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제국 최악의 병크
스스로 무덤을 판 행위
제1차 세계대전판 진주만 공습
1 개요
제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2월부터 독일 제국이 영국의 해상 봉쇄를 뚫고 무역난을 극복하고자 선택한 군사적 정책이다. 말 그대로 유보트를 있는대로 무제한 출격시켜 상선과 전함들을 격침시킨다는 내용인데, 문제는 연합국의 배 뿐만 아니라 중립국의 배까지도 그 대상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즉, 연합국들은 물론이고, 중립국 중에서도 그 어떤 연합국이든지 간에 연합국 방향으로 배를 움직이기만 해도 모조리 경고 없이 격침시키겠다는 소리다!
2 사건
이는 당시 독일의 사정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결국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1915년 5월 7일, 루시타니아 호를 격침시켜 미국을 격분케 하는 사태까지 이르고 만다. 당시 루시타니아 호에는 미국의 민간인 128명이 탑승하고 있었는데 독일 유보트의 어뢰를 맞고 죄다 사망한 것이다. 당연히 미국은 개빡쳤고, 미국 내 여론도 반독 여론이 매우 드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했다는 인식과는 달리, 독일은 급히 미국에게 사과하고 배상하였으며 심지어 잠시나마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중단하기까지 이른다! 독일이 이렇게까지 나오니 미국도 더 이상 책임을 따지려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3 여파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비록 병크는 병크이지만, 그 여파는 엄청났다. 이로 인해 대영 제국은 막대한 물적 손실을 입었으며, 수 십만톤이 이르는 상선들과 전함, 구축함, 순양함 등을 유보트에 의해 잃는다. 절대 뚫리지 않을 것 같았던 대영 제국의 제해권이 위협받기 시작한 것이다. 주로 영불 해협과 북해 인근을 돌아다녔던 유보트들은 숨어다니면서 수많은 영국 배들을 사냥하였고, 영국은 심지어 브리튼 섬 안에서 그대로 말라죽기 일보 직전까지 간다!
그러나 영국도 바보는 아닌지라, 나중에는 보조함을 만들어서 그 피해를 줄여나갔고, 유보트 출몰 지역에 기뢰를 설치하였으며, 또한 초기적인 소나 기술을 발견하여 미리 잠수함을 피해다니거나 잠수함을 사냥하기도 했다.
4 그 이후
루시타니아 호 사건 이후로 잠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중지하자 곧장 영국은 다시 독일에 대한 해상 봉쇄를 더욱 강화한다. 결국 참다못한 독일은 1917년 2월 1일 다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한다. 이번에도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였고, 1917년 한 해에만 100만 톤이 넘는 영국의 배들을 격침시킨다. 그러나 1917년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독일 제국의 최후를 알리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였다. 우선 영국도 기뢰와 소나, 보조함으로 피해를 최소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8년에는 세계 최초로 초기형 항모까지 개발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보트가 또 미국의 상선을 침몰시키면서 드디어 미국이 참전하고 만 것이다!
1917년 3월 1일, 치머만 전보 사건[1]이 공개되었고, 그 달에 독일 유보트가 또 미국의 상선을 침몰시켜 또 많은 미국 민간인들을 수장시켰다. 더 이상 미국도 참을 수가 없었고 결국 1917년 4월 6일. 미국은 독일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한다! 그리고 1년 7개월 5일 만에 독일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흠좀무
5 결론
분명히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꽤나 효율적이였고, 영국에게 굉장한 타격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독일도 그 길을 선택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수많은 나라들을 화나게 했고, 결국 그 어느 나라의 편도 들지 않던 중립국들까지 독일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나라들이 독일에 선전포고했고, 결론적으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독일 2제국 패망의 원인이였고, 독일은 스스로 무덤을 판 꼴이 된 것이다.- ↑ 독일제국의 외무 장관인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보낸 비밀 전보문을 말한다. 이 전보문에 따르면, 멕시코 정부에게 미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하라는 지시 문건 내용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는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