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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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독립장(單章) 수훈자
강기덕고광순고두환권기옥권오설기삼연김단야
김덕제김도원김도현김동식김마리아김상덕김상옥
김석김석진김석황김성숙김수민김이원김정익
김진묵김철김철수김학규김홍일남궁억문일민
민양기박상진박장호박재혁박희광반하경방순희
백남규백정기석호필선우혁손정도송병선송진우
송학선심남일안경신안공근안규홍안명근안승우
안태국안희제엄항섭우덕순유관순유림유석현
유일한윤동주윤자영이강훈이상룡이상정이애일라
이윤재이인이재유이재현이춘숙이회영이희승
장도빈장지연정인보정화암조동호조명하조병옥
조지 쇼주기철최중호함석은함태영호머 헐버트장태수


李載裕.
1905년~19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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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 이재유#

1 개요

일제강점기 활동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자세한 행적 1930년대 당대 최대의 슈퍼스타급의 사상범

2 생애

1905년 8월 28일 함경남도 삼수에서 화전민 출신으로 태어났다.

1930년대 활약한 대표적인 공산주의 운동가로 보성고보와 송도고보에 입학했지만 돈이 없어 몇 개월도 안되어 자퇴했다. 그 이후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에서 합법적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다가 20차례 넘게 체포당했으며, 결국 조선으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만기출옥한 1933년부터 조선공산당 재건그룹을 지도하고 '경성 트로이카'라 불리는 조직을 건설하였다. 당대 1급 불령선인으로 지목될 정도로 엄청난 공산주의자였다.

일본 경찰은 이재유를 체포하기 위해 엄청난 안간힘을 썼으나 번번히 놓쳤다. 그만큼 이재유는 일본 경찰로부터 검거망을 피하는데 능력은 대단했었다. 당시 언론들(조중동 항목2번, 심지어 경성일보매일신보등 총독부 관제언론조차도 이재유를 굉장히 크게 다뤘다! 그만큼 이재유는 당시 검거망을 피하는데 있어서 신출귀몰했었다.

당대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재유에 대해 굉장히 화제거리로 다루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이재유와 경성제대 교수 미야케와의 일화가 있다. 이게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한번 다뤄진적이 있었다. 미와 경부가 그렇게 잡을려고 혈안이었던...#

1934년 일본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가 일어났을때, 이재유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정학 제2강좌 교수이자 일본인 공산주의자인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의 경성제대 관사 다다미 마룻바닥 밑에서 수 개월간 은신했으며, 이 도움으로 이재유는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벗어나 무사히 도주했다.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일본 경찰은 발칵 뒤집혀 졌으며, 미야케 교수는 이 사건으로 결국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석방 후 귀국해서 일본이 패전할 때까지 다시 교수직을 맡지 못했다.

이후에도 끊임없이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 활동에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했었으나, 1936년 12월 25일, 당시 경기도 양주군 공덕리에 위치한 경원선 공덕리역(현 창동역) 근처에서 끝내 체포당하고 만다. 이재유를 검거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형사만 60여 명. 어찌나 기뻤던지 이들은 잠복하면서 했던 복장을 갈아 입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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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흉악한 조선공산당 마침내 궤멸되다
추격개시 이래 4년여, 원흉 이재유 드디어 잡혀 묶이다
일체의 국제 루트와의 절연, 붉은 독재자를 꿈꾼 암약
이재유 체포를 다뤘던 경성일보 기사. 당시 대문짝만하게 기사를 다뤘다. 당시 식민지 조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재유는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국내 독립운동의 마지막 희망 같은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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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유 체포 당시 일본 경찰들이 기념사진 찍은 모습. 앞줄 왼쪽에서 2번째로 두 손을 앞에 모은 인물이 체포된 이재유다. 일본 형사들은 체포 성공을 기념한다고 변장한 복장 그대로 기념촬영을 했다. 이재유를 체포했던 담당 경찰서였던 당시 서대문경찰서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당시 총독부 관제언론이었던 매일신보에서 하루 날짜 지면 전체가 '이재유 특집' 정도로 도배되었을정도였다.
1937년 4월 30일자 1면
1937년 4월 30일자 2면
1937년 4월 30일자 3면
1937년 4월 30일자 4면

이후 서대문형무소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1942년 9월에 형기가 다 채워졌음에도 이재유는 전향을 끝까지 거부한채 모진 고문을 당했다.[1] 이렇게되어 '비전향 장기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청주 형무소로 옮겨져 지내게 되고, 혹독한 생활을 겪으면서 끝내 광복 10개월 전인 1944년 옥사했다.

3 사후 평가

당대 엄청난 공산주의자로 1930년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음에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묻혔다. 가족으로는 아내 박진홍이 있었는데, 박진홍도 이재유와 같이 노동운동 활동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나중에 풀려나 박진홍은 1944년 김태준[2]과 함께 중국 옌안으로 망명하여 결혼한다. 부부로 위장해 함께 살았던 이순금도 이재유를 연모했었다고 한다.

이재유의 자손들은 없기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보훈처에 국가유공자 등록신청도 못하고 거의 존재감없이 묻혀져 갔었다. 박진홍이 감옥에서 낳은 아이가 있었지만 기형이었고 얼마 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러던 중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도 재조명해야한다'는 여론이 돌아 재조명되었고, 2006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을 추서했다.

이재유는 기존의 소련 코민테른 노선을 맹목적으로 따른 국제주의 운동자들의 운동 방식을 거부하고, 구체적 삶에 뿌리박고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실천운동을 주장해왔었다. 그는 국제주의자들이 경시 내지는 무시하였던 민족문제를 운동의 중심에 두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민족주의적 공산주의자'로 평가받는다.

4 참고

이재유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서술해놓은 곳이 있으니, 이재유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한번 보는 것도 좋다. 이재유 덕후가 쓴 문서 같다 다만 모든 것을 상세하게 다뤄놓았기 때문에 전혀 쉽게 읽을 수가 없고 학술적으로 써진 글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문제가 있다. 좀 쉽게 접하고 싶다면 안재성 작 <경성 트로이카>를 읽는 것을 권장. 작가가 원래 소설가라 논픽션을 소설체로 써서 읽기가 편하다.

  1. 당시 감옥에 갇혔던 정치범들은 풀려나고 싶으면 총독부 당국에서 일괄적으로 요구하는 '전향서'를 쓰게 했다. '전향서'를 안쓰면 절대 내보내주지 않았었다. 때문에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등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출옥하고자 전향서를 많이 썻던 시기로 암흑기 그자체였다.(심지어 일본의 대표 공산주의자인 사노 마나부 같은 유명인사조차도 전향했던 그런 광기시대였으니..)
  2. 공산주의자로 동시에 한글학자, 대학교수로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많았다. 경성콤에 연루되어 체포, 투옥당했는데 그 사이에 어머니와 아내와 막내아들이 차례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