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베르나베 페레이라 (Bernabé Ferreyra) |
생년월일 | 1909년 2월 12일 |
사망년월일 | 1972년 5월 22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루피노 |
포지션 | 포워드 |
신체조건 | 172cm / 73kg |
등번호 | -[1] |
소속팀 | CA 티그레(1927~1932) 벨레스 사르스필드(1930~1931 / 임대) 리베르 플라테(1932~1939) |
국가대표 | 4경기 / 0골(1930~1937) |
1 선수 생활
1909년 루피노에서 태어난 베르나베 페레이라는 14세에 형이 활동하던 호르헤 뉴베리에서 선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15세에는 1군 팀의 멤버가 되었으며 청소년기에는 철도 워크숍에서 화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27년 CA 티그레에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기 시작하였다.
티그레에서 1932년까지 활동했던 그는 브라질로의 투어 8경기에서 11골을 넣고 시즌 30골 이상을 넣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이 무렵에 대표팀에도 발탁되었지만 대표팀에서의 플레이는 티그레에서와 크게 달랐고 크게 비판을 받는 등 국가대표팀과는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한다. 1932년 페레이라는 리베르 플라테로 팀을 옮기게 되는데 이 당시 받은 23,000파운드는 1949년까지 17년간 축구계 최고의 이적료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2]
리베르 플라테에서도 그의 활약은 계속되어 이적하자마자 득점왕이 되기도 하고 12경기 연속 득점 기록과 같은 유니크한 기록도 써내려갔다.[3]
그리고 나름 스카우터로서의 재능도 보여서 역대 남미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호세 마누엘 모레노를 팀에 데려오기도 하는 등 리베르 플라테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936년 이후로 그의 몸은 수비수들의 집중 견제로 인한 부상이 잦아졌다. 한계가 찾아왔고 점점 그의 입지가 줄어만 가는 와중에 1939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은퇴를 선언하였다.
축구에서 손을 뗀 이후에는 잠시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갖기도 하였고 1972년에 사망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남미 축구계에서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등과 더불어 단 3명이 갖고 있는 경기당 득점 1 이상의 기록 보유자. 특히 강력한 슈팅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로 인해 별명이 야수, 그리고 강력한 슈팅으로 인해 붙은 루피노의 박격포였다.
베르나베 페레이라는 특별했다. 그의 경쟁자는 다른 선수들보다 두 배는 더 일을 해야만 했고 그는 우리 모두를 위해 일들을 쉽게 처리하곤 했다. 그는 더욱 존중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돈을 원하는만큼 벌었지만 돈을 모으는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그는 대가없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돈을 썼다. 그가 당신에게 악수를 청하면, 당신의 삶 나머지를 위한 친구를 얻었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호세 마누엘 모레노
3 어록
나의 형들은 나에게 더 강한 슈팅을 차도록 주문하였고 마을에서 가장 강한 슈팅을 찰 수 있게 되었다. 매일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 공을 찼고 그들은 항상 나에게 주문했다. '더 세게 차라고!'
축구가 나에게서 은퇴하기 전에 내가 축구를 떠날 것이다.
아니오. 노래 부를 때의 당신이 야수죠.[4]
4 수상
4.1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3회: 1932, 1936[5], 1937(이상 리베르 플라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