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람 추빈

사산 왕조의 역대 황제
24대 호스로 2세25대 바흐람 추빈26대 호스로 2세(복위)

바흐람 추빈(bahram chobin).

사산 왕조 페르시아 말기의 풍운아.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의하면 그는 고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시절, 페르시아에 그리스처럼 민주정치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가 다리우스 1세가 황제가 되어 실현되지 않자, 페르시아 귀족들 중에서 유일하게 황제를 섬기지 않고 국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하겠다고 선언한 귀족, 오타네스의 후손이라고 한다. 나름대로 명문 귀족의 자제인 셈[1].

그는 지금의 테헤란 남쪽의 도시인 라이이(rayy) 출신이었는데, 호르미즈드 4세(재위 기간: 579~590) 황제 시절, 멀리 페르시아의 동북 국경 지역을 침략해온 투르크(서돌궐)족의 30만 대군에 맞서 1만 2천 명의 정예 기병인 사바란(savaran)을 이끌고 나가 싸워 대승을 거둔 페르시아의 영웅이었다.

그의 이름인 바흐람은 원래 페르시아 신화 및 조로아스터교에 나오는 승리와 전쟁의 신인데, 그 이름처럼 그는 페르시아에서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돌궐을 쳐부수고 난 뒤, 그는 돌궐에게서 얻은 전리품 문제로 호르미즈드 4세와 사이가 벌어졌다. [2] 거기에다가 호르미즈드 4세는 바흐람 추빈에게 모욕까지 주려는 등 두 사람은 서로를 적대하게 되고 만다.

바흐람 추빈은 호르미즈드 4세의 아들인 호스로 2세와의 사이를 이간질시켜 괴롭혔다. 결국 호르미즈드 4세는 바흐람 추빈에게 반역을 당하고 제위에서 쫓겨나 눈을 뽑혀 끝내는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그리고 황제를 몰아낸 바흐람은 크테시폰에 입성하여, 놀랍게도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된다. 이 때를 가리켜 후대의 역사가들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한 때 바흐람 추빈의 손에 멸망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호스로 파르베이즈도 반란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멀리 로마 제국으로 망명하여 로마 황제인 마우리키우스에게 보호를 요청했고, 황제는 그 대가로 페르시아가 차지하고 있는 영토와 도시 일부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승낙하였고 자신의 딸인 마리암을 호스로에게 주어 아내로 삼게 했다.

호스로는 새 아내인 마리암과 로마 제국이 보낸 원군을 거느리고 고국으로 돌아와 바흐람 추빈이 차지하고 있던 수도 크테시폰을 공격하여 탈환했다. 이 때,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난 바흐람 추빈은 투르크로 망명하여 카한 밑에서 우대를 받았으나, 호스로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어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1. 다만, 오타네스 가문은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의 대귀족 가문이었던 터라 후손이 워낙 많고,(한국으로 치면 안동 김씨같은 느낌정도?) 혈통을 사칭하는 경우도 그만큼 많았다. 정말 명문가의 후손인지에 대해서는 딱히 확신하기 어렵다는 것.
  2. 바흐람 추빈이 돌궐에게서 빼앗은 전리품 중 일부를 황제에게 보내지 않고 자신이 차지한 것에 분노한 황제가 사죄를 요구하자, 그는 거절하는 답장 속에 끝이 구부러진 단검을 넣어 보냈다. 황제는 이 단검의 양끝을 잘라 되돌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