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로사 작전

1941년 6월 22일. 소련 라디오 방송[1][2]


1941년 6월 25일. 독일 주간뉴스

바르바로사 작전을 간단히 설명한 동영상.

바로바로사 작전

1 개요

영어: Operation Barbarossa
독일어: Unternehmen Barbarossa[3][4]

독소전쟁의 시작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격렬하고 참혹한 전투가 벌어진 동부전선의 개막을 알린 작전. 단일 작전으로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인력을 동원한 군사 작전이었다.

2 배경

소련나치 독일은 대전 초에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나중에는 폴란드서로 같이 침공하여 사이 좋게 나눠 먹었다.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좋아 보이는 관계는 결국 언젠가 무너질 운명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이 살아 있으면 독일 제국은 무너질 것이라고 여겼고 물론 나중에 그렇게 되긴 했지만 슬라브족유라시아에서 몰아내고 그 곳을 레벤스라움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독일은 프랑스 침공이 끝나고 영국 본토 항공전을 마치면서 다음 목표를 소련으로 돌렸다.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 본토가 불타오르자 히틀러는 자신감이 넘쳐나 참모들이 "아직 영국이 항복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소련 때리면 전선을 두 개로 만드는 미친 짓."이라며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격을 감행한다.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이전에 소련의 인력과 미국의 물자가 합해지면, 어떤 시너지를 낼지 모른다며 경고했다.[5]

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소련을 공격한 이유는 그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맺어진 소련과의 평화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미래에 분명 소련과의 전쟁이 있을 거라 예상했고, 수많은 천연 자원과 인력을 가진 소련이 힘을 키운 뒤 독일과의 전쟁에 들어가면 전쟁에서 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수많은 혼란으로 인해 비교적 약해진 소련이, 국력을 회복하기 전에 공격하는 것이 훗날 있을지도 모르는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겨울전쟁에서의 붉은 군대의 부진과 스탈린대숙청으로 인해 미하일 투하체프스키가 처형되는 등 뛰어난 지휘관이 부재했던 것 또한 그의 결정을 도왔다.

경제적인 부분도 있었다.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국가로서의 민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는데 히틀러는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로 봄으로써 한 민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생활 공간과 자원이 필요함을 당연한 거지만 강조하였는데 이에 따라 게르만 민족(나치 독일)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당시 소련 영토)의 곡창지대(식량이 필요하니까), 코카서스의 유전(전차 굴리는데 기름도 많이 필요하고), 우랄산맥의 광물, 시베리아목재 등이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것들을 결국 소련에게서 뺴앗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사상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어차피 양쪽 다 알고는 있었지만 휴전 정도일 뿐인 독소 불가침 조약일 뿐인데다가 나치즘이란 사상과 견원지간공산주의를 말살하겠다는 사상적 목표도 덤이었다.

여기에 군사적 측면에서 보면 나치 독일에게 유럽에서 큰 위협이 되는 소련군(붉은 군대)를 조기에 제거하고 동부 전선 작전을 조기 종료시켜놓고 육군 예산을 조금 절감하고 그 절감한 비용으로 영국 상륙에 더 중요한 해군(섬나라기 떄문)과 공군(영국 폭격)을 증강시켜서 다시 한번 완전히 성공시키지 못한 대영 작전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즉, 경제, 사상, 군사적 여러 목적들로 소련을 침공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히틀러의 생각은 대강 이렇다.

  1.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영국도 군수 시설에 피해를 입었으니 한동안은 리타이어
  2. 피해를 복구하는 동안 영국은 소련이랑 미국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음
  3. 근데 우리가 소련에게 선전포고해서 영국에게 신경 못 쓰게 만들어 놓음
  4. 동맹국 일본이 우릴 도와서 소련을 공격여기서부터 뭔가 꼬이기 시작한다[6]
  5. 그러면 소련군 병력이 한쪽으로 쏠리는 일은 없을 것
  6. 적당한 시점에 조약 맺고 미국의 귀를 막아 버리면[7]
  7. 동맹국을 잃은 영국이 울고불고 하겠지.

물론 소련도 히틀러가 공격할지 모르고 당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전 세계에 산재한 소련 간첩망은 독일이 언젠가 거하게 소련을 공격할 거니 대비해야 한다는 정보를 계속 보냈다. 독일에는 히틀러 집권 전에 공산당원이 수백만이 있었고, 그 위성국들과 동맹국 내에도 상당수의 동조자들이 있었다. 독일 정부 내에도 신분을 위장한 간첩망이 엄연히 존재했다. 이들은 1년 전부터 계속 소련에 독일의 전쟁 준비 징후를 알려왔다. 특히 일본 제국에서 신문 기자로 위장하고 있었던 리하르트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무관으로부터 들은 침공 몇 개월 전에 6월 22일이 개전일이라는 것까지 알려왔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다만 세묜 티모셴코 국방장관이나 주코프 총참모장은 계속 스탈린에게 경계령을 내려줄 것을 상신했으나, 스탈린은 이것이 전쟁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계속해서 막았다.

3 작전 준비

  •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직전의 동부전선
독일소련비율
사단수1661901:1.1
총병력4,306,8003,289,8511.3:1
각종포42,60159,7871:1.4
전차 및 자주포4,17115,6871:3.8
전투기4,38911,5371:2.6

보다시피 병력 수는 독일군이 많고, 장비는 소련군이 많다. 독일군은 2년 간의 실전 경험[8]으로 장비 수는 압도적으로밀리지만결국 우라돌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운용법은 이미 만렙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소련군의 장비는 독일군에 비해 그다지 뒤떨어지지는 않았으나, 기습을 당한 데다가 실전 경험이 없었고, 경험 많은 장교들이 저승길을 가 버린 것 때문에 전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특히 소련 공군 같은 경우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행되는 날에 루프트바페의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소련군 비행장을 향해 기습을 하러 왔는데도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서 멀뚱멀뚱 보다가 기습당해서 전투기들이 이륙도 못해 본 채 상당수 파괴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소련 공군은 독일군의 동진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고, 1943년에 재건될 때까지 해군 항공대가 이를 땜빵해야 했다.

3.1 독일군

독일군 주요 지휘관들인 프란츠 할더, 하인츠 구데리안,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등등은 후일 회고록에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양면전쟁의 참혹한 기억 때문에 이 침공에 회의적이다는 식으로 증언한다. 그런데 이건 전후에 그들이 패전의 모든 책임을 히틀러에게 덮어 씌우기 위해 한 증언들 중 하나에 불과한 얘기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하여 실의에 빠졌던 독일군부는 히틀러의 이 결정에 열광했고, 심지어 독일군 정보부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완패시킬 수 있다"라고 보고하며 이 결정을 확신시켰다. 허나 당시 독일의 정보능력은 소련에 완전히 밀리고 있었는데 주소 대사 역시 "소련의 경비가 너무 삼엄해서 어찌할 수가 없다"할 정도였다. 독일은 자신이 가진 정보에서 50%를 뻥튀기 했는데도 "220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완전히 무너진다"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1941년에만 400개가 넘는 사단을 동원한 것이 문제(...) 하물며 작전계획도 비현실성이 넘쳤는데, 최초에는 "12주의 전역으로 소련을 패배시킨다"였던 것이 보급 문제가 불거지자 그것을 해결하니 "10주에 끝낼 수 있다"라고 줄였고, 또한 프리퍄트 습지 돌파 문제에 대해 "8주에 가능하다"고 수정하는 등 작전계획에 어떠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지엽적으로 해결하면서 근거도 없는 자신감만 넘쳤다.[9]

작전 목표를 둘러싸고 독일군 수뇌부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할더 총참모장을 비롯한 독일군 수뇌부는 정치적 수도이자 교통의 중심인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히틀러는 곡창 지대인 우크라이나석유가 풍부한 캅카스 지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군부와 히틀러는 타협하여 침공군을 북부, 중부, 남부 집단군 세갈래로 구성하기로 했다.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목표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를, 남부집단군은 키예프를 목표로 구성되었다.[10] 그리고 독일군과 함께 루마니아군, 헝가리군, 이탈리아군, 핀란드군이 참전하기로 하면서 총 병력은 390만 명에, 4600여 대의 전차, 4389여 대의 항공기, 4만 6000여 문의 각종 포가 동원되었다. 이는 단일 작전으론 사상 최대 병력이었다.

독일군의 주요 전법은 'Keil und Kessel'(카일 운트 케셀)이라고 불리는 양익 포위였다. 소련은 국토가 넓기 때문에 일단 적의 주력을 패퇴시키더라도 후방으로 도주하면 섬멸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동원 가능한 병력이 많은 소련군이 시간이 갈수록 유리해지니, 이를 방지하기 위해 보병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가해 정면의 적을 고정시킨 후, 기갑 부대가 양익을 돌파하여 적의 주력을 포위하는 전법이었다.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에는 이렇게 포위되면 대체로 섬멸전을 벌일 필요도 없이 수십만의 대규모 항복이 나왔으나, 포로에 대한 잔혹 행위가 소련군에 알려지자[11] 이후에는 포위된 소련군도 격렬한 저항을 하면서 독일군의 예비 병력을 소모시켰다.

3.1.1 편제

  • 남부집단군(남폴란드, 루마니아 주둔), 41개 사단, 총사령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 17군 (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
    • 슬로바키아 의용군 (페르디난트 카틀로스)
    • 헝가리 군단 (벨라 미클로시)
    • 1 전차군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11군 (오이겐 리터 폰 쇼베르트[13])
    • 이탈리아 군단 (조반니 메세)
    • 6군 (발터 폰 라이헤나우)
    • 루마니아 3군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 루마니아 4군 (콘스탄틴 콘스탄티네스쿠)
    • 4 항공함대 (알렉산더 뢰어)

3.2 소련군

소련군은 1938년에 벌어진 대숙청에서 사단급 이상의 단위 부대에서 반이 넘는 군 지휘관들이 처형되는 큰 혼란을 겪었다.

최근 들어 대숙청에서 날아간 인물들 중에 상당수가 정치적으로 출세한 무능한 인간들 또는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사라진 후, 전문적이고 현대적인 교육을 받았던 유능한 40대 지휘관들이 전면에 나설 기회를 제공해서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는 반론도 있다고 하지만 대숙청이 적어도 겨울전쟁과 독소전 초반까지 큰 혼란을 야기했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대규모 회전에 대한 소련군의 실전경험은 적백내전 이후로 겨울전쟁 때까지 거의 없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여 풍부한 실전 경험을 쌓았던 장성들은 있었으나, 이 전쟁은 기본적으로 내전 성격을 띠었던 데다가 산악 지형에서 치뤄진 보병간의 회전이었던만큼 여기서 쌓은 군사 지식, 병법이 대평원이었던 소련에 적용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작정하고 대규모로 전면전을 벌이는 데는 교리, 즉 종심 작전 이론이라는 선진적인 교리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등의 선구적인 이론가들에 의해 확립되어 있었으나 이 이론을 개발한 이는 물론이고 스페인에서 그나마 실전 경험을 쌓았던 인물들도 대숙청으로 상당수가 저승으로 갔다. 특히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워 본 공군 참전자들이 숙청된 결과 소련 공군은 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된다.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같이 기동전의 개념을 제안한 유능한 장성들까지 처형되었던 데다가 이론까지 폐기되어서 나머지 사람들은 숙청될까 봐 투하체프스키의 '투'자도 못 꺼냈다. 투하체프스키가 제시한 기동전은 독소전쟁 도중 소련에서 다시 부활하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대숙청이 도움이 되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래도 납득이 안 된다면 독소전쟁의 영웅인 게오르기 주코프조차도 대숙청 와중에 저승 갈 뻔했다. 다행히 전공을 세워서 칼날을 피했지만.

지시 없이 훈련했다고 장교나 장성이 저승 가는 이런 미친 피바람 속에서 안 그래도 훈련 부족인 소련군은 더욱 더 경직되어 갔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군사 교리 또한 답보 상태였고 그 대가는 2900만 명[14] 이상의 사망자라는 피의 대가로 치뤄졌다. 단 이 수치는 민간인 사망자를 포함한 수치로 나치의 인종 청소로 인해서 엄청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군인 총 사망자는 1,000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 수치는 360만 명 정도의 포로 사망자를 포함한 수치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전사자는 400만 명이 넘어가며 전차전투기의 손실은 각각 20,500대와 21,200대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첨언하자면 이때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가 독소전 전 기간 동안 소련이 날려먹은 항공기의 40% 정도 된다고 한다. 현재 한국군의 10배 병력을 6개월 만에 날려먹고도 소련이 결국 승리를 했으니 대륙의 기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후로도 거의 40년 이상 미국과 대립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소련이 독소전쟁에서 이겨내는데 활약을 한 소위 40대 지휘관들도 전쟁 초기엔 감각이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주코프마저도 독소전쟁 초기엔 수십 만 명의 병력을 날려먹는 등. 소련군은 계속 얻어터지면서 독일군 교리를 학습하여 이를 극복해 나간 것이다. 훗날 소련군의 명장에 드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이반 코네프, 안드레이 예료멘코 등도 개전 초기에는 실전 경험 부족 때문에 계속 참패했고, 후퇴에 급급한 모습을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래 연대장이나 여단장급 인물들이 군단장이나 사단장을 맡고 있었으니... 다만 이 당시의 독일군은 2년간 계속 폴란드, 노르웨이, 프랑스, 영국, 유고, 그리스군 등을 상대로 실전을 치뤄 봐서 만렙에 올랐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군이 졸전을 벌였다기보다는 독일군이 워낙 잘 싸웠다고 보는 게 더 맞는것 같다. 다시 말해 당시 독일군은 규모, 전술에 있어서 최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련의 가장 큰 피해의 원인은 독일군이 잘 싸운 점도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역시나 바르바로사 작전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갑작스럽게 파기하고 기습을 감행한 공격이었다는 점이다. 진주만 공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무리 전력이 강하다 할지라도 갑작스럽게 기습 공격을 당하면 엄청난 피해를 일방적으로 얻어 맞을 수밖에 없다. 특히나 독일과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독일은 독소전 초기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큰 이익을 얻었던 것처럼 어마어마한 전과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진주만에서는 산업 시설 등은 건드리지 못했는데 이건 산업 시설까지 피해를 입혔다.

군부에 대한 통제와 전쟁 지휘만 본다면 독소전쟁에서 소련은 스탈린이 있어서 이긴 게 아니라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이긴 것이다.[15]

하지만 소련에 스탈린 외의 대안은 없었고, 스탈린은 서구 국가들과 협상을 잘 이끌어 냈으며, 소련이 분열되지 않고 통합된 지휘와 통제를 받도록 했다. 스탈린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거의 있을 필요가 없었던 인물로 표현되는데, 독소전쟁에 대한 스탈린의 공로는 인정해야 할 부분이다. 전선에서의 싸움뿐만 아니라, 후방에서의 소련 인민의 통제와 무기 생산 계획 및 병력 동원도 중요하다. 소련이 결국에 무엇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이길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면 스탈린의 공로는 막대하다. 당시 스탈린은 소련의 거의 모든 세부 사항 - 심지어 저격소총의 디자인 - 에까지 관여했다. 그런데 중요한 후방에서의 문제를 스탈린이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더 부자연스럽다. 무너져 가는 소련을 회복시키고 일선 지휘관들이 전투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스탈린이다. 아무리 소련 인민들의 자발적인 희생이 있었다고 한들 그것이 중앙의 효율적 통제 아래 수행되지 않았다면 그런 효과를 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1942년부터 스탈린의 스타프카는 소련 전체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행사했다. 물론 전선에 관여하면서 스탈린이 벌인 실책은 너무나도 커다란 것이지만, 그래도 스탈린이 있었음에도 이긴 것이라고 말한 것은 비약이다.

따라서 이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스탈린은 초기의 실책이 있었지만, 그의 잘못을 깨닫고 후방에서의 지원에 힘썼고, 소련의 지휘관들은 그 지원을 받으며 독일군을 격퇴했다.그러나 히틀러는 시작부터 끝까지 말아먹었다물론 스탈린이 모든 것을 총괄했고, 스탈린이 2차 대전을 혼자서 이끌었다!....하는 대전 후의 소련 측의 해석은 심각할 정도로 과장이다. 스탈린이 피에 피를 부르는 정치를 일상화했고, 굴라그소수민족 탄압, 대전 이후 귀환한 소련군 포로와 민간인들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이해가 가지 않는 탄압 등 악독한 짓을 저지른 독재자인 것은 맞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 줘야 한다. 흐루쇼프는 그런 개인 우상과 신격화에 반대하고, 스탈린 체제를 붕괴시키기 위한 한방으로 스탈린을 비판했다. 당연히 이건 사학적 연구의 결과물이 아니고, 정치적 공격이다.

초반의 대패 때문에 소련군이 전혀 준비를 안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소련은 1920년대부터 강력한 국방 정책을 밀어붙였다. 특히 1930년대 성공한 공업화 때문에, 전투기 수, 잠수함 수, 전차 수는 1940년 당시 세계 1위였다. 문제는 이렇게 많은 현대적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 운용 교리 또한 발전시키고 있었으나, 군부에 대한 대숙청의 결과 이런 교리를 발달시킨 장성들도 쓸려나가면서 교리들이 부정되었으며 그 이후로도 이론가들이 자주 숙청되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 운용 사상이 바뀌는 바람에 부대들은 해체와 재편을 반복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침략적인 의도를 내비치는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군은 병력을 2배로 늘렸으나, 갑자기 몸집이 커지자 대숙청에서 기인한 부작용과 함께 장교 부족이라는 큰 문제가 벌어졌다. 상급 장교도 부족했지만, 하급 장교는 절망적이었으며, 이 때문에 소련에서는 대학생들에게 속성으로 몇 주 교육을 시킨 다음에 바로 소위 계급을 달아주는 식으로 장교를 양성하였다.

1938년에 끝난 스페인 내전에서의 전훈[16]으로 전차 부대들을 모두 여단급 이하로 축소재편했다가, 1940년 독일군의 전격전의 대성공을 보고 다시 군단급으로 재편하기로 했다. 이 와중에서 독일군의 침략을 받았으니 결과는 뻔한 일. 공군에도 숙청의 올가미가 덮쳐서 유능한 지휘관 상당수가 "항공사고가 너무 잦다.[17] 이건 사보타지 아닌가"는 NKVD의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결과적으로 공군도 몇 년 간 발전이 크게 지체되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소련군이 핀란드군을 상대로 졸전을 벌이다 겨우 승리한 1939-40년의 겨울전쟁 때의 교훈은 헛되지 않아서, 무능한 보로실로프가 물러나는 것 외에도 소련군의 이후 월동 장비나 동계 작전 능력이 대폭 향상되었다. 후에 겨울에 발생한 모스크바 전투 때 겨울전쟁에서 붉은군대 병사의 피값으로 체득한 전훈들은 유용하게 사용되어 소련군은 겨울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던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때 승진한 키릴 메레츠코프알렉산드르 노비코프는 후에 소련군의 중추가 되었고, 보로실로프를 대신해 국방장관이 된 세묜 티모셴코는 군 개혁을 조용히 이끌었다.

소련군의 문제는 1920년대부터 구축한 '스탈린 방어선'(소련-폴란드 국경)을 포기하고 1939년에 독소 불가침조약에 의해 새롭게 생긴 소련-독일 국경을 방어선에 전진 배치되어 방어선을 새로 구축하는 도중이었다는 것이다. 1년 만에 구축한 방어선이 10여 년 간 준비한 방어선보다 제대로 구축될 리가 없었으므로 소련군 부대는 거의 맨몸으로 독일군의 전차군을 막아내야만 했다. 거기다가 스탈린은 히틀러가 영국을 꺾기 전에는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18] 히틀러에게 침략의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해 독일군의 월경 정찰 활동마저도 무대응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독일군에 속속들이 노출된 방어진지 때문에 나중에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3.2.1 편제

  • 북부전선군(핀란드 접경 주둔), 총사령관 마르키안 포포프 중장
    • 14군(무르만스크에 사령부)
      • 제 14 소총병 사단[20]
      • 제 42 소총병 군단
        • 제 104 소총병 사단
        • 제 122 소총병 사단
      • 제 52 소총병 사단
      • 제 1 기갑 사단
      • 104 직속 포병연대
      • 제 23 무르만스크 요새화 군단
      • 제 1 혼합 공군 사단
      • 기타 소부대
    • 7군(수오야르비에 사령부)
      • 제 54 소총병 사단
      • 제 71 소총병 사단
      • 제 168 소총병 사단
      • 제 237 소총병 사단
      • 541 직속 곡사포병 연대
      • 제 26 소르타발라 요새화 군단
      • 제 55 혼합 공군 사단(페트로자봇스크 주둔)
        • 제 153 전투기 연대
        • 제 72 폭격기 연대
      • 기타 소부대
    • 23군(쿠사에 사령부)
      • 제 19 소총병 군단
        • 제 142 소총병 사단
        • 제 115 소총병 사단
      • 제 50 소총병 군단
        • 제 43 소총병 사단
        • 제 123 소총병 사단
      • 제 10 기갑 군단
        • 제 21 전차 사단
        • 제 24 전차 사단
        • 제 198 차량화소총병 사단
      • 101, 108, 519 직속 곡사포병 여단
      • 573 직속포병 여단
      • 제 27 븨보르크 요새화 군단
      • 제 28 켁스골름 요새화 군단
      • 제 5 혼합 공군사단
      • 기타 소부대
    • 그리고 여러 독립 소부대들
  • 북서전선군(발트해 연안 주둔) 34개 사단, 총사령관 표도르 쿠즈네초프 중장
    • 8군
      • 제 10 소총병 군단
        • 제 10 소총병 사단
        • 제 48 소총병 사단
      • 제 90 소총병 사단
      • 제 11 소총병 군단
        • 제 11 소총병 사단
        • 제 125 소총병 사단
      • 제 12 기갑 군단
        • 제 23 전차 사단
        • 제 28 전차 사단
        • 제 202 기계화 사단
      • 제 47 군단 포병 연대
      • 제 51 군단 포병 연대
      • 제 74 군단 포병 연대
      • 제 9 대전차포 여단
    • 11군
      • 제 16 소총병 군단
        • 제 5 소총병 사단
        • 제 33 소총병 사단
        • 제 188 소총병 사단
      • 제 29 소총병 군단
        • 제 179 소총병 사단
        • 제 184 소총병 사단
      • 제 3 기계화 군단
        • 제 2 전차 사단
        • 제 5 전차 사단
        • 제 84 차량화 사단
        • 제 15 오토바이 여단
        • 포병 여단
        • 공병 대대
    • 27군
      • 제 22 소총병 군단
      • 제 24 소총병 군단
      • 제 16 소총병 사단
      • 제 67 소총병 사단
      • 제 3 독립 소총병 여단
      • 2개 포병 연대
      • 2개 대전차 연대
    • 해군 북방함대, 발트함대 포함
  • 서부전선군(벨라루스 주둔) 45개 사단, 총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대장[21]
    • 3군
      • 제 4 소총병 군단
        • 제 27 소총병 사단
        • 제 56 소총병 사단
        • 제 85 소총병 사단
      • 제 21 소총병 군단
        • 제 24 소총병 사단
      • 제 11 기계화 군단
        • 제 21 전차 사단
        • 제 33 전차 사단
        • 제 204 기계화 사단
    • 4군
      • 제 28 소총병 군단
        • 제 6 소총병 사단
        • 제 42 소총병 사단
      • 제 14 기계화 군단
      • 제 49 소총병 사단
      • 제 75 소총병 사단
      • 제 62 요새화 군단
    • 10군
      • 제 1 소총병 군단
        • 제 2 소총병 사단
        • 제 8 소총병 사단
      • 제 5 소총병 군단
        • 제 13 소총병 사단
        • 제 86 소총병 사단
        • 제 113 소총병 사단
      • 제 6 기병 군단
        • 제 6 기병 사단
        • 제 36 기병 사단
      • 제 6 기계화 군단
        • 제 4 전차 사단
        • 제 7 전차 사단
        • 제 29 기계화 사단
      • 제 13 기계화 사단
  • 남서전선군(우크라이나 주둔) 45개 사단, 총사령관 미하일 키르포노스 중장[22]
    • 5군
      • 제 15 소총병 군단
        • 제 45 소총병 사단
        • 제 62 소총병 사단
      • 제 27 소총병 군단
        • 제 87 소총병 사단
        • 제 125 소총병 사단
      • 제 22 기계화 군단
        • 제 19 전차 사단
        • 제 41 전차 사단
        • 제 215 기계화 사단
      • 2개 요새화 군단
      • 7개 포병 연대
      • 2개 NKVD 연대
      • 1개 공병 연대
    • 6군
    • 12군
    • 26군
    • 그외 여러 부대들
  • 남부전선군(흑해 연안 주둔) 26개사단, 총사령관 미하일 툴레예프 중장
    • 9군
    • 18군
    • 해군 흑해함대 포함
  • 예비전선군(중앙방면) 스탈린의 직접명령을 받는 부대
    • 16군
    • 19군
    • 20군
    • 21군
    • 22군
    • 24군

전쟁이 시작되자 7월에 이 조직은 개편되어 독일군과 마찬가지로 3개 집단군으로 재편된다. 이른바 "원수 VS 원수의 빅매치"원수3명vs원쑤2명+원수1명

4 전개

1941년 6월 22일 일요일 새벽 4시 독일군은 동맹군까지 합쳐 3개 집단군, 총 30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소련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만일을 대비해 국경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지만, 그런 조치는 오히려 개전 초반에 소련군이 독일군에 기습에 큰 타격을 입고 반격할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린다. 기술의 발전으로 전장 환경이 바뀌었으나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전부 쓸려나간 게 특히 한 몫을 했다. 1차 세계 대전이면 국경 지역에 배치된 대규모 병력이 유의미한 결과를 내놓았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대는 기갑군을 최초로 창설한 독일이었다. 소련군의 전차는 우수한 성능과 기동성에도 불구하고 보병 지원 이상의 역할을 배정받지 못했다. 단일한 탱크 군단은 당연히 없었고, 탱크들은 드넓은 러시아 국경에 흩어져 있었다. 이래서야 기동성과 충격 효과가 발휘될리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경직된 지휘 체계로 인해 각 부대들의 자체적인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황의 불리함을 알고 상급 부대로 집결한다던지 하는 임기응변적 대책은 물론 없었고, 소련군은 자신의 자리를 사수하다가 포위되어 죽어나갔다. 독일 기갑군이 뚫은 구멍으로 대량의 독일군이 유입되면서 전방의 소련군은 그대로 갇히고 만다. 또한 독일군의 주공인 중부집단군 쪽에 소련군 사단은 얼마 없었고, 우크라이나에만 100개 사단이 투입되어, 거대한 소련군이 양분되는 일도 발생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스탈린은 여름에 히틀러의 공격이 없을거라고 예상한 나머지 별다른 경계태세도 취하지 않았다. 소련의 전투기들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육군이 공중 엄호, 무기, 첩보, 통신체계도 없이 단 몇 시간 만에 괴멸되는 일도 잦았다.

6월 27일에 스탈린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유린되었으며, 국경에 있던 기존 병력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독일군은 민스크에 도착했다. 이때 스탈린은 통치를 그만 두고 자기의 다챠(러시아식 별장)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이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추측밖에 알 길이 없다. 확실한 것은 스탈린은 천재였고, 권력에 대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실패를 덮고,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책략이었을 수 있다.[23] 소련 정부의 수뇌부는 스탈린을 찾아가 그의 복귀를 호소하였고, 그를 공산당의 최고 직위와 정부 최고 직위에 오를 것을 호소했다.[24] 스탈린은 몇 번 거절하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7월 3일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소련 인민들은 스탈린의 재등장에 안심했다.

독일군은 3개 집단군으로 나뉘어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중부집단군은 모스크바, 남부집단군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북부집단군은 시가전을 피하기 위해 레닌그라드를 포위했고 남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도 계속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 소련의 반격이 거세지자 독일은 중부집단군이 남부집단군을 지원하게 했고 이것 때문에 중부집단군과 남부집단군의 진격이 늦춰지는 동안 가 내리면서 러시아 전역이 악명높은 진흙탕으로 변해버렸다. 독일은 보급 차량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단기 결전을 계획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진군한 상태였고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징집을 시작해 독일군의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해 반격을 시작하면서[25] 안 그래도 느린 진격은 더더욱 더뎌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이에 일본에게 소련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일본은 가만히 있었다, 독일군은 마지막으로 태풍 작전으로 모스크바 점령을 시도했지만 때마침 소련 측에서 일본이 참전하지 않을 거란 첩보를 받았고 바로 일본쪽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병력을 모스크바로 재배치, 이후 독일은 소련군의 반격을 받았고 겨울이 되어 러시아의 강추위가 몰아치자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2자리수의 거리를 남겨두고 공격을 포기했다.

한편 소련은 독일이 침공하면서 서쪽에 있던 공업 지대를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독일과의 전쟁에서 필요한 무기들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공장이 필수적이였기 때문에 독일군이 빠른 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음에도 수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한 끝에 공장의 설비들을 동부로 이동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공장 지대는 이후 대전 내내 소련군이 싸우는 무기를 공급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과정은 거의 기적이나 다름없이 흘러간다. 당연히 중앙은 전선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고, 공장의 소개와 대피가 중앙의 조율 아래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어떤 기차는 동쪽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야 했으며, 소개하여 피난을 갔다가, 피난처로 독일군이 진격하는 바람에 또다시 피난 가야 했던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래도 다행히 서쪽에 있던 대부분의 공장들은 우랄 산맥 부근으로 안전하게 이송되었고, 1500개의 주요 공장 중에 1942년 말까지 단 55개 만이 가동에 들어가지 못했다. 1941년 후반기까지 2600개의 기업체가 옮겨졌으며, 2,500만 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공장을 따라 이동하였다.

한편 독일군은 히틀러가 나폴레옹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이유로 모스크바에 병력을 올인하지 않고 키예프, 레닌그라드에 병력을 나눠 투입하였는데 당시 모스크바는 시베리아 철도가 지나가는 중심 도시라 점령당하면 유라시아 일대는 철도망이 마비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간과하였으며, 점령지 주민들은 소련의 탄압을 받던 소수민족들이라 처음에는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이하였는데[26] 전투 부대는 점령지 주민들과 사이가 괜찮은 부대도 존재했으나 역시 나치의 인종 차별 사상 때문에 점령지 주민들은 소련 시절처럼 차별 대우를 받기는 마찬가지였고 그나마도 전투 부대가 떠나고 아인자츠그루펜 등 인종 말살 부대가 진주하면서 지옥이 시작되었다.

5 결과

결국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원래 목표로 했던 유라시아 지역 점령에 실패했다. 엄청난 전과를 올렸지만, 작전 자체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이다.

러시아의 영토는 독일의 예상 이상으로 광활했고, 자연 환경도 혹독했다. 독일은 최초의 공세 때 소련군 주력이 소련 서부의 공업지대 방어에 매달려 후퇴하지 못하니 그것을 물리적으로 섬멸하면 소련은 무너져 내리리라 예상(혹은 희망)했지만 그 예상은 전제조건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소련군은 쉽게 무너져 내리지 않고 처절하게 저항했다. 독일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수많은 소련군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처절하게 저항했으며 이는 지속적으로 독일군에 인명피해를 강요하여 41년 말 즈음에는 68만에 달하는 전사자를 냈으며 2만 2000명에 달하는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27] 하지만 이 시점에서도 소련은 계속해서 전력을 증강하고 있었기에 독일군은 최후의 한타를 먹여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태풍 작전을 실시해 모스크바로 진격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하고 도리어 소련의 대대적인 반격에 수십km를 후퇴하며 히틀러의 현지사수 명령과 독일 장병들의 필사적인 분투, 소련군의 미숙한 군사운용에 의해 12월 17일에 소련의 공세가 사그라들면서 겨우 전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독일군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독일군은 인종주의를 철석같이 믿어 점령지 주민들에게 가혹한 정책을 펼쳤고 동부전선에서 계속 게릴라에 시달리게 된다. 독소전쟁은 독일의 희망과는 달리 장기전, 총력전으로 이어지며 천천히 독일을 파멸시켰다.[28] 일련의 작전에서 독일은 가용한 보급품 및 장비 상당량을 소모해버렸고 이로 인해 전쟁의 결말은 이후로 미뤄졌지만 독일군이 얼마나 남은 것들을 긁어모아 공세를 펼쳐도 바르바로사 작전에 비해 축소된 규모일 것은 확실했다. 이러한 상황반전 속에서 독일군의 일부는 이미 독일이 패전할 것을 예감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적지 않은 수는 이 전쟁이 뼈를 깎는 장기전으로 변할 것임을 예상했다.

이 작전에는 일본도 참전해야 했는데, 일본은 질적으로는 소련군에게 밀리지만, 당장 보급품을 독일쪽 전선으로 보내기 바쁜 소련군이었고, 독일 입장에서는 일본군이 딱히 소련군에게 이기든 지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일본이 대소련전에 참전하지 않겠다는 첩보가 걸리자마자 소련군이 죄다 모스크바에 재배치된것만 봐도 당시 일본의 존재는 소련군이 전부 몰려오는 걸 막기위한 보험이였다(...) 물론 도움이 안되는 일본군은 공격하라는 소련은 안 공격하고 엄한 잠자는 사자건드렸고, 이는 독일이 망하는 데에 지대한 원인이 된다(...).요약:스탈린은 히틀러가 그렇게 막나갈 줄 몰랐고 히틀러는 도조 히데키가 그렇게 막나갈 줄 몰랐다.

작전 계획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받은 피해는 굉장했다. 4백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로 모스크바 서쪽에 배치되어있던 사단의 거의 전부가 증발했으며, 소련의 절반을 먹여살리던 우크라이나와 막대한 가치를 지닌 돈바스 공업 지대의 상실은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에 심각한 차질을 빚었다. 이러한 거대한 패배는 비록 전략적 목표가 아니었지만 무조건 항복을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가능한 모든 예비 병력을 끌어모으며 저항하여 도리어 독일군에 반격을 가했고, 이 와중에 진주만 공습으로 인해 미국이 참전하였고 히틀러는 12월 7일에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알아서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12월 4일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반격에 정신이 팔린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독일 육군은 이 결정에 대해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 결정이 소련을 극한의 상황에서 소생시키고, 독일의 최종 파멸을 부를 최악의 선택이었다. 이후로 2차 세계대전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대전이 된다.

  1. 자막을 누르면 한국어가 나온다.
  2. 새벽에 선전포고 없이 기습 침공한 점이 한국 전쟁과 비슷하다.
  3. 바르바로사(Barbarossa)는 이탈리아어붉은 수염(red beard)라는 뜻으로, 신성 로마 제국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별명이다. 십자군 전쟁에 원정을 가던 도중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바르바로사 작전이라 이름 붙인 데는 세 가지 설명이 있는데, 프리드리히 1세가 동방으로 원정을 갔듯이 소련을 침공하는 것을 함축하는 것, 붉은 수염이라는 뜻이 공산주의의 주도국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을 연상하게 한다는 데서 착안했다는 것,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작전 암호명 중 색상이 사용된 사례 - "녹색 작전"(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작전), "백색 작전"(폴란드 침공), "청색 작전"(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일으킨 작전), "황색 상황, 적색 상황"(프랑스 침공) - 의 연장선상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이 존재한다.
  5. 이는 미국이 소련에 증여한 비전투 물자가 썩어나기 시작하자 비전투 물자의 직접 생산을 축소시키고 군수 공장에 인력을 집중시켜 만들어낸 모신나강, PPSh-41, T-34를 쓰는 끝이 없이 밀려오는 군대로 실현되었다.
  6. 독일이 알고 있었는지 모르나 정작 일본은 할힌골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가 이끌었던 소련군에게 박살난 이후 1941년 4월에 소-일 불가침 조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건 1941년 6월(...) 일본 군부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에도 이 불가침 조약을 깨지 않았다. 일본은 소련이 아닌 미국을 공격했다. 우리들이 먼저 불가침 깨고 공격했으니 저놈들도 같이 불가침 깨고 공격하겠지(...) 어, 안 해?
  7.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면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주변인들이 상기시켜 줬지만 히틀러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이 미국을 침공하자 좋다고 같이 선전포고(...) 이러면 일본이 소련을 쳐 주겠지? 그럼에도 끝까지 불가침을 유지
  8.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베저위붕 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유고슬라비아 침공 등 숱한 실전을 겪은 독일군은 당시 엄청난 강군이었다.
  9. 이 문제는 7월 중순 프란츠 할더의 "14일에 이길 수 있다는 예상이 현실이 되어간다."라고 쓴 것을 겨우 한 달 후에 "우린 현재 350개 사단을 확인했다. 그들의 무장은 빈약하나 그들은 존재한다. 우리가 4개 사단을 격파하면 소련군은 그 자리에 4개 사단을 투입한다."라는 일기에서 화룡점정을 이룬다.
  10. 작전의 목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을 잇는 선, 이른바 "A-A선(Arkhangelsk-Astrakhan line)"이었다.
  11. 히틀러는 정치장교는 포로로 인정하지 말고 체포하는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것이 알려지자 병사들의 독전 임무를 맡은 소련군 정치장교를 자극하여 오히려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계기가 되었다.
  12. 휘하에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제56차량화보병군단장로 참전했다.
  13. 크림 반도 공략 당시 정찰 도중 지뢰를 밟아 전사. 후임으로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11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제11군은 이후 게오르크 폰 퀴힐러가 공략 중이던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증원군으로 가게 되었다.
  14. 4,000만명 이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5. 앞의 2가지 요소를 제외한다면 스탈린의 공로가 상당하다. 특히 공업화 정책. 근데 앞의 2개를 너무 거하게 말아먹어서...
  16. 스페인의 산악 지형에서 전차는 무용지물이었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장교들의 보고+기갑덕후 투하체프스키의 숙청으로 이렇게 멍청한 병크를 저질렀다.
  17. 이건 소련의 항공 산업의 신뢰도가 낮아서 추락 사고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18. 근데 사실 이렇게 판단하는 게 상식적으로 맞는 판단이다. 돌아이가 아니고서야 전선을 마구 넓히는 짓을 하겠는가? 당장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양면전쟁으로 갔다가 망했다는 걸 생각해보자. 문제는 히틀러는 진짜 돌아이였다는거.. 스탈린이 아니라도 영국과 프랑스의 수뇌부도 히틀러가 돌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했다가 빅엿을 먹기도 했으니(...)
  19. 이하 모든 소련군 계급은 한국식으로 환산함.
  20. 소련군에서 소총병은 보병을 뜻한다.
  21. 7월에 스몰렌스크에서 구데리안에 대패하고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처형.
  22. 키에프 전투 때 포위된 부대들을 지휘하다 전사.
  23. 이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모든 책임을 질 수 있는 절대권력자가 등장하여 모든 것을 일원화된 체계 하에 통제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스탈린의 부재가 더 심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당시 소련에는 스탈린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으며, 비등비등한 약자끼리 하는 주도권 싸움이 소련을 붕괴시킬 가능성도 있었다.
  24. 당시 스탈린은 당 총간사 직위 외에는 공식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25. 전쟁 초에 독일은 소련군이 180여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추정했고, 작전 초에 이 병력들이 모두 궤멸당하면서 독일군은 소련군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독일군은 자신들을 기다리는 소련군 360여개 사단과 마주쳐야 했다.
  26. 동유럽 나치들 어찌고 저찌고 하는 뉴스가 나오면 100% 동유럽 전선에 나치 독일편을 들어 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꼭 나온다. 평가가 극심하게 갈리는데 볼세비키 군대에 대항한 독립 투사들이냐 아니면, 인종청소(유대인) 독일 파시스트들의 앞잡이였나로 갈린다.
  27. 게다가 이는 지원부대를 제외한 전투부대에서 난 피해인지라 더욱 뼈아픈 손실이었다. 더욱이 40년 시점에서 120개 사단 수준이었던 독일군이 소련침공을 위해 180개 사단으로 팽창하면서 이전에도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심각한 손실이었다.
  28. 물론 모든 독일군이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실제로 주로 이런 짓을 저지른 놈들은 전투 부대가 아닌 인종말살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이나 디클레방어 같은 또라이 사단들이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고 더욱 치열해지면서 결국 전투 부대도 그 또라이 사단들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광기가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