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규

1906년~1971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농경제학자, 정치인.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보(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예과 2기에 입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 법학과 동기생인 최용달, 이강국과 함께 사회주의 이념 서클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1] 1929년 대학을 졸업한 후, 모교(경성제대)에 남아 조교를 하면서 조선 농경제학을 계속 연구하면서 물밑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해왔다. 이 때문에 1931년, 경성트로이카 이재유가 주도한 경성제대반제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친우인 최용달, 이강국과 함께 참여했다. 8.15 광복 후에는 직업 정치가로 변모하여 건준, 인공의 중앙인민위원-재정부장대리를 역임했다.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48년 8월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 초대 농림상으로 발탁되었고, 그후로도 각종 고위직을 역임했다.

대학 동기생 최용달, 이강국과 달리 천수를 누렸다는 게 흥미롭다. 박문규, 최용달, 이강국은 대학 입학 후 해방전후까지 사회주의 운동가의 길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월북 후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국가 체제의 기틀을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최용달은 법학자로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헌법의 초안을 기초하였고 이른바 '민주기지론'을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한국판 마타 하리, 김수임사건으로 유명한 이강국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만주파가 공존하고 있던 초기 북한 정계에서 남로당의 중추로 활약했다. 그리고 박문규는 일제강점기 시기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조선의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해방후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북한 농업구조의 재편을 주도했다.

이들 셋 중 최용달, 이강국은 남로당계 숙청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 반면 박문규는 같은 남로당계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숙청 기간에 농림부상으로 강등되었을뿐 살아남았고, 이후에도 여러 요직들을 두루 거치며 정치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으로 재직하던 1971년에 사망했다.
  1. 박문규, 최용달, 이강국, 이들 세 사람은 대학 동기로 만나 인생 반 생애를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함께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