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시대의 인물로 무라카미 수군의 두령인 실존했던 해적들 중의 한명.
일본의 전국시대에 활동했으며 수군성인 노시마의 무라카미씨의 5대 당주로 가독 상속권을 쥐고 있던 가문에게서 가독을 빼앗아 상속하였으며 노시마에 속하는 구루시마 해협의 무시, 나가토의 두 성에서 해적질을 하고 또한 동시에 세토 내해를 항행하는 선박에게 일종의 통행세인 세키제니를 징수하였으며 그리고 바다의 용병으로서 활약하였다.
이츠쿠시마 섬의 전투에서 모리 모토나리의 편을 들어 스에 하루카타와 싸웠으며 이후에는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지배하에서 치쿠젠, 부젠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모리 가문을 도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리 가문을 원정하여 3번에 걸쳐 항복을 권했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또한 모리 가문이 히데요시에게 굴복한 이후에도 사이카 공략 요청, 시코쿠 정벌에도 협력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히데요시가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명령에게 조치를 취하게 하자 1585년 6월에 가문 대대로 지내오던 수군성인 노시마에서 퇴거하고 아키 타케하라로 옮겼으며, 1588년에는 히데요시가 해적 금지령을 발표하여 금지령을 어겼기 때문에 죽을 뻔 했으나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토다 카츠타카의 주선으로 처분을 면하였지만 아키 타케하라에서 퇴거하여 세토 내해에서의 거주하는 것을 금지당하고 아카마가세키로 옮기게 된다.
그 후에는 히데요시의 명으로 전봉을 받은 타카카게를 따라 치쿠젠 나지마, 부젠 미노시마 등으로 이주하였으며 1591년에는 히데요시에 의해 나가토국인 오오츠군으로 이주한다.
그 후 1598년에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아키 타케하라로 돌아왔고 그 곳은 모리 테루모토의 영지였으며 아들인 모토요시와 타케하라의 친카이잔 성에서 이요 노시마로 복귀하여 세토 배해 중앙부의 지배권을 회복하여 예전의 영광을 되찾고자 했으나 모리 테루모토가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것이 되어버렸다.
1600년 여름에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앞두고 무라카미 수군의 전력을 총동원하여 오오사카 만으로 출동하여 오오사카만에서 이세만에 걸친 해역을 봉쇄하여 동군을 경제하고 예전의 라이벌인 쿠키의 수군과 협력하여 서군을 승리로 이끌려고 하였지만 테루모토는 이요 마사키 성의 공략을 명했다.
그래서 수군을 둘로 나누어 오오사카 만에는 사촌인 무라카미 카케히로와 차남인 무라카미 카게치카에게 맡기고 자신은 장남인 무라카미 모툐요시와 인노시마 무라카미의 수군인 무라카미 요시타다 등과 이요 미츠카하마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오오사카 만의 수군은 성과를 올렸지만 이요에 상륙한 수군의 육전대는 항복한다고 속임수를 쓴 적에게 야습을 받아 전멸하였으며 세키가하라 전투로 천하의 싸움이 판가름나자 영지의 대부분을 잃은 모리 가문을 따라 야시로시마의 동부인 우치노뉴우로 이주하게 된다.
그 때 당시에는 불과 120명의 부하와 영지 3000석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며, 점점 부하들은 떠나는 와중에 1604년 8월 22일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통솔과 무력만 높은 전형적인 맹장형 무장.
태합입지전에도 등장하지만 해적들 대우가 좋지 못한 작품이라 여기서도 능력치는 그저 그렇다. 그래도 해적들 중에선 구키와 더불어 제일 나은 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