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비드쿤 아브라함 레우리츠 욘쇤 크비슬링(Vidkun Abraham Lauritz Jonssøn Quisling)
(1887년 7월 18일 ~ 1945년 10월 24일)
노르웨이의 매국노. 언어사전에서도 크비슬링(Quisling)은 반역자, 매국노와 동의어로 등재되어 있으며 현재에도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린다고 한다.
2 생애
노르웨이의 텔레마르크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수학 실력이 매우 뛰어났고 뛰어난 암기력을 보유해서 천재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육군사관학교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한 후 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한 후 국방부장관을 역임했다. 젊은 시절에는 사회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탐험가 프리드쇼프 난센의 조수로 일하면서 러시아 기근 구제사업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때의 경험에서 사회주의에 환멸을 느꼈는지 파시즘에 동조하게 된다.
이후 파시즘에 깊이 빠진 그는 1933년 독일 나치당을 본따서 노르웨이의 파시즘 정당인 민족단일당을 창당했다. 처음에는 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성공적이였지만[1] 차츰 반유대주의적인 색채가 강해지면서 지지를 상실했다.[2] 그러면서도 나치의 지도자 중 한명인 알프레드 로젠베르크의 북해제국 구상에 공감하여 1939년에 히틀러와 만나 회담을 하기도 했다. 1939년 12월 14일에 아돌프 히틀러는 국방장관인 비드쿤 크비슬링을 만났는데 크비슬링은 히틀러에게 독일과 노르웨이 사이에 협력관계를 제안했고, 첫번째 회담 4일 후에 치뤄진 1939년 12월 18일 두번째 회담에서 크비슬링과 히틀러는 노르웨이에게 가해지고 있는 영국, 프랑스 연합국의 위협에 대해 논의했다.
노르웨이의 반유대주의 친독 정당인 민족 단일당의 지도자 비드쿤 크비슬링(Vidkun Quisling)은 노르웨이 침공 당일, 공영방송국인 NRK를 점거한 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쿠데타를 선언하고 신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정부 수반에 올랐음을 선포했는데, 이것은 방송 중계를 이용한 세계 최초의 쿠데타 선언이었다. 비드쿤 크비슬링은 히틀러와 이미 두 차례나 면담한 적이 있기 때문에 히틀러와 독일이 자신을 지지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쿠데타는 독일의 침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독일은 노르웨이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이 신정부를 5일만에 해산시켜버렸다. 그러나 괴뢰정부 고위직에 노르웨이 사람이 있는 것이 좋다고 생각되어 1943년부터는 노르웨이 총리직을 맡게 된다.
이후 노르웨이의 총리대통령으로 임명된 비드쿤 크비슬링은 적극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다. 노르웨이 청년들을 독일군대에 보냈으며, 반항적인 인사를 숙청하고, 노르웨이의 유대인들은 나치에 넘겨주어 노르웨이에 있는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러던 중 1945년 독일이 패전하자 비드쿤 크비슬링은 독일 패전 후 본국으로 귀환한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곧바로 체포되었다. 그는 반역죄, 쿠데타, 살인 등의 혐의로 1945년 9월 10일 사형 선고를 받고 반역죄로 1945년 10월 24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노르웨이는 원래 사형제를 폐지했던 국가였으나 이 인간을 합법적으로 죽이기 위해 망명정부 기간 동안 사형제를 부활시킬 정도였다.
그리고 비드쿤 크비슬링을 포함한 크비슬링 정부의 핵심인사 25명 또한 사형당했다. 그러나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사형을 집행할 때 총살형이 없었는데 크비슬링의 재판 때문에 다시 총살형을 부활시킨 것을 두고 몇몇 사람들은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서 비판하기도 했다.
3 기타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에서는 이 사람의 이름(정확히는 성) "크비슬링"이 모국인 노르웨이 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으로 수출(…)되어 배신자, 반역자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에 이르렀다.[3] 이 단어는 비드쿤 크비슬링이 죽기 전에도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만평이 "베를린을 방문한 비드쿤 크비슬링"이라는 제목의 풍자만화 내용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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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드쿤 크비슬링 : 총통각하, 제가 크비슬링입니다.히틀러 : 그럼 이름은 뭔가?
비드쿤 크비슬링은 자기 이름을 말했는데, 히틀러는 저 말을 "반역자"라는 말로 알아들었다는 만평이다.
- 노르웨이에서는 적군을 도와서 부역을 한 노르웨이 사람들을 크비슬링의 이름을 빗대서 퀴즐링(quisling)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한다.
- 비트쿤 크비슬링이 독재자 자리에 있을 때 크비슬링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르웨이의 매국노들이 그에게 많은 뇌물을 보냈지만 그는 그렇게까지 사치스럽게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 그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오슬로 외곽의 큰 저택은 홀로코스트와 소수 종교 연구를 위한 노르웨이 센터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 세계대전Z에서 좀비의 흉내를 내는 인간을 두고 퀴즐링이라고 부르는데, 어원은 당연히 이 사람.
- 비정상회담 56회에서 노르웨이 비정상 대표인 니콜라이 욘센에 의해 언급되었다. 당시 화두는 배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