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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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扶餘城

현재 위치는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집안성) 농안 지역 혹은 길림시 용담산성으로 추정되는 고구려부여 시대의 이다. 고구려가 세웠던 천리장성의 북쪽 끝이 부여성이었으며, 남쪽 끝은 비사성이었다.

2 역사

원래 부여의 성이였다. 정확한 축조시기는 나타나지 않지만 농안에 위치한 후기 부여의 왕성으로 본다면 늦어도 4세기에는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담산성이라는 설을 받아들인다면 부여가 강성했던 기원 전후 시기에 축조되었다가 광개토왕~장수왕 대에 수축되었다.

5세기 고구려의 북진 과정 또는 6세기 후반 고구려가 말갈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세력 내에 편입되었다. 이후로는 고구려 말기에 세워진 천리장성의 북쪽 끝이 되었다.

668년 2월 당나라의 장수 설인귀(薛仁貴) 등이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부여성 주변의 40여 성이 당나라에 항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부여성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인 669년 2월에 당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중 하나라고 한다.[1]

당나라의 만주 지배가 약화되자 발해는 부여의 고지에 부여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말하는 부여성은 오늘날 길림시 용담산성이 아니라 농안 일대로 보는데 이견이 없다. 발해 15대왕 대인선때인 925년 12월, 거란군에 포위되어 다음 해인 926년 1월에 함락되었다. 부여성을 함락시킨 후 거란은 별다른 저항없이 상경 용천부에 도착하였다.

3 기타

고구려와 부여를 배경으로 한 바람의 나라에 당연히도 부여성이 구현되어 있다. 유저들은 부여 지역에서 나오는 BGM을 '부여성 노래'라고도 부른다.

고구려 천리장성의 동북 기점이 되기도 하였다.
  1. 이외에도 666년에 연남생 등과 함께 항복한 국내성이나 667년 신성이 함락된 후 당나라에 의해 함락당한 목저성이나 남소성이 당시 항복한 성으로 분류된 점 등 미스테리한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