 괴링에게 무전을 보냈는데 이것은 보어만이 정적제거를 위해서 취한 함정이었다. 이를 받아들인 괴링은 23일 베를린 함락 직전에는 벙커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던 히틀러에게 지휘권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당시 괴링이 보낸 글 전문.

"총통 각하, 베를린의 요새에 남겠다는 각하의 결정에 따라 1941년 6월 29일 포고한 법령에 의거해 제가 즉시 국가의 전권을 맡고 국내외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활동하는데 동의하십니까? 오후 10시까지 답신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각하가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후 저는 법령에 정해진 조건이 충족된 것으로 여기고 국민과 조국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것입니다. 제 생애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제가 각하께 품었던 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리고 각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곧 도착하실 수 있기를 빕니다. 당신의 충신 헤르만 괴링."

요약하자면 총통께서 곧 서거하실테니, 예전에 총통이 명령한대로 2인자인 내가 지금부터 총통 물려받아도 되나여? 하는 전문을 보냈다가 히틀러에게 반역자로 규정되었고 극도로 화가난 히틀러는 괴링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당신의 행동은 사형으로 처벌해 마땅하지만, 당신이 스스로 직위와 직책을 포기한다면 과거의 봉사와 노력을 감안해 법적 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피하도록 하겠소, 그렇지 않다면 바로 조치를 취할 것이요."

괴링은 서둘러 동의했고, 적잖이 당황한 친위대 대원들에 의해 가택구금에 처해졌다. 하지만 4월 25일에 오버잘츠부르크가 폭격을 받자 괴링의 별장도 소실되어 감금명령은 실행될 수가 없었고 헤르만 괴링과 가족들은 오스트리아의 마우텔른도르프에 있던 괴링 소유의 성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대신해 가장 가까운 미 육군 부대에 특사들을 파견했다. 그는 온화한 태도를 취해 일시적으로는 미 육군 장교들의 환심을 샀지만, 5월 7일에 괴링은 곧 힐슈호른 성에 이후 감금되었다.

이점에 있어서 괴링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이 있는데, 분명히 전문에 "저는 총통각하가 빨리 베를린을 탈출하여 이곳을 오기를 바랍니다."고 명시했고, 만약에 탈출 못했을 경우에 저렇게 자신이 물려받아도 되냐고 히틀러에 승인을 요청한 것이다. [40] 반면에 힘러는 아예 히틀러에 알리지도 않고 전후 자신이 총통이 된다며 스웨덴을 중재로 연합국과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6 전후 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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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링의 관리 기록 카드.

다른 나치 독일의 핵심 인사와는 달리 히틀러와 함께 자살하지 않고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피고 중에서는 가장 거물이 되었다. 가택연금되었다가 교도소로 들어올때 복용이 금지된 모르핀 대신 법에 허용되는 각성제를 2만여정이나 가지고 들어왔고 아침 저녁으로 각각 20알씩 복용했다. 교도소장은 이것이 그의 정신상태를 해친다고 판단하여 미 육군 군의관들에게 이를 치료하도록 명령했고, 군의관들은 하루에 한알씩 줄이게 했다. 괴링은 상당히 고통스럽게 생각했으나, 결국 각성제 복용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가 교도소에서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식사도 조절되다 보니 몸무게도 감소하여 청년시절의 훈남모습이 되돌아았다.저놈의 몸에 생기가 돌아온다! 마약을 끊으니 정신도 맑아졌다고 한다. 공군 시절에는 그의 과시욕과 허영때문에 나치 고관들조차 그를 피했으나, 뉘른베르크에서는 젊었을 시절의 친화력과 카리스마가 회복되어 나치 전범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회복한 육체적-정신적 건강으로 사형을 면하기 위해 자신을 정력적으로 변호했다. 이렇게 가끔은 날카로운 논리를 구사하여 연합국측 검사나 판사들의 말문을 막기도 했으나, 워낙 나치가 저지른 짓은 미증유의 것이라서 스스로도 사형을 면할것이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듯 하다. 괴링의 변천사

그는 재판과정에서 히믈러나 하이드리히 같은 자들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전가하기는 했지만, 히틀러에 대한 비난이나 책임전가는 일체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괴링과 히믈러를 동급으로 취급해서 자살시에 모두 후계자에서 배제했지만, 자살을 결심한 히틀러에게 (예전에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후계자 자리를 요구한 괴링은 히틀러에게 알리지도 않고 후계자 행세를 하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스웨덴을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를 맺으려고 하다가 이것이 들통나서 히틀러가 자살하기 직전에 모든지위에서 해임당한 히믈러보다야 훨씬 양호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괴링은 히틀러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친것이다. 슈페어가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이 총통의 벙커에 독가스를 살포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 누구보다 격노하여 고함을 질렀고 재판이 종료된 다음에 슈페어에게 "여기서 나가거들랑 네놈부터 반역죄로 처형해주마!"라고 일갈했다는 얘기가 있다. 모르핀 끊은 것 아니었어? 물론 누구보다 똑똑했던 괴링 본인이 살아서 나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테고 아마 히틀러에게 총애를 받던 자가 배신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분개한 것으로 보인다.

바르샤바 봉기에서 봉기군을 잔악하게 짓밟은 SS 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말을 일삼고 동료들을 배신하는 추태를 보이자 재판 도중에 격노하여 동석해 있던 알프레트 요들과 같이 "역겨운 돼지새끼"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바흐-첼레프스키는 피고가 아니라 증인 자격으로 나와 있었는데 독소전쟁 중 파르티잔 학살에 도가 튼 그가 증인으로 나와 있었으니 괴링 입장에서는 울화통이 터질 판. 출처

그러나 그의 동생 알베르트 괴링(1895-1966)이 몰래 유태인과 소련군 포로들을 석방한 사실을 알게되자 "반역죄로 처형한다고? 풋~ 니 동생이나 간수 잘하셔~"라고 비꼼을 당했다. 여담이지만 괴링의 동생 알베르트는 나치와는 전혀 무관했고, 형과는 달리 나치를 반대했으며, 아이러니하게 형의 배경을 이용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구했다. 한가지 반전은 바로 괴링도 측근들을 통해서 이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가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41] 그리고 공군 원수인 에르하르트 밀히 장군이 유대인이라고 의심받아 강제수용소로 갈 처지가 되자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라고 말하며 밀히 장군을 보호했다. 자기의 사재를 털기도 했지만, 잘되지 않을 때에는 형에게도 도움을 청했다고도 한다. 전후에 괴링의 동생으로서 서방 연합국과 체코에 의해 두번이나 체포되지만 그가 구해주었던 사람들이 줄줄히 증언하여 두번 다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살아남은 나치의 고관 중 넘버 원이었고,[42]또 누군가는 나치스가 대전 기간 내내 벌인 잔학행위 등에 책임을 져야 했기에 결국 교수형 판결을 받는다. 이후 총살형을 탄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절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군인답게 죽고싶던 총살형이 아니라 교수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1946년 10월 15일에 형 집행 몇시간 전 몰래 입수한 청산가리 앰플을 씹어서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는 하인리히 힘러의 최후와 같다. 이때 독약의 효과 때문에 피부색깔이 초록색이 되어서 완전히 슈렉처럼 보였다고 한다. 자살한 괴링의 시체 혐짤 주의 사실 너무 편안하게 죽었다그리고 괴링의 시체는 11명의 핵심 전범들과 함께 뮌헨 근교의 화장장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소각되었고, 유골은 이자르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 어떻게 청산가리 캡슐을 소지했는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2005년 2월 7일에 당시 19세의 교도관이었던 미 육군 헌병이 "독극물을 건네준 것은 나다"라고 LA 타임즈에 밝혀서 파문을 일어났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만난 독일인 여성과 2명의 독일인 남성이 괴링의 병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약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만년필에 숨겨진 캡슐을 건네받았고 자신은 순진하게도 이것을 약으로 믿고서 괴링에게 건네주었다라는 주장이였고, 그 헌병은 처벌이 두려워 오랫동안 이 사실을 숨겼다고 증언했다. 한동안은 전범 1명당 1명씩 배정된, 전범들의 고충 상담 등을 윗선에 전달하고 감시하는 역할의 미 육군 장교들 중 괴링을 담당한 소위가 범인으로 의심받았다. 괴링이 특유의 사교력으로 그 소위와 우리식으로 표현해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친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도 이 소위가 괴링에게 자살약을 건넨 듯한 뉘앙스의 연출을 집어넣었다.

7 기타

괴링이 왔다. 늙어 처먹은 놈. 그는 장군이 되려고 한다. 왜 원수가 되려하지 않고. 괴링은 터무니없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모든 사람들을 매정하게 대한다. 이 뚱보가 빨리 떠나기를 바란다. - 괴벨스 1933년 일기 중에서

괴링은 워낙에 마약에 찌들어 있어서 제정신은 아니었고 이로인해 수많은 나치 독일의 인사들을 적으로 돌렸다. 괴벨스와는 사이가 나빠서 위에있는 말처럼 괴벨스의 일기에서는 괴링을 언급만 하면 별에 별 욕이 다 튀어나오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또한 알베르트 슈페어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등 많은 사람들과도 사이가 나빴지만 가장 사이가 나빴던 것은 바로 마르틴 보어만이였다. 마르틴 보어만과 괴링은 거의 웬수관계여서 서로서로 죽이지 못해서 안달난 사이였다. 괴링은 "보어만은 내 불구대천치 원수다, 보어만은 나를 죽이려고 목 빠지게 고대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장에서도 내가 총통이 되었다면 보어만을 죽여버렸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사이가 가장 좋은 건은 하인리히 힘러였다.[43]

나치 핵심인사긴 하지만, 다른 핵심 인물들과는 달리 유태인들에게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며, (물론 살려주는 대가로 전재산을 조공으로 탈탈 털어 바쳐야 했다.) 그의 대부인 에펜슈타인 백작이 유태계이기도 해서 유태계 지인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방군 장성들과는 달리 신사적인 면도 있었는데 휘하 지상부대에게는 잔혹행위를 엄격히 금지시키기도 했다.[44] 이는 독일 군대가 소련을 침략하면서 정책적으로 엄청난 잔혹행위를 한 것에 대하면 꽤 대조되는 모습으로 독일군에게 학살당한 소련 사람이 2,000만명이 넘는다. 나중에 일부 소련군이 독일에서 문제를 일으킨것도 이런 잔혹행위로 인한 복수심이 한몫 한다. [45] 또한, 젊은 시절부터 사교계의 총아였음에도 불구하고 말라깽이에 절름발이인 괴벨스조차 여러 여자와 바람을 핀 데 반해 단 한번의 여성 스캔들도 없이 가족에게 매우 충실한 면모도 보이는 등 개인적인 면에서는 신사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46] 그래서 가히 나치스의 아이돌로서우웩 정권의 인기도에 크게 기여했다. 뉘른베르크에서도 연합군 장교들과도 친해질 정도의 사교성을 보였다.

스스로도 "최후의 르네상스인"이라고 주장했고,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50년 혹은 60년 뒤면 독일 전역에 헤르만 괴링 동상이 있을 거임!"이라고 예언했다가 왠지 쪽팔린 건지 약간 머뭇거린 뒤, "아마 동상은 없을지 모르나, 내 초상화는 집집마다 걸려있을 거임!" #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이뤄지지 못했다. '대리석 석관에 우리의 뼈를 담아줄 꺼라'이란 정신 못차린말도 했다. 물론 대리석 석관도 없고 뼈도 못 추렸다. [47] 안습. 참고로 현재도 독일에서 나치의 상징이나 히틀러나 나치 고관들의 사진을 걸어놓으면 법적으로 처벌된다. 낙서를 하거나 하는 등 능욕짤로 쓰면 안 걸린다. 50~60년후 인터넷이 생기면서 어느 정도 걸리긴했다만(...).

실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시 괴링은 홀로코스트에 관한한 자신은 전혀 몰랐으며 책임이 없다고 강변했다. 기껏해야 유태인을 해외추방하는 정도로만 알았다는 것. [48][49] 그러나 나중에 소위 유태인에 대한 최종해결(절멸 계획)로 유명해진 "반제회의(The Wannsee Conference)"의 의장이자 게토와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그 직위에 임명한 것은 바로 괴링 자신이었다. 사실 괴링뿐만 아니라 재판정에 선 많은 많은 나치 고관들은 대부분 자기는 유대인 학살을 몰랐다고 주장했고, 이를 모두 SS나 그 총수인 히믈러에게 떠넘겼다. 왜냐면 죽은자는 말이 없거든 한가지 골때리는 것은 정작 히믈러 본인은 살아생전 나는 유대인들을 다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괴벨스 그 인간이 과격해서 그랬다고 궁시렁거리고 다녔다고 한다(...)

괴링은 1차대전 당시 전우였던 유태인을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탈출시켜주거나 유태계 귀족이나 사교계 지인들을 보호해주긴 했지만 대신에 그들은 가진 재산을 거진반 괴링에게 바치고 맨몸인채로 독일을 등져야 했다.

여담으로 연합군에 체포될 당시 호신용 권총을 갖고 있었는데, 그 권총이 전쟁 나기 전에 산 미국제 S&W 밀리터리 앤 폴리스 리볼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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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헤르만 괴링의 금도금 권총이 일리노이 주의 락 아일랜드 경매 회사에 의해 경매에 붙혀졌다. 가격은 25만달러에서 최대40만달러까지 예상된다고 한다.

8 대중 문화에서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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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 볼드윈이 주연한 1961년작 뉘른베르크의 재판의 리메이크판 영화 뉘른베르크에서 브라이언 콕스가 괴링 역을 맡아서 열연했는데 가히 카리스마 넘치는 진주인공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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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폴에선 자신의 시계만 힐끔거리고 사라지는 단역으로 나오는데 대사 한마디도 없다.(...) 배우는 2015년에 작고한 스위스 배우 마티아스 그나딩거.

네이버 웹툰 핑크레이디에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우리에게 친숙한 그 뚱땡이 괴링이 아니라 전범재판때-또는 청년시절-의 홀쭉한 모습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그림작품에 환장해서 그걸 이용해 세계정복을 노린다. 자신이 그린 지옥도에 상주하고 있는 히에로니무스 보스도 이 양반과 나치가 행한 짓에 제법 놀란다.현실은 언제나 상상을 능가한다

제3제국의 승리를 다룬 대체역사당신들의 조국에서는 1964년 시점에 이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 암살된 (걸로 추정되는) 상태. 괴링은 독일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으며 베를린에 있는 '헤르만 괴링 국제공항'은 세계 최대의 공항이라고 한다.

2차 대전을 다룬 영상물이 더빙될 때 잠깐 나오지만 늘 노민씨가 단골로 더빙한다.저팔계?

코르토 말테제에서는 리히트호펜을 죽인 호주군 크렘을 폭격으로 끔살한다.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에서는 독일령 중앙 아프리카의 통치자로 등장한다. 딱히 그가 괴링이라서 좋은 장관 능력치가 있는것도 아니며 딱히 나쁘지도 않다. 뭐, 나쁜 점이라면 그가 육군 장군 목록에 존재하는데 능력치가 0이라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각종 2차 대전 매체에서 독일측에서 자주 언급된다. 물론 허구한 날 까인다. 역시 괴링은 까야 제 맛인 거다.

법령으로 공인된 총통 후계자였지만 어째서인지 독일이 2차대전에서 승리하는 대체역사물에서도 총통이 되는일은 거의없다(...)

9 어록

총통이 결정한다면 나는 한다.
나는 독일국에서 독보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던 총통 다음 가는 사람이였다. 국민들은 총통을 사랑했으나 그는 대중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나를 따른 것이다 -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물론 국민들은 전쟁을 원치 않는다 러시아 국민들도 전쟁을 원치 않고, 영국 국민들도 전쟁을 원치 않고, 심지어 독일 국민들도 전쟁을 원치 않는다. 그건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다. 하지만 정책은 국가의 지도자가 정하는 것이고, 국민들을 따라오게 만드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민주주의 국가든, 파시스트 독재 국가든, 의회 민주주의 국가든, 공산주의 독재 국가든, 다 마찬가지다.”
“국민이 목소리를 내든 말든, 지도자는 언제든 국민을 따라오게 만들 수 있다. 그건 쉬운 일이다. 지금 국가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다고 국민들에게 얘기하고, 평화를 부르짖는 자들은 애국심이 없고 국가를 위험한 지경에 빠트리고 있는 자들이라고 매도하기만 하면 된다. 어느 나라에서든 이 전략은 통하게 되어 있다.
"쇠는 항상 국가를 강하게 만들어 왔다. 버터와 돼지기름은 사람들을 그저 비만이 되게 할 뿐이다." 자네 몸을 보면 할 말은 아닐텐데?


괴링의 쇠와 버터 드립을 가지고 존 하트필드가 소재로 삼아 제작한 포토몽타주[50] "Hurrah, die Butter ist Alle!(아따, 버터는 다 먹었당게!)이다. 사진출처 설명 잘보면 하단에는 깨알같이 괴링의 선전문구가 붙어 있는데, 이것을 자전거 부품이나 무게추 등의 쇠로 된 물건과 연장들을 철근같이 우걱우걱 씹어먹는 가족의 사진으로 풍자하고 있다. 게다가 유모차에 누운 손자가 물고 있는 도끼도 잘보면 하켄크로이츠가 작게 붙여져있다. "쇠는 국가를 강하게 한다" 라는 발언을 이용하여 "쇠를 먹어야 강해지나?"라는 뉘앙스로 뒤집은 셈.

10 이력

  • 1914.8.20 ~ 1914.10.12 : 바덴 112보병연대 대대 부관
  • 1914.10.13 ~ 1914.10.27 : 제3비행보충대대 수습과정
  • 1914.10.28 ~ 1915.6.29 : 제25야전비행대대 연수
  • 1915.6.30 ~ 1915.9.14 : 프라이부르크 비행학교에서 조종사 교육 이수
  • 1915.9.15 ~ 1916.7.8 : 제25야전비행대대 조종사
  • 1916.7.9 ~ 1916.8.4 : 제203포병비행대대 조종사
  • 1916.8.5 ~ 1916.9.5 : 제25야전비행대대 조종사
  • 1916.9.6 ~ 1916.9.27 : 메츠 전투비행대 배속
  • 1916.9.28 ~ 1916.10.19 : 제7전투비행대 조종사
  • 1916.10.20 ~ 1916.10.21 : 제5전투비행대 조종사
  • 1916.10.22 ~ 1917.2.14 : 제10비행보충대대 훈련과정
  • 1917.2.15 ~ 1917.5.16 : 제26전투비행대 조종사
  • 1917.5.17 ~ 1918.7.16 : 제27전투비행대장
  • 1918.7.17 ~ 1919.7.30 : 제1전투비행단장
  • 1919.7.31 ~ 1920.3.11 : 제112보병연대 귀대 후 퇴역 자유대기
  • 1920.3.11 : 퇴역
  • 1919 ~ 1920 : 덴마크 항공업계 시험비행사
  • 1920 ~ 1921 : 스웨덴 항공회사 항공부문 책임자
  • 1922.12.10 ~ 1945.4.23 : 돌격대 상급지도자
  • 1923.11.9 ~ 1927 : 맥주홀 폭동에서 낭심 및 왼쪽 허벅지에 중상, 오스트리아 티롤 지역으로 도주 후 이탈리아 로마,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이동
  • 1927 : 독일 귀환
  • 1928.5.15 ~ 1945.4.23 : 민족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소속 국가 국회의원
  • 1932.8.30 ~ 1945.4.23 : 국가 국회의장
  • 1933.1.30 ~ 1933.5.5 : 무임소 장관
  • 1933.2.2 ~ 1933.5.5 : 국가 항공위원
  • 1933.4.11 ~ 1945.4.23 : 프로이센 주 총리
  • 1933.4.21 ~ 1934.5.1 :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 1933.4.27 ~ 1935.2.28 : 독일 공군 조직 재무장에 관여
  • 1933.5.5 ~ 1945.4.23 : 국가 항공장관
  • 1933.7.8 ~ 1945.4.23 : 국가 산림부 장관 겸 수렵어업청장
  • 1935.1.30 ~ 1945.4.23 : 프로이센 주지사
  • 1935.3.1 ~ 1935.5.31 : 국가 공군 사령관
  • 1935.6.1 ~ 1945.4.23 : 공군 총사령관
  • 1936.10.18 ~ 1945.4.23 : 4개년 경제계획부 장관
  • 1939.8.30 ~ 1945.4.23 : 국가 국방위원장
  • 1945.4.23 : 반역 혐의로 모든 공직에서 해임 및 수배
  • 1945.5.8 ~ 1946.10.1 : 미군에 신병 인도, 수감
  • 1946.10.1 :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피고 출석, 반평화적 범죄를 위한 공모죄,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 및 전쟁 범죄, 반인륜적 범죄 전 항목에서 유죄 판결. 교수형이 언도되었으나 청산가리 복용으로 옥중 자살

11 진급 내역

  • 1914.1.20 : 소위(Leutnant)
  • 1917.8.18 : 중위(Oberleutnant)
  • 1920.1.8 : 대위(Charakter als[51] Hauptmann)
  • 1933.8.31 : 보병대장(Charakter als General der Infanterie)
  • 1935.3.1 : 항공대장(General der Flieger)
  • 1936.4.20 : 상급대장(Generaloberst)
  • 1938.2.4 : 원수(Generalfeldmarschall)
  • 1940.7.19 : 국가원수(Reichsmarschall)

12 주요 서훈 내역

  • 1914.9.15 : 1914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 1915.3.22 : 1914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 1917.10.20 : 호엔촐레른 가문 검 기사 십자 훈장
  • 1918.6.2 : 푸어 르 메리테 훈장
  • 시기 미상 : 1918년 제정 전상장 흑장
  • 1939.9 : 1939년 제정 2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 : 1939년 제정 1급 철십자 훈장 보장
  • 1939.9.30 : 기사 철십자 훈장
  • 1940.7.19 : 대 철십자 훈장[52]
  1. 이 계급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서방군의 대원수에 대응된다.
  2. 괴링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에른스트 괴링이 헤레로 학살의 주범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며 진범은 로타르 폰 트로타. 물론 헤레로족 반란 진압 책임자로 트로타를 임명한 빌헬름 2세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3. 스웨덴 출신으로 남편이 있을때 괴링을 만나서 재혼함. 결혼 후 결핵으로 병사함.
  4. 원래 이름은 에마 소넨만. 영화배우로 1935년 괴링과 결혼하고 히틀러가 싱글인 관계로 괴벨스의 아내와 '마그다 괴벨스'와 함께 제3제국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함...의외로 마그다와 사이는 친했다고 전해짐.
  5. 괴링과 후처 존네만 사이에서의 딸.
  6. 영화 위대한 독재자힌켈의 부하 헤링의 모티브가 괴링이다.
  7. 독일 헌법은 지방자치제 였으나 바이마르 말기 초법적인 대통령 비상대권으로 수도 베를린과 독일인구와 영토의 60%를 차지하는 프로이센 주 정부를 중앙정부 직할통치한다. 그리고 내각제 특성상 겸임이 많다.
  8. 히틀러 초기 내각 성립시 무임소 장관 이었다가 항공부가 신설되며 장관이 되었다.
  9. 전쟁성(국방부)이 개편되면서 감투 욕심이라면 누구한테도 안뒤지는 괴링이 국방군최고사령부 직위를 노렸지만 국방군최고사령관그리고 국가대원수으론 히틀러가 직접 취임하고 밑에 바지사장격인 최고사령부 사령관으론 카이텔을 앉힘으로 괴링을 달래기 위해서 원수자리를 퍼줬다고 한다.
  10. 히틀러 유고시엔 괴링이, 괴링 유고시엔 루돌프 헤스가 이어받도록 했다. 루돌프 헤스가 미쳐서 영국으로 평화협상(?) 하러간후 공식 3인자는 공석...히틀러가 자살할땐 유서에선 나치당마르틴 보어만, 정부(총리)는 괴벨스, 대통령(군)은 칼 되니츠에게 승계했다.
  11. 보통 웬만한 부자도 셔츠 등만 비단으로 만들고 상하의는 모직이었는데, 이 인간은 혼자 겉옷까지 비단으로 만들어 입었다.
  12. 같은 공군 장교였던 루돌프 헤스는 뮌헨대학에 진학한다. 이쪽은 병사 출신으로 현지임관하다가 육군에서 공군으로 스카웃한 경우...
  13. 전쟁때 사병으로 입대하여 육군장교로 현지 임관 전역후 나치당에 가입하여 역시 괴링처럼 히틀러에게 기사도적인 충성심을 바친다. 반자본주의 성향이며 나치당에서 민족주의보다 사회주의 우위노선을 주장한다.
  14. 법학박사이며 훗날 나치정권서 내무부 장관.
  15. 물론 이들 좌우파는 현재 한국기준으로 매우 다르고 반유대주의를 공유한다. 그리고 서로 히틀러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총애를 다투는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과 다른 노선으로온건 좌파 슈트라서 노선과 달리 과격좌파 에른스트 룀돌격대도 있다.
  16. 재미 독일인 출신으로 무역상이다. 괴벨스에 밀려서 훗날 미국으로 망명한다.
  17. 초기 나치당 없는 살림에서도 공금을 빼서 사치생활을 하는 괴링보고 괴벨스는 "돼지같은 괴링은 캐비어를 덜 쳐먹어야 할것!"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18. 사회민주당-온건 우파 정권시절 나치당과 공산당을 감시하던 프로이센 경찰조직.
  19. 국방군 반대파에선 히틀러를 정신 착란 명분으로 감금하고틀린 소리가 아니란게 함정 영국과 전쟁에 회의적이었던 괴링을 국가원수로 추대할 계획도 있었다.
  20. 히틀러 암살계획 때마다 사후 지도자로 뽑힐 정도였다.
  21.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당시 나치 주요인물의 지능 검사에서 샤흐트와 괴링은 각각 145와 138로 1, 2위를 차지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표준편차 15 기준 IQ 145는 상위 0.1%, 138은 상위 0.7%이다. 샤흐트야 뛰어난 사람이 많은 당대의 국제금융계에서도 고독한 천재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니 그렇다쳐도 괴링은 의외의 모습(...).
  22. 1941년 6월 29일 법령에 의해 공식적으로도 확정된다.
  23. 전쟁이 끝난후 약물중독 만 치료됐을뿐인데 생각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걸 보면 약물중독이 제일 문제였던듯
  24. 라인메탈 사는 지금도 살아남아 전차포 계의 본좌로 군림한다. 레오파르트 2 전차와 미군 M1 전차, 심지어는 한국군 K1A1 전차도 라인메탈 120mm포를 탑재하니.
  25. 물론 독일 공군이 저렇게 성장한게 괴링만의 잘못은아니다. 오히려 괴링은 장거리 폭격기에도 관심을 가졌었는데 He 177의 개발 지연에 몹시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거나 연설에서 4.5톤 정도의 폭장을 하고 대양을 가로지를 수 있는 폭격기를 가질 수 있으면 매우 기쁠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6. 덕분에 독일 공군의 격추 기록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더 정확한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교차검증은 필수적이지만.
  27. 참고로 활주로가 여러개 있는 대규모 공항이 몇개 존재하고, 기후가 양호하다는 가정하에 미공군이라면 보급을 할 수 있다(...). 이미 2차 세계대전 직후에도 하루에 수송기 1000대를 띄우면서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물거품으로 만든적이 있다. 하지만 공항 상태가 개판이고 기후가 안 좋다면 애초에 비행기가 내릴수도 없으니(...)
  28. 소련군도 공수군으로 독립하기 전엔 공수부대가 공군 소속이었다.
  29. 대한민국 공군 기준으로 헌병은 유일한 육상 전투부대라 기존의 군내 치안문제 이외에도 기지 외곽 경계 및 방어 임무도 맡는다. 운영하는 장갑차종은 장궤식인 K200A1인데, 원래는 장륜식 차종을 외국에서 도입하려 했다가 K200의 존재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운영하게 된 것.
  30. 혹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날 바보라고 불러도 좋소!"
  31. 이건 농담이 아니라 진짜다. 괴링이 겸직한 직책 중에는 '국가수렵장관'이란 것도 있는데, 말그대로 독일 국내의 수렵 행위 및 사냥감, 즉 새들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32. 노후화된 전투기를 준다는것은 사실과 다르다. 괴링이 제시한 Bf109T는 E형을 함재기 버전으로 개량한 물건인데 본래는 1940년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며 이 당시만 해도 E형은 최신형이었으므로 예정대로 배치만 되었으면 최신 함재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당장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주력으로 활약한 루프트바페의 전투기 기종이 E형이라는 사실만 봐도 노후화된 전투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기체나 노후화되자 G형을 바탕으로 새로 함재기를 개발하지만 그라프 체펠린이 취소되면서 취소되었다.
  33. 되니츠 제독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실화를 밝히면서, 타 군의 실패에 대한 부정확한 보고를 히틀러에게 서둘러 한다며 괴링을 비판했다.
  34. 각 전투비행단장들이 일제히 군사재판 회부 대상자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제출하는 것으로 괴링에게 엿을 먹였고, 그 리스트의 맨 앞자리에는 당연히 아돌프 갈란트의 이름이 있었다고 카더라.
  35.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 등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항상 꼽히는 곳이다.
  36. 유일하게 거절한 작위가 하인리히 힘러가 1945년에 명예 친위대 상급대장을 제안했을 때였다. 사실 6성장군인 국가원수를 재임하고있던 괴링에게 고작 4성장군인 상급대장, 그것도 자신의 눈에는 군대로 보이지도 않는 슈츠슈타펠에다 까마득한 아래로 보고있는 힘러 휘하의 계급으로 들어오라는 건 천하의 국가원수 나리께는 콧방귀도 뀔 가치가 없던 일이었던 셈.
  37. 약탈한 그림이 너무 많아서 저택 카린홀 창고가 모잘라 천장까지 메달아 두었다고 한다.
  38. '국가원수' 체면에 직접한건 아니고 1차대전 전우를 시켜서 했다. 부하들한텐 선심쓰듯 나눠주기도 했다한다.
  39. 태평양 전쟁 후기에 미군이 특수 콘크리트로 만든 바지선 여러 척을 급양함으로 운용한 적이 있긴 하다. 다만 바지선이므로 후방에서 물자를 생산하고 보급하는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하였다.
  40. 영화 "몰락"에서도 이장면이 나오는데, 가방끈이 짧고 의심이 많은 히틀러를 대신해서 마르틴 보어만이 평소에도 여러 문서를 "씹고 뜯고 맛본" 다음, 자기 마음대로 해석-가공하고 예전 행적을 양념 쳐서 정적들을 파묻어 버리는 재주를 많이 부렸다. 여기서도 히틀러는 여지 없이 넘어갔다.
  41. 실제로 알베르토 괴링은 이걸 근거로 형을 구명하려 했지만, 워낙 죄가 커서 그걸 감안하고도 사형이 내려졌다.
  42. 서열이 엇비슷했던 하인리히 힘러와 괴벨스는 이미 자살했다. 보어만은 당시에 어딨는지 파악이 안됐고 2000년대에 베를린 재개발 중 포격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으로 발견됐다.
  43. 힘러는 사교적이지 못했으나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이들은 깍듯이 대했다. 힘러는 특히 사석에서 괴링을 선배님이라고 칭하며 예의를 지켰고 괴링 또한 힘러 편을 들었다.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보르만이 힘러의 군사적재능 부재를 비난했을 때도 '당신이라면 그 정도는 했겠느냐.'고 일갈했다.
  44. 그외에도 갈란트와의 대화에서 "탈출한 적 조종사를 사살하는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갈란트가 "내 모든 권한을 이용해서 그 명령을 정지시키겠다."고 답하자 괴링이 "그것이 내가 듣고싶던 대답이었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5. 물론 소련은 이런 병사들의 일탈행위를 금지시켰고 이를 어기면 엄격히 처벌했으니 나치따위와 비교할 수 없다. 소련은 최소한 제네바 협약은 준수했다.
  46. 자살하기 직전에 동생 알베르트 괴링과 단 한번 면회 할 수 있었는데, 이때 동생에게 남긴 말이 가족을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47. 자살후의 사체는 혹시라도 나치추종자의 성지가 될까 우려되어 다른 인물들과 섞여서 독일내 모처에서 화장하고 냇가에 뿌려졌다.
  48. 자기가 사인한 구체적인 문서나 연합국측의 비디오 자료제출로 데꿀멍하기 전에 "500만이상의 인원을 죽이는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49. 수정주의 역사가 데이빗 어빙은 이 설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게다가 해외에서 독일로 못돌아온 유대계 독일인들도 해외추방으로 볼수있다.
  50. 범죄자나 살인마 얼굴을 추정해내는 몽타주가 아닌, 사진이나 그림 등을 잘라서 짜맞추고 합성하는 예술장르이다.
  51. 계급만 올라간 것으로, 봉급은 이전 계급과 동일하다. 혹은 명예직.
  52. 서훈자는 독일국방군 전군에서 괴링 1명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