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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William Beveridge "Billy" Liddell |
생몰년월일 | 1922년 1월 10일 ~ 2001년 7월 3일 |
국적 | 스코틀랜드 |
출신지 | 던펌린주 파이프 타운힐 |
포지션 | 윙어 |
유소년 경력 | 킹시트 주비닐스 (1936~1937) 로켈리 바이올렛 FC (1937~1938) |
소속팀 | 리버풀 FC (1938~1961) |
리버풀 FC 역대 주장 | |||||||||||
로리 휴즈 (1954~1955) | → | 빌리 리델 (1955~1958) | → | 조니 휠러 (1958~1959) |
리델풀(Liddellpool)
1950년대 리버풀의 암흑기에 고군분투했던 캡틴
이안 캘러핸의 롤모델
1 데뷔 이전
빌리 리델은 1922년에 스코틀랜드 던펌린 근처의 작은 마을인 타운힐에서 광부인 제임스 리델과 몽고메리 사이에서 6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 가난한 생활을 했다. 그의 부모는 자식들이 광부 대신 회계사 등의 밥벌이가 될 만한 직업을 원했으나 장남인 빌리는 축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빌리가 7살 때 부모를 설득하여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때 그에게 축구화를 선물하였고, 이후 학교 팀에서 8살부터 뛰며 축구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후 고등학교 시절에 화학, 영어, 수학, 물리학 등을 배우는 와중에 웨일스 럭비 대표팀 선수였던 로니 분에게 럭비를 배웠으나 럭비 선수를 포기하고 대신 축구에 관심을 쏟아 로켈리 바이올렛 시절인 1938년에 해밀턴 아카데미컬이나 리버풀, 파틱 시슬 등의 팀으로 가려고 했으나 리델을 유심히 지켜본 리버풀의 감독 조지 케이는 당시 선수인 맷 버스비로 하여금 설득하여 리버풀에 들어오게 했고, 그는 리버풀에 입단하게 되었다.
2 선수 시절
1938년에 그는 학생 신분의 나이인 16세에 나이로 안필드에 상륙했으나, 1군 진입을 눈앞에 둔 1939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그의 원대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전쟁 중에도 가끔 뛰긴 했지만 본격적인 시작은 1946년에야 이루어졌다.
전쟁이 끝난 1946년에 군에서 제대한 뒤 몇 주만에 1군에 모습을 드러내어 데뷔 첫 시즌에 전기 같은 힘을 선보이며 진면목을 드러내면서 밥 페이즐리와 함께 1946/47 시즌에 팀을 우승시키기도 했다. 이런 활약으로 그는 영국 대표팀에 두 번 부름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리델도 1950년 FA컵 결승전에서 부상을 당했는데, 그는 사나이답게 꾹 참고 계속 뛰었으나 그의 속도와 공격성이 사라지자 팀의 공격력이 무뎌져 결국 아스날 FC에게 2-0으로 패했다. 그는 팀이 1953/54 시즌에 강등당할 때에도 절대 팀을 떠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실력을 과시해왔다. 선수 생활 동안 그는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고 최고라는 이유로 빈둥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사실 그가 팬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도 선수 생활과 동시에 회계사로써의 일뿐만 아니라 음주를 안 하는 감리교 목사이면서 수많은 자선활동을 한 데다가 심지어는 한 병원의 라디오 DJ로도 활동했다고 한다.
3 은퇴 이후
1977년 당시 밥 페이즐리 감독이 이끄는 선수진들과 함께.
존 반스와 함께.
1961년은 끝으로 리버풀을 떠난 뒤에도 리버풀의 팬으로써 서포터즈 회장으로 활동하는 등 평생을 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어 왔으나, 1990년대부터 파킨슨병을 앓다가 2001년 7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4 여담
1960~70년대에 리델 대신 윙어로써 리버풀의 최다 출장 기록을 만들어낸 이안 캘러핸도 소년 시절부터 리델을 우상으로 꼽아왔는데, "내 생각에 빌리 리델과 케빈 키건, 케니 달글리시는 최고의 선수이다. 그러나 나는 리델을 다른 두 명보다 위대한 선수로 꼽고 싶다."라고 했다.