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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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적인 부여 세력 추정도.

부여
扶餘
존속기간서기전 2세기[1] ~ 494
위치쑹화강 일대
수도북부여
예성(濊城) (북부여 초기 수도)[2]
부여성(扶餘城)[3]
동부여
여성(餘城)[4][5]
정치체제군주제
국가원수(王)
언어부여어
종교무속신앙
민족 구성예맥, 숙신, 물길
성립 이전부족 사회
멸망 이후고구려


1 개요

부여, 夫餘, 扶餘, 夫余, 扶余, Buyeo.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지방)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왕조. 예맥족이 주축을 이룬 국가로 휘하에 읍루도 그 구성원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 서주~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한반도청동기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으며, 요동/한반도와 같은 청동기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동검, 가는무늬거울 등이 발견되는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한반도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3세기로 보고 있다.

부여의 국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부여라는 이름은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부루'와 어원상 관련이 있다는 설과, 평야를 의미하는 한국어 '벌'의 고어형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그밖에 왕족의 성씨가 해씨였으므로, 태양 숭배, 불숭배와 관련하여 '불'이 어원일 거라는 설도 있으나 이 모두 명확한 사료가 없어 추측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현재 러시아에 편입된 몽골 계통 부족 부랴트(Буряяд)가 부여의 원음이라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발음의 유사성과 위치의 근접성 말고는 사실 가깝지도 않다. 이렇다 할 근거가 없으니 참고하는 선에서 끝내자. 참고로 부랴트는 부랴티아로 현존하는데, 러시아 바이칼 호 근처에 있다.

한자로 쓸 때 부여의 '부'를 夫로 쓰는 경우와 扶로 쓰는 경우, '여'를 余로 쓰는 경우와 餘로 쓰는 경우가 모두 있다. 『삼국지』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는 대개 부여(夫餘)라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서에는 대부분 부여(扶餘)로 기술하고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서 夫餘와 扶餘를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6]

부여 자체의 일원적인 역사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이런 맥락에서 역사 기록에는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 존재한다. 바로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등이다. 북부여, 동부여에 대해서는 정확한 실체 규명이 힘들고 수많은 학설이 난립하고 있다. 동부여에 대해서는 북부여 왕인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가 변경되었다는 것과, 고구려가 410년에 침공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 왕이 천도한 동부여와 고구려가 점령한 동부여를 같은 국가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도 완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으로 보는 설이 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북부여가 최초의 부여라는 것. 또 남부여는 백제에서 성왕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부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저나와 세운 국가 갈사국이다.

영토는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만주 일대였으며 국력이 점차 쇠퇴하여 동쪽의 연길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서쪽으로는 흉노-오환-선비와 접했고 동쪽으로는 옥저, 숙신-읍루-물길과 접했으며 남쪽으로는 고조선-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되고 있다.

부여 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의 유민들은 3 ~ 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는 그들의 상당수가 요서지방으로 이주되어 부여의 지배층들은 전연, 후연에서 벼슬을 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뒤 5세기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의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 말갈,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부여는 5세기 말에 사라지지만 그 유속은 대체로 7~8세기 까지 남아있었다. 7세기에 속말말갈의 수괴 돌지계가 수나라에게 부여후로 봉해진 것이나 발해 왕 대무예가 부여의 풍속을 이어받았다고 일본에 선언한 것이 그 흔적. 훗날 고려에서 자신들의 궁전중 몇몇 건물을 부여궁이라 칭하고 나라도 건국할때 부여를 언급하긴 했다.

2 역사

2.1 건국 신화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사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 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뺏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서울을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ㅡ <논형> [#]
<고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한서>에 선제 신작 삼년인 임술년 4월 8일에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홀승골성으로 내려와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 일컬으며 국호를 북부여라 했다. 스스로 해모수라 하고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고 지었다. 성을 해씨로 삼았다. 왕은 이후 상제의 명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부에 나라를 세우고 졸본부여라 하니 바로 고구려다.
ㅡ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북부여> [#]
북부여왕 해부루의 재상 아란불이 꿈을 꾸었는데 천제가 내려와서 말했다. "장차 내 자손에게 이곳에 나라를 세우도록 할 것이니 너는 다른 데로 가라. 동해에 가섭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 왕도로 삼기 적합하다." 아란불은 왕에게 권하여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했다. 그리고는 국호를 동부여라 했다. 해부루는 늙도록 자식이 없었다. 어느날 산천에 제사를 지내 대를 잇게 해달라고 빌었다. 이 때 타고 가던 말이 큰 연못에 이르러 큰 돌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사람들에게 그 돌을 옮기게 하였다. 그러자 금빛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말했다. "이는 바로 하늘이 나에게 내려주신 아들이구나." 곧 거두어 금와라고 이름짓고 아이를 길렀다. 그가 성장하자 태자가 되었다. 부루가 죽자 금와가 대를 이었고 그 다음에는 대소가 대를 이었다. 지황 3년 임오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무휼이 공격해 대소를 죽였다.
ㅡ <삼국유사 기이 제1권 동부여> [#]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시조인 추모왕의 설화가 굉장히 흡사하다.

2.2 건국에서 멸망까지

3세기 서적인 '위략'에 전해지는 설화에 의하면 부여는 북만주 탁리국(다른 책에는 고리,색리 등으로 기록)에서 탈출한 동명이 예맥의 땅에 망명하여 건국했다고 한다. 대체로 부여가 건국된 시기를 기원전 3세기로 본다. 위만조선이 건국된 시기와 비슷한 시기이며 고조선의 후계국으로 보기도 한다.

고구려 대무신왕의 원정으로 대소왕이 사망하면서 부여와 고구려 간에 관계에 약간의 흠이 생겼으나 어찌되었든 국력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부여가 우위에 있었다. 고구려 동천왕 시기에도 부여는 8만여 호에 달하는 인구를 과시하며 3만호에 불과한 고구려를 압도하는 국력을 자랑한 바 있다. 고대 국가의 국력은 인구와 비례한다. 이는 직접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농업이 당시 경제의 전부였기 때문이고, 무기 또한 발전하지 못해 사실상 군사력이 인구수와 동일시되던 고대사회로써는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 실제 부여는 선제 이래 한번도 파괴되지 않은 도성을 자랑하던 강국이였다. 이에 비해 고구려는 건국 초기 약하던 시절 툭하면 도성이 파괴되었다(...). 더욱이 부여는 방어가 취약한 평야 지역에 도읍한 평지성이었고,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방어에 유리한 산성이었다. 거기에다가 부여는 최대 영토가 2천리에 이르렀다.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동명성왕 ~ 대무신왕 대에 고구려와 충돌했던 부여 세력은 부여 남부의 일개 대가세력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잘 나가던 부여도 3 ~ 4세기에 모용선비에게 대대적으로 털리기 시작하면서 쇠락기를 맞이했다. 서기 285년, 모용외의 침공에 1만여명이 포로로 잡혀 끌려갔으며 급기야 부여왕 의려가 자살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국력은 크게 쇠락한다. 국가중심지를 기존의 길림성 일대에서 농안지역으로 옮기나, 346년 결국 전연 모용황의 대공격에 부여왕 현을 포함, 무려 5만여 이 끌려가면서 사실상 부여는 붕괴하게 된다. 여기서...으로 수정하기 전의 이 항목도 그렇고 역사책에는 분명 인(人)으로 적혀있는데 호로 헷갈리는 경우가 매우 많다. 아니, 이부분은 원래 역사서끼리도 서로 헷갈려한다. 구당서->신당서로 옮겨적을때 '구'(口)를 호로 잘못 적은 부분이 많다는 것이 대표적인 예.5만 호면 1호당 4인으로 잡아도 20만 명... 척박한 땅에서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 인구 중 포로로 끌려간 사람이 이 정도면 실제 인구가 최소 40만...

부여 멸망 이후 잔존세력들이 고구려의 양해 아래 책성 일대에 모여 부여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410년에 광개토대왕의 동부여 원정으로 이것마저 맥이 끊겼다. 후기 부여의 중심지였던 농안지역에 남아있던 마지막 부여 세력은 494년에 물길#s-2의 침입을 받고 완전히 멸망하여 고구려에 투항했다.

3 정치

부여는 궁궐, 성, 창고, 감옥 등 진보된 조직과 제도를 가졌던 나라다.

정치는 완전한 귀족정치로서 지배계급에는 왕과 그 밑에 가축의 이름을 붙인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와 대사(大使), 사자(使者) 등 귀족들의 관직이 있었으며, [7]또 전국을 크게 네 구역 즉 사출도(四出道, 혹은 사가도(四街道))라 칭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마가·우가 등의 제가(諸加)가 각각 그 일부 지역을 맡아 다스렸다.

사출도 중의 큰 지역은 주민 수가 수천 호(戶), 작은 것은 수백 호가 되었다. 피지배계급인 민(民)을 하호(下戶)라고 칭하였는데, 그들은 지배계급에 대하여 각종 노역과 물자 공급을 부담했기에 노비 취급을 받았다. 이들은 전쟁시 직접적으로 참전하지 않고 식량 보급과 물자운송을 담당했으며, 전쟁시에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집집마다 갖추어 놓았던 무기를 갖고 호민(豪民)들을 모아 참전하였다. 호민이란 하호 중 부유하고 어느 정도 자체적인 세력이 있었던 자들로 영국의 요먼들과 비슷한 계층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봉건제 사회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왕은 귀족 연맹체의 제사장 성격이 강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귀족 회의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했다. 하늘이시여 왕들에게는 다행히도 후대로 가면서 점차 왕권이 강화되면서 이러한 관습은 사라졌으나, 다른 주변국들처럼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전쟁시 왕은 귀족들과 휘하의 부대를 이끌고 참전하였지만 어디까지나 귀족의 대표로서 군림하였을 뿐, 귀족은 각자의 집단을 자치적으로 이끌어 나가고 있었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강하지 못하였다. 이런 정치제도 때문에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우위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소고구려대무신왕과의 전투에서 잡혀 참수당하자 귀족 세력들 간에 내분이 일어났고, 이는 결과적으로 부여의 힘을 분산시켜 후대에 부여가 다시는 고구려의 국력을 넘어서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불러왔다.

4 사회

혼인을 할 때는 혼납금으로서 남자집에서 여자집으로 소와 말을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또한 남녀가 간음을 하거나(간통) 부인이 질투를 하는 경우에는 모두 죽였으며, 특히 부인이 질투하는 것을 나쁘게 여겨 죽인 뒤 시체를 산 위에 버려 썩게 했다. 만약 죽음을 당한 여인의 친정에서 의 시체를 거두어가려면 남자집에 소와 말을 보내야 했는데, 이것은 혼인 때의 혼납금을 반환하는 것과 같았다. 또한, 고구려에서와 같이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는 형사취수제도가 있었다.

추수가 끝난 후 영고라 불리는 제천행사를 벌여 하늘에 제사지내고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과 함께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영고는 유목민족의 수렵제 성격이 남아있어 동맹이나 무천과 달리 10월이 아닌 12월에 거행되었다. 덕분에 한국사 공부할 때 귀찮아지는 요소

노비제도가 존재하였다. 순장은 대부분 노비로 채워졌다. 순장된 노비는 전쟁포로 출신뿐 아니라 형벌노비와 부채노비도 있었다. 때문에 변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노비로 삼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의 법에는 살인자는 죽이고 그 가족을 노비로 삼았다. 그리고 남의 물건을 훔쳤을 경우 12배로 배상하게 하였다.

5 경제

만주의 넓은 평야지대에서 농사를 주 산업으로 한 농경국가였으나, 동시에 목축과 기마술에도 능한 반농 반목의 경제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 덕분에 당시 북방의 패자로 자리매김했으며, 중국을 수출하기도 했다.

주요 수출품으로는 , 붉은 옥(적옥, 赤玉), 구슬 장식품(미주, 美珠), 담비나 돼지, 여우, 원숭이 등의 짐승 가죽이 있었다.

6 종교/문화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부여조의 영고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의 백성이 동네마다 한데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식 직전에 "맞이굿(迎神祭)"을 벌였다고 한다. 때문에 제천의식에 기초한 사머니즘 신앙이 있었다고 보인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제천 의식을 행했는데, 이 때 소를 죽여 그 굽을 살펴서 길흉을 점쳤다. 만약 굽이 갈라져 있다면 이를 흉조로 여겼고, 그렇지 않다면 길조로 여겼다.

또한 흰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즐겨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례문화가 상당히 흠좀무했는데, 죽은 사람의 장례는 무조건 5월에 치뤘다. 만일 다른 달에 죽으면 5월까지 보존했고, 심지어 당시에는 귀한 얼음까지 팍팍 써 가면서 최대한 시체의 부패를 늦추었다. 다만 무조건 5월에 장례를 치른 게 아니라,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뭐 어느 쪽이든 흠좀무지만...

고대 국가들이 그렇듯이 순장이 존재했는데, 주로 노비를 집어넣었다. 죽은 이가 높은 사람이라면 많개는 백여명이 넘는 노비가 순장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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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2014년 10월 29일, 국립중앙과학관이 공개한 일제가 수집한 유물 중 부여 금동 가면[*]이 발견되었다.

7 군사


중국 길림성박물관에 전시중이던 부여의 철찰갑과 철검.[*] 지금은 동북공정의 영향인지 사라졌다.

부여 철검의 다른 사진.

북방지역의 평원에서 기른 말과 기마술, 그리고 철기를 사용했다.

부여는 중국과 특히 긴밀한 군사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중국이 고구려와 선비족의 연계가 중국의 위협이 될 수 있었고, 부여 입장에서도 고구려와 주변 기마민족들은 부여에 적대적이었기에 둘의 이해관계가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물론 몇 차례 중국과 부여의 충돌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나 매우 적었던데다 충돌시에도 부여의 군사력은 중국에 결코 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삼국지 동이전 부여조에서 평가하기를 "그 나라(부여)는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에게 패해 본 일이 없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두 차례의 한사군과의 충돌(111년에는 7천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낙랑군을 공격, 167년에는 부여 왕이 직접 2만의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공격)도 부여의 선제공격이었다. 참고로 이 때 부여의 한사군 공격은 (동북아역사재단의 고조선 단군 부여에 따르면)흉노처럼 '어익후 님들 요즘 경제 좋다면서요? 좀 분배하시죠?' 하는 식의 조공 확대나 약탈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고구려처럼 '저놈들을 이겨야 우리가 살 수 있다! 공격!' 하는 생존과 발전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 정체는 "요즘 한나라 놈들이 잘 나간다고 우리의 힘을 잊고 얕잡아 보네. 손 좀 봐줘야지." 였다는 것(......) 드라마 주몽에서 금와왕(전광렬 역)이 '짐은 한(漢)이 두렵지 않다.' 는 발언은 드라마 시나리오상에서는 립서비스였을지 몰라도, 실제 역사에서는 절대 단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물론 국력의 차이를 생각하면...출처필요

8 부여에서 유래한 이름

  • 부여와 백제의 왕성(王姓) 부여씨 - 백제에서는 부여계승의식에 의거하여 부여를 왕성으로 삼았다. 한국의 왕성 중 유일한 복성. 중국에서는 지들 맘대로, 또는 오해해서[8] 여씨로 줄여서 기록했다. 현재 부여 서씨[9]로 전해진다고 한다. 의외로 선비족에 의해 요서로 이주된 이후의 부여 왕족들도 성씨가 부여씨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엔 부여씨를 쓰는 사람은 없다. 이는 당연히 요서경략설과 관련해 무수한 떡밥을 낳는데...
  • 충청남도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 성왕(백제)이 세운, 백제의 도읍 사비성이 있었다. 한 때 강성했던 부여의 이름이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여담으로 성왕 대에는 잠시 백제 국호가 남부여로 변경되기도 했다. 다만 전통적으로 역사서에서 국호에 들어간 성씨, 방위 표시나 전·후 같은 수식어는 후대에 동명의 왕조들을 구분하기 위해 첨가하는 것이었지 실제로는 이런 수식어를 뺀 게 실제 국호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래서 어쩌면 실제로는 성왕이 국호를 그냥 '부여'라고 고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부여가 됐든 부여가 됐든 이 국호가 언제까지 이어졌는지는 불명확하다. 성왕의 국호 변경 이후 시기를 기록한 역사 기록(중국측 기록 포함)에는 그냥 백제로 표기된다. 또한 후삼국 시대 견훤이 이 나라를 계승해 세운 나라의 국호가 백제(후백제)였지 부여나 남부여가 아니었다. 따라서 성왕이 선포한 (남)부여라는 새 국호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했다고 추정되고 있다.

9 기타

삼국전투기에서는 부여라는 나라 자체가 다스베이더로 패러디되었다. 고구려와 백제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위엄쩌는 전성기와는 달리 시기 자체가 몰락기라 위엄이라곤 전혀 찾아볼수 없으며 고구려를 설명할때 곁다리로 살짝 언급되는 정도다.

10 참고자료

10.1 관련 문서

10.2 연구 자료

  • 강만길 외, 《한국사 2 - 원시사회에서 고대사회로》, 한길사, 1995년
  • 백산자료원 편집부, 《고조선 부여사 연구》, 백산자료원, 1995년
  • 송호정, 《한국사.4 - 초기국가 고조선 부여 삼한》, 국사편찬위원회, 1998년
  • 서병국, 《동이족과 부여의 역사》, 혜안, 2001년
  • 박경철 외, 《고조선 단군 부여》, 동북아역사재단, 2004년
  • 김기섭 외, 《부여사와 그 주변》, 동북아역사재단, 2008년
  • 송호정, 《처음 읽는 부여사》, 사계절, 2015년
  1.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 등에도 부여가 언급되고 사기 화식열전을 보면 오씨과조에 진시황 때 오씨현 상인 과와 거래하던 상인 중에 부여 상인이 나온다. 부여는 기원전 222년 이전부터 연나라와 국경을 맞대로 있었던 것이 된다. 이에 따르면 부여는 기원전 3세기 무렵에 건국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므로 향후 부여의 건국연대가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이에 따르면 부여의 존속기간은 700년이 아닌 800년으로 볼 여지도 있다. 최근 러시아 연해주 북옥저 관련 유적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기원전 3~4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부여식 청동검이 발견되었다.
  2.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린 성 지린 시로 추정.
  3.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린 성 눙안 시로 추정.
  4. 출처 : 광개토대왕비문
  5. 현대 중화인민공화군의 지린 성 둔화 시로 추정.
  6. 참고로 애초에 餘는 余에서 파생된 글자라 전통적으로 餘의 약자로 余를 쓰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현행 표준 한자인 신자체에서는 餘를 폐지하고 余로 통합됐다. 그리고 중국간화자(간체자)도 일본의 신자체와 마찬가지로 餘가 余로 통합됐다. 단 余 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많기 때문에 중국 간화자의 경우 의미가 혼동될 우려가 있을 경우 '남다'라는 의미를 명시하고자 할 경우, 또는 본래 번체자(정체자) 표기에서 余가 아닌 餘였다는 걸 확실히 하고자 할 경우, 부수 飠(食)을 饣으로 치환한 馀로 쓰는 걸 허용한다. 그래서 중국어 간체에서 부여를 夫余나 扶余로 적는 게 일반적이지만 夫馀나 扶馀로 적기도 한다. 복잡하다
  7. 관직명칭에 대해서는 만주원류고에 중국인들의 무지로 관직명에 가축의 이름을 넣었다는 비판이 있다.
  8. 실제로 夫 자는 한문에서 그냥 별 의미 없는 발어사(發語辭)로 쓰는 경우가 많다. 고대 중국인들이 백제 왕족을 언급하는 문장에 적혀 있는 夫餘나 夫余를 복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발어사로 夫를 쓴 다음에 한 글자 성씨로 餘나 余를 기재했다고 오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9. 실제로 부여의 '여'(餘 또는 余)와 성씨 서(徐)는 余를 구성 요소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10. 번체로는 扶餘, 간체로는 扶余.
  11. 시 안에 시가 있는 형태이다. 오타 아니다. 중국의 행정구역 체계상 두 시의 등급이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