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 > | ||||
1921 - 얄마르 브란팅, 크리스티안 랑에 | → | 프리드쇼프 난센 | → | 1923 - 수상자 없음 |
Fridtjof Wedel-Jarlsberg Nansen (프리티오프 베델-얄스베르그 난센)
1 소개
노르웨이의 탐험가, 정치가, 과학자이자 범국민적인 영웅.
노르웨이어 이름인 Fridtjof는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는 '프리드쇼프'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 노르웨이어 발음은 /fɾɪtjɔf/ 이기에 '프리티오프'로 표기해야 한다.
탐험, 과학, 정치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쌓은 노르웨이의 엄친아로, 그의 이름이 노르웨이 해군의 첫 이지스함의 이름으로 쓰였다는 사실이 그의 노르웨이 내 지위를 보여준다.
2 탐험 활동
2.1 그린란드 횡단
1888년 난센은 그린란드 빙원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였다.
2.2 북극 탐험
1893년, 자신이 설계한 '프람 호'[1]를 타고 북극점 정복을 시도했다. 하지만 북극점 도달이 프람 호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동료 얄마르 요한센(Hjalmar Johansen)과 함께 걸어서 북쪽으로 향했다.
1895년 4월 북위 86° 14´ 지점에 도달했다. 이는 이때까지 인간이 도달한 지점 중 가장 북쪽에 간 것이다. 그러나 식량 부족으로 북극점을 밟지는 못하고 귀환을 선택, 바다코끼리와 북극곰을 잡아 연명난 센 남자, 북극곰 따윈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일 뿐하면서 남쪽으로 향하다가 영국 탐험대에게 구조되었다.
북극에서 돌아온 뒤에는 새로 독립한 조국 노르웨이의 정치 일이 바빠지자 탐험가로서는 은퇴하고, 후배 탐험가인 로알 아문센의 후원자가 되었다. 난센은 아문센에게 '프람 호'를 물려주었고, 자신의 동료 얄마르 요한센도 데려가게 했다. 이것이 요한센에게는 오히려 불행이 되었지만(…)
그외에도 남극 탐험에 나서는 영국의 어니스트 섀클턴에게도 여러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나 새클턴은 조랑말과 설상차(스노모빌) 대신 썰매개를 권한 난센의 조언을 무시했다가 결국 남극 탐험에 실패했다. 그래도 새클턴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실패를 인정하고 전대원을 모두 살려서 귀환했다. 그러나 로버트 스콧은 섀클턴의 실패를 무시하고 난센이나 아문센의 조언도 무시하며 고집을 부렸다가 비참하게 얼어죽었다. 아문센 vs. 스콧 항목에서 나오듯이 난센은 스콧을 무모하다고 비난했는데 난센의 비난과 지적은 확실히 들어맞았다.
3 과학 활동
4 정치 활동
난센은 본래 공화파였으나, 외교관이자 작가였던 왕정파 시구르 입센(Sigurd Ibsen)의 주장에 감화를 받아 당시 노르웨이와 동군연합을 이루던 스웨덴 왕국의 오스카르 2세로 하여금, 덴마크 프레데리크 8세의 차남인 칼 왕자가 노르웨이 왕위를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하는 데에 큰 공헌을 하였다. 국민투표 결과 왕정론이 우세하여, 칼 왕자가 "호콘 7세(Haakon VII)"로 즉위하고 1905년 6월 7일 노르웨이는 스웨덴으로 부터 독립하였다. 만약 당시 노르웨이가 왕국이 아닌 공화국으로 독립했다면 난센이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는 것이 유력했다고 한다.[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의 고등판무관으로서 난센은 국적이 없는 난민들에게 발행하는 "난센 여권" 사업을 시작해서 45만명의 난민을 구제하였다. 이 공로로 19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