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남미 최고의 축구 선수
이름 | 호세 마누엘 모레노 페르난데스 (José Manuel Moreno Fernández) |
생년월일 | 1916년 8월 3일 |
사망년월일 | 1978년 8월 26일 |
국적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부에노스 아이레스 |
포지션 | 인사이드 라이트 |
신체조건 | 170cm / 75kg |
등번호 | -[1] |
소속팀 | CA 리버 플레이트(1935~1944) 레알 에스파냐 클럽(1944~1946) CA 리버 플레이트(1946~1948)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1949) CA 보카 주니어스(1950) CD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1951) 디펜소르(1952) 페로 카릴 외스테(1953) 인디펜디엔테 메델린(1954~1956) 인디펜디엔테 메델린(1960~1961) |
국가대표 | 34경기 / 19골(1936~1950) |
목차
1 어린 시절
모레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모레노는 라 보카 지역에서 태어났고 역시 그 지역의 다른 아이들처럼 보카 주니어스의 팬이 되었다. 모레노는 축구 외에도 권투도 좋아했던 소년이었고 권투 선수도 꿈꿨지만 축구 선수의 길을 택하였다. 15살 때 모레노는 평소에 좋아하던 보카 주니어스 구단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갔지만 보카 후니오르스는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 좌절했지만 모레노는 곧 마음을 추스르고 '그들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라는 결심을 했다. 그러다 보카 후니오르스의 최대 라이벌 리버 플레이트의 전설적인 공격수, 베르나베 페레이라의 눈에 띄었고 그의 설득에 리버 플레이트에 입단하였다.
2 클럽 커리어
2.1 리버 플레이트 그리고 라 마키나
18살의 모레노는리버 플레이트에 들어갔고 그가 치른 공식전은 브라질 보타포구와의 친선경기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곧 플라텐세와의 리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한 골을 넣었다. 그는 어렸지만 곧 카를로스 페우셀레, 베르나베 페레이라 등 기존 리베르 플라테 공격수들의 플레이에 녹아들어갔다. 그들이 팀을 떠난 후에는 새로 영입된 앙헬 라브루나, 무뇨스 등과 호흡을 맞추면서 팀의 핵심 선수가 되었고 공격은 그를 중심으로 행해졌다. 전설적인 공격편대 라 마키나의 멤버 모두가 뛰어난 선수들이었지만 핵심은 단연 그였다.
2.2 저니맨
1944년, 제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FIFA의 선수 등록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모레노는 멕시코의 에스파냐 클럽으로 이적했다. 여기에서 우승도 맛보고 멕시코의 팬들로부터 el charro[2]라는 별명도 얻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리버 플레이트 소속이었던 그는 전쟁이 끝나고 다시 리버 플레이트에 돌아갔다. 그리고 팀에서 젊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도 호흡을 맞추었다. 하지만 이 이적으로 아르헨티나 팬들의 상당수가 그에게 등을 돌렸는데 한번은 시합 중 티그레 팬들이 던진 돌에 맞아 다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치료받기를 거부했는데 관중들이 이것을 보면서 그를 다치게 했다는 만족감을 얻지 못하게 하려 일부러 그랬다고 술회했다.
1947년에는 아돌포 페데르네라가 팀을 떠났고 이런 사건까지 일어나자 모레노는 리베르 플라테에서 정이 완전히 떨어져버렸고 칠레의 카톨리카로 이적해버렸다. 그 이후로 리베르 플라테의 철천지 원수인 보카 주니어스에서도 잠시 뛰기도 하다 다시 카톨리카로 돌아가는 등 복잡한 커리어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의 실력까지 어디 가는건 아니라서 이적하는 팀마다 항상 우승컵을 몰고 다녔다.
우루과이에서 뛰기도 한 모레노는 선수 생활의 황혼기를 콜롬비아에서 보냈다.
3 국가대표 커리어
제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중단되기도 하고 아르헨티나가 출전을 거부하기도 하는 등 월드컵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코파 아메리카에서는 그의 실력을 발휘하였다. 1941년과 1947년의 코파 아메리카에 출전하여 우승을 이끌어냈다.[3]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공격수로서 필요한 모든 것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피지컬, 기술도 뛰어났지만 특히 대단한 것은 그의 시야로 경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일품이었다고 전해진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없어서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르헨티나의 전설적인 공격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레벨로 IFFHS의 평가에서는 모든 20세기의 선수 중 25위에 꼽히기도 하였다. 아르헨티나 출신 선수 중 그보다 위에 있는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와 디에고 마라도나 둘 뿐이었을 정도.
리베르 플라테에서 300골 가까이 넣은 앙헬 라브루나와 디 스테파노가 가장 존경하던 선배 아돌포 페데르네라보다 위의 평가를 받는 선수라는 것에서 그의 위엄을 알 수 있다.
5 수상
5.1 클럽
아르헨티나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5회: 1936, 1937, 1941, 1942, 1947(이상 리베르 플라테)
멕시칸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회: 1946(이상 클럽 에스파냐)
칠리안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1회: 1949(이상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
캄페오나토 프로페셔널[4] 우승 2회: 1955, 1957(이상 인디펜디엔테 메델린)
5.2 국가대표
코파 아메리카 우승 2회: 1941, 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