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의 원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핵심개념이다.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이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존재와 운동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었다. 즉 있는 것이 있고 없는 것이 없다면 있는 것이 없게 되거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에서 있는 것이 있게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이다. 플라톤은 이 문제를 이데아(Idea)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하였다. 사실 플라톤의 이런 설명방식은 그 이후에 나올 모든 서양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것은 '진짜' 있는 것들은 따로 있고, 우리가 보는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들은 '가짜(혹은 진짜와 같이 있지는 않은)' 있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플라톤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있는 것들을 의심없이 믿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크게 비판할 만한 것이 된다. 첨언하자면 이런 플라톤의 사고방식은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는데, 사실 현대인들은 이미 일상적으로 이런 사고방식을 견지하고 있다. 우리가 물을 마실 때, 우리는 물의 화학식을 마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의 '본질'은 그 '과학적'인 구조에 있다고 말한다. 이런 유비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다분하다. 그러나 본질과 현상을 구분하는 사고방식 자체는 사실 굉장히 상식적인 것이다.
각설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와 운동을 사(4)원인설을 통해 설명한다. 각각의 있는 것들에는 그것의 있음에 대해 네 가지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질료인, 운동인, 형상인, 목적인 등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숲길을 걷다 우듬진 떡갈나무 숲을 발견했다고 해보자. 우선 떡갈나무가 거기 있기 위해서는 떡갈나무가 떡갈나무로서의 형상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떡갈나무가 아니었겠는데, 거기 있는 것은 떡갈나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형상인이다. 떡갈나무는 동시에, 떡갈나무로서의 형상을 갖추기에 적합한 질료를 가져야만 한다. 이 질료(hyle, ὕλη)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재료라는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만, 존재자들의 개별성을 성립시키는 무규정자로서도 이해된다. 도토리는 또 떡갈나무가 되기 위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 내리쬐는 햇살과 같은 여러가지 작용을 받아야만 한다. 이것은 운동인이다. 마지막으로 목적인이 있다. 아마 목적인이 네 가지 원인들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원인이 아닐까 한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이 세계를 무목적적인 힘들의 충돌로서 이해하는데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무척 많은 설명들이 요구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눈과 같은 생물의 복잡한 기관이 우연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보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보았다. 즉 이렇게 정교하게 짜여진 세계라면, 필연적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다.
그러한 모든 있는 것들의 최종적인 목적이 되는 것이 바로 부동의 원동자이다. 부동의 원동자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자'라는 뜻이다. 잠깐 다른 얘기를 먼저 해야만 할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실제로 이 예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하게 닭이 달걀보다 앞선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달걀은 닭의 형상을 제 자신의 일종의 목적으로서 갖는데, 그러자면 닭의 형상이 먼저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때 닭알과 같이 아직 제 본성을 온전히 발현하지 못한 상태를 가능태라고, 달걀이 닭이 되어 자신의 본성을 제대로 발휘한 상태를 현실태라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부동의 원동자는 단적으로 현실태다. 왜냐하면 부동의 원동자는 모든 가치가 달려있는 최종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동의 원동자가 제 자신의 지금의 상태를 제외한 어떤 것을 목적으로 삼을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동의 원동자는 1. 모든 것의 목적이 되며 2. 제 자신을 온전하게 발휘한 현실태이며 3. 따라서 영원하고 완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